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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 인문 PD 손민규 추천] 좌절을 변기에 버렸는데도 답답하다면
2022년 10월 11일
8년 전 앓았던 유방암이 다발성 전이가 되어 “갑자기 병세가 악화될지도 모릅니다”란 말을 듣고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는 문화인류학자 이소노 마호에게 편지를 주고받자고 제안한다. 그들은 인연을 오래 이어온 사이도 아니었다. 미야노 마키코가 죽을 때까지 계산하더라도 1년이 채 되지 않았고, 직접 만난 것도 다섯 번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무언가 이끌렸고, 삶과 죽음에 대해, 필연성과 우연성에 대해 누구보다도 진지한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가 각각 10통의 편지 속에 담겼다.
그들은 미리 어떤 대화를 나눌 것인지 계획하지 않았다. 서로의 편지 속의 내용을 화두 삼아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을 뿐이다. 계획은 없었지만, 예상한 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편지는 예상대로 가지 않았고, 오히려 그 예상대로 가지 않음이 그들이 나눈 주제와 더 관련이 있었다. 대화가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듯 편지로 나눈 대화는 생각을 깊고 넓게 만들었고, 삶에 대한 애정과 다가오는 죽음을 용기 있게 맞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질병 앞에서 미야노 마키코는 의연했고, 이소노 마호는 그런 미야노 마키코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한 번도 스스로 철학자라고 말하지 못했던 미야노 마키코는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비로소 철학자가 된 것 같다고 했다고 한다. 자신이 평생 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구키 슈조의 글(우연성의 철학)을 다시 해석하게 되고, 그 본뜻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내면을 깊게 성찰하게 되었고, 끝까지 삶을 사랑할 수 있었다. 그게 생각하고 글로 옮긴 삶에서 우연이 의미하는 바는 의미심장하다. 어떤 잘못된 일을 당했을 때(그녀처럼 죽을병에 걸렸을 때와 같이) 흔히 그것을 운명이라 생각한다. 처음에는 “왜 내가?”의 반응을 보이다가, 분노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다, 결국은 받아들이게 된다는데, 미야노 마키코는 그런 운명을 부정한다. 아니, 운명 자체를 부정한다기보다 어떻게든 그렇게 되었을 거란 운명론을 거부한다. 우연이 반복되는 가운데, 우리는 늘 선택하는 상황에 놓이고, 그때 우리가 하게 되는 무수한 선택이 삶을 구성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므로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선택을 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된 것이다. 거창하게 표현은 하지 않지만, 삶에서의 주체, 당사자로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고귀함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놓치 않았다.
미야노 마키코는 죽기 직전까지도 ‘시작’의 의미를 되새겼다: “저에게 아직 내일이라는 시간이 있다면, 저는 사람들과 지금 마주함으로써 새롭게 일어날 무언가를 믿고 싶습니다.” 삶을 완결시키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누군가가 이어주기를 바랐다. 그게 그녀에게 ‘시작’의 의미였다. 그렇게 늘 시작하는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문장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쩜 이 세계란 이토록 경이로울까. 저는 ‘시작’을 앞에 두고 사랑스러움을 느낍니다. 우연과 운명을 통해서 타자와 함께하는 시작으로 가득한 세계를 사랑합니다. 이것이 지금 제가 도달한 결론입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죽음은 보편적이지만 유일한 경험이다.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지만, 누구나 단 한 번만 겪는 일이다(겪는다는 표현도 어색하다. 그 일이 끝난 후엔 이미 아무 것도 없으니. 그걸 인식할 주체가 사라지는데). 그러므로 누구는 담대해질 수도 있으며, 또 누구는 그 앞에서 비겁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두려울 수도 있으며, 운명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런 죽음을 미야노 마키코는 경이로운 세계를 감탄하고, ‘우연과 운명’에 불평하지 않고, ‘시작으로 가득한 세계를 사랑’하면서 맞이했다. 그랬기에 이소노 마호 역시 의연하게 그녀를 보낼 수 있었고, 또 그 후엔 새로운 자신의 세계를 찾아나설 수 있었다.
모든 책에 ‘죽음’이 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죽음’ 자체를 다룬 책을 따로 정리해보곤 한다. 지금까지 가장 감동적인 책을 들라면 나는 서슴없이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될 때》를 들었었다. 이제 한 권을 더 보태도 될 것 같다.
심각해지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질병 그리고 죽음이라는 묵직한 단어가 제목에 쓰인 책을 골랐다. 심지어 저자 중 한 명은 죽음을 앞뒀다고 적혀 있었다. 대체 내가 책을 고를 무렵 원했던 건 무어였을까. 살면서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언제 어디서 어떠한 부모로부터 태어날지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혹자는 생의 마지막 순간만큼은 스스로 택할 수 있지 않냐는 질문을 던지기도 하던데, 영생을 꿈꾼다 하여도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는 건 모두가 감내해야 하는 숙명이다. 유한한 존재로서의 나, 내가 속한 세상까지는 아나가지 못하겠으나 나 한 명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사그라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주는 위압박은 얼마나 거대한지. 내 뿌리깊은 우울의 일부는 이로부터 비롯됐지 싶다. 아직 직접적으로 죽음에 다가서는 경험을 했다거나 당장 숨이 넘어갈 정도의 고통을 앞두고 있는 게 아님에도 그랬다. 상황이 달라진다면 이 막연한 감정들이 마치 눈 앞의 파도처럼 일렁이며 나를 집어 삼킬 것이다.
1999년, 2000년 대학 졸업. 대강의 나이를 가늠해 본다. 두 인물이 처음부터 절친하지 않았음에도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철학자와 의료인류학자니 얼마나 심오했을까 싶다만, 채겡 적힌 게 전부는 아닌지 두 인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말을 놓았으며 내 눈으로 접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깊은 마음을 나눴지 싶다. 잔인하게도 첫 만남이 있을 무렵 이미 마지막은 예고된 상태였다. 미야노 마키고는 갑자기 병세가 악화될 가능성에 대해 의사로부터 언질을 들은 상태에서 고민했다. 그간 별여 놓은 많은 일들을 수습하고, 마치 죽음을 예견한 사자처럼 무리를 떠나는 상상을 실천으로 옮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길을 걸었다. 굳이 나서서 신변을 정리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연을 맺기까지 했다. 자신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이소노 마호는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었다. 짧은 시간만이 우리의 눈 앞에 놓여 있다. 상실의 감정은 내 모든 걸 뒤흔들 정도로 클 것이다. 용기가 모든 걸 잊게 만들어 주었다. 당시엔 몰랐다는 말은 진정 몰랐음을 뜻하진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이 쓰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꼭 너여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 우리는 영영 서로를 모른 채 살아갈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게 됐다. 조금 더 어렸을 때도 아닌 지금 이 순간, 내가 아파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아니한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로부터 비롯된 이야기는 무수히 뻗어 나갔다. 상대가 중증 환자임을 인식한 순간 나의 태도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 음식은 건강을 해칠 수 있으니 피해야 하고, 언제 의료진이 필요할지 모르므로 여행은 꿈꾸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이 왠지 상대에게 어울릴 듯하다. 조금이라도 가방이 무거워 보인다면 상대를 대신해 들어주어야만 할 거 같은 압박. 특별히 내가 착해서가 아니라 왠지 그러해야만 할 거 같아 행한 일들이 상대를 오히려 환자로 만들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일침이 나를 때렸다. 몸이 괜찮아지면 무엇을 하겠다는 다짐은 다음의 기약이 가능한 경우에나 성립할 수 있지만, 그 다음을 확신하는 일은 인간에게 주어진 몫이 아니다. 지금을 살아가면서 최대한 나의 영역을 확장하는 거, 그리하여 한낱 점에 불과할 수도 있었던 나를 하나의 선으로 연장하는 거. 아무리 생이 마지막 순간에 도달했다 하여도 이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찾기는 쉽잖을 것이다.
마지막 편지가 쓰인 게 2019년 7월 1일이다. 연명에 든 게 7월 22일이니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어떠한 진통제로도 다스릴 수 없었을 통증과 함께하며 외로웠을 생을 남은 저자는 상상한다. 괴롭다. 그래도 아름다운 완주였다. 떠난 이도 그리 생각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 마냥 슬프지만은 않다. 나에게도 언젠가는 닥칠 그 일, 그가 잘 해냈듯 나 또한 완성할 수 있을 듯하다.
그칠 듯 이어지는 글의 마지막에 이윽고 닿았다. 우연과 필연. 무엇이 우연이었으며, 무엇은 필연이었던 걸까. 마치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도달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영원히 꾸게 될 꿈이 조금 더 촘촘하게 영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생을 지켜내야겠다. 비록 나에게는 편지를, 마음을, 그 어떠한 것도 주고받을 인연이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