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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대의 기록법] 키미앤일이, 지구를 사랑하는 착한 기록
2021년 07월 27일
지금 내가 키우고 있는 강아지인 초코는 나이가 열 두살이다. 내가 데려온 아이가 아니라서 어디서 어떻게 우리집에 온 건지는 같이 살았던 여동생만 안다. 걔도 선물(?) 받은 강아지이고 그 때 선물해주었던 남자친구랑 쫑나서 초코가 언제 태어났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도 받지 못했다. 여동생은 나랑 같이 살았던 약 팔 년의 기간동안 초코에 대한 관심은 퇴근 후 집에 와서 단 삼 분 정도 안아 준 것에 불과하고 배변패드 한 장을 산 적이 없는 파렴치한 인간이다. 웃긴건 초코를 이용해 연기를 아주 그럴듯하게 잘 해서 강아지를 사랑하는 역할에 감동한 한 순진한 수의사와 결혼했다는 것이다. 늘 초코의 출생에 대해 생각할 때면, 사기 결혼으로 인생 역전한 인간말종이 떠오르면서 괘씸해진다. 암튼 결혼 후 나랑 남동생은 그 인간말종과 아주 기다렸다는듯이 절연해버렸다.
초코를 십 이년 가량 키우면서 나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늘 느낀다. 아마 내가 아이를 낳아도 나의 이런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주말만 되면 애견동반이 되는 카페와 식당을 검색해서 먼 곳도 마다 않고 다녔다. 초코가 행복해하면 나도 좋았다. 이건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형성되는게 아니다. 사랑이란 이토록 위대한 것이며 삶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는걸 배웠다. 초코가 없었다면 아마도 너무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이런 기쁨도 몰랐을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며 또 다른 사랑에 대해서 느끼겠지만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식어버리고 서로 배신하고 성격차이로 골머리 앓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강아지는 아니다. 정말이지 한결같다. 물론 초코는 나이가 많아서 어렸을 적보다 기운이 많이 없고 몸이 한 두군데씩 아파하긴 하지만 내가 집에 들어왔을 때 반겨주는건 십 이년 간 늘 한결같다.
초코가 처음 내 품에 왔을 때 털 달린 동물의 몸을 처음 만져보고 굉장히 이상한 기분을 느꼈었는데.. 키우면서 언제부터인가 고기(특히 치킨)를 먹는 게 거북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초코를 만졌을 때 느꼈던 몸의 구조가 너무 비슷해서이다. 기분이 매우 불쾌했다. 물론 식탁 위에 있는 이 고기는 다른 동물이지만 이 아이도 생명이었을 것인데.. 왜 인간은 자신이 키우는 반려동물은 이토록 사랑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동물은 무참히 살해해서 식욕을 충족시키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물론 나는 비건은 아니다. 도저히 할 자신이 없다. 직장인으로서 비건의 삶을 산다는 건 불편함을 넘어서서 불가능하다고 본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이 책을 읽고 막연히 채식위주의 삶에 대한 소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결국 저자가 채식주의자가 된 이유도 단 하나이다. 바로 '사랑'이다. 아주 신기한 것은 저자는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철저한 비건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매우 존경스럽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 기후변화와 채식주의와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막연히 들어보았을 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알지 못했는데 소 한마리가 발생시키는 탄소가 자동차 한 대 보다 치명적이라고 한다.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채식을 한다는 것은 나의 작은 행동 하나가 지구를 좀 더 건강하게 만든다는 것을 말이다.
책을 덮고 될 수 있는 한 고기를 줄이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확고해졌다. 말하자면 플렉시테리언이랄까. 위에서도 언급했듯 내가 저자와 같은 프리랜서가 아닌 이상 고기를 아주 끊으면서 삼시세끼 집에서 차려 먹는 삶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일부러 고깃집에 가거나 고기만을 먹기 위한 식단은 점점 줄고 있다. 달걀도 동물복지 달걀을 주로 구입하고 있고 (너무 비싸서 부담되긴하지만) 우유 또한 무항생제 우유를 먹고 있다. 이런 소비는 물론 채식주의와는 별로 상관없을 수 있지만 다른 생명에 대한 사랑의 또 다른 표현방법이자 아주 작은 노력이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비건이 되었으면 하는 건 아니다. 나처럼 동물의 복지와 도축의 잔혹함에 대해서 곰곰이 한 번이라도 생각하고 아주 작은 노력이라도 해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아주 작은 노력들이 모이면 모두가 행복해지지 않을까. 동물들도 지구도 말이다.
나는 비건이 아니다.
고기를 사랑하며, 저자가 말하는 대다수의 반응 '고기 없이 어떻게 살아?'라고 외치는, 맛있는 음식에 대한 포기가 안되는 육식주의자인 것이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공감한다. 인간은 채식만으로도 살 수 있게 설계되었으며, 나의 육식을 위해 일상 생활의 편리함을 위해 세계의 많은 것들에 의존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독자에게 비건을 해야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비건의 장점과 중요성을 늘어놓지 않으며 본인의 생활을, 일상을, 그리고 비건을 함으로써 얻게되는 불편함들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비건을 선택한 후 얻게 되는 불편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육식을 선호하는 나를 찔리게 만들었다.
우리 사회는, 특히 우리 나라는 소수에 각박하다. 다수 속에 숨어 안도하고, 다수에서 떨어져 나간 소수를 존중하지 못하는 사회다. 소수를 욕하지 않으면 다수에 피해가 오는 것처럼 우리는 남들과 '다름'을 '틀림'이라고 말하거나 '부족함'이라고 표현한다.
"사회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진 이방인"
"일반적이지 않은 것은 어떻게든 불편함이 따른다"
나는 다수에 속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소수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내가 저자가 느꼈던 불편함에 양심이 찔렸던 이유는, 비건이 아님에도 이 책을 읽고자 하는 것은 나는 알지만 다수에 속해있기를, '육식을 선택'했다면 저자는 알기에 소수를, '비건을 선택'했다는 점 때문이다. 나와 다른 누군가의 선택에서 그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또한 나와 같은 이들을 어리석다는 등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외면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고 "언제든 비건이 될 가능성"을 열어두라고, 존중하라고 말했다.
"비건, 채식이라는 취향이 예민한 주제가 아니라 마치 돼지고기 취향, 해산물 취향처럼 평범하고 친숙한 카테고리가 되는 날까지"
내가 이 책을 선택하고, 읽고자 했던 것은 바로 위 한 문장이 전부가 아닐까 생각한다. 육식, 채식, 비건 등등 모두 선택이며 취향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반대편에 선 사람을 무작정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취향을 '존중'해주고, 다름을 '인정'해주는 것은 어떨까?
"그러나 규칙과 규율이 주는 무게감에 짓눌려서 벅찰 땐 가끔 내려놓는 편을 택하는 것이 차라리 좋다."
나에게 이 책은 육식과 채식을 넘어서 사랑, 존중, 이해와 같이 인간으로 가질 수 있는 대전제를 설명해 준, 위안이 되어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