[작가] 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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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 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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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6년(1855) 12월 11일에 전라도 광양현의 서석촌(西石村)에서 가난한 시골 선비의 아들로 태어난 황현의 자는 운경(雲卿)이니 본관은 장수(長水)다. 20살 때 그는 청운의 뜻을 품고 한양에 올라오자마자 이건창(李建昌)을 찾아다녔다. 매천의 시를 본 이건창은 탄복했으며 강위ㆍ김택영ㆍ정만조 등 쟁쟁한 청년 문사들과의 교유도 그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벼슬길과는 인연이 닿지 않아서, 29세가 되어서야 특별히 시행된 보거과(保擧科)의 초시에서 장원에 뽑히었다. 그러나 그의 출신이 너무 한미했으므로 다시 2등으로 내려앉고 말았다. 이듬해 일어난 갑신정변은 그나마 벼슬로 입신하려던 그의 꿈을 좌절시켰고, 그는 낙향하였다. 매천은 당시의 정부 관료들의 무능과 부정부패, 가렴주구를 지켜보며, 이들을 ‘도깨비 나라의 미친 자들’(鬼國狂人)이라고까지 통매하였다. 이후 매천은 구례에 서재를 마련, 삼천 권이 넘는 책과 씨름하며 독서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갑오동학혁명과 이를 빌미한 청일전쟁, 갑오경장 등의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격랑의 역사 속에서 그는 현실에 등을 돌려 옛것에만 몰두할 수는 없었다. 1910년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고 매천은 음식도 들지 못하고 슬퍼하였다. 그리고는 〈절명시〉 4수와 아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벼슬을 안 했기에 죽어야 할 의무는 없다 하면서도, 이 나라 조선의 오백 년이 선비를 키워 왔음에도 나라가 망함에 앞서 나라 위해 죽는 자가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는 뜻을 남겼다, 이때 그의 나이 쉰여섯이었다. 매천 자신도 자신의 자결은 인을 이룸이지 충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매천야록》에 새겨진 우국의 충정과 근심어린 탄식이 있지만, 그는 타고난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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