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다카시 저/장은주 역
다이애나 리카사리 저/카일리 박 역
박홍순 저
처음엔 제목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껴 구매했는데 내용은 전혀 다르다고할순없지만 조금은 독특한 이야기 였습니다. 내 시간을 팔고 빌려주고 주는 그런 이야기인데 묘하게 빠져들더군요. 읽는내내 그럴수도있겠다. 저한테 대입해서 읽기도했고요. 그리고 참 사람은 혼자 살수없고 상대적으로 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필요없이 결국 서로가 필요한 운명인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느 조직이건 간에 핵심적인 활동을 하며 남들 몫의 2~3배를 기여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냥 머릿수만 채우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잉여 분자는 남들의 눈총을 받아 가며 결국 도태되는 게 보통이겠는데... 때에 따라서는 정반대로, 다들 자기 몫을 하지만 최소한의 형식을 채울 만한 인원에는 부족할 때, 그저 구색만 맞추는 일로도 수요되는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싶지만,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오히려 찾으려 들면 막상 아쉬워지는 게 그런 존재들입니다. 아예 이런 일만 전문으로 해 주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이 책의 저자 "렌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같은 이들입니다. 필요하면 누구한테나 그런 인력을 일시 대여한다고 해서 앞에 "렌탈"이 붙었습니다.
1960년대 미국 영화 중에는 "도그 워커", 즉 개 산책 시키는 일만 전문으로 하는 어떤 젊은이의 이야기가 담긴 게 있는데, 저자의 전직(前職)은 그것보다는 훨씬 난도 높은 직업이었습니다(게다가 저자는 대학원까지 다닌 인력이기도 합니다[p66]). 학습지 등 교재 편집에 관한 것이었다는데, 저자는 그 일을 하면 할수록 흥미를 잃고 스트레스를 받던 통에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블로그를 통해 이런저런 시도를 하던 것이 발전하여 지금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직업" 영위에 이른 것입니다. "직업"이란 무엇인가 쓸모 있는 행위를 하는 것인데, "그냥 머릿수만 채우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직업"이라는 게 참 아이러니컬합니다.
그럼 어떤 일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일까요? 예를 들면 p23에는 평소에 층간 소음 때문에 불편하게 지내던 아래층 세대에가 빨래를 떨어뜨려서 찾으러 가야 하는데, 혼자서 가려니(독신 가구인 듯) 겁이 나서 누가 같이 따라가 줄 사람을 찾는다는 의뢰가 나옵니다. 이때 따라가는 사람은 어떤 실력 행사나 말로 하는 청구 같은 걸로 돕는 게 아니라, 그냥 뒤에 서서 일행임을 가장만 하면 되는 겁니다. 사회에서는 한 사람이 나서는 것과, 그래도 비슷한 처지에서 편을 들어 줄 사람이 있는 게 결과가 다를 때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누구라도 혼자 사는 게 드물었고, 따라서 머릿수는 어떤 경우에도 자동으로 채워지는 게 보통이었으나, 현대에는 그렇지가 않죠. 얼마든지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예컨대 한국 같으면 "입맛이 맞아 단골 식당으로 삼던 곳이 있는데, 여친과 헤어진 후 계속 혼자서 거길 찾으려니 어색해서 같이 밥만 먹어 줄 사람을 구하는" 의뢰도 있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아마도 정상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이런 일을 하지만 미래에는 이보다는 발전한 어떤 일을 하는 꿈"을 갖는 게 보통이겠죠. 그런데 저자는 "지금 이 시점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일을 한다는 꿈을 모두 이미 이뤘는데, 또 무슨 꿈을 미래를 향해 가지라는 어떤 강박"을 거부한다고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현재가 불행하거나 덜 만족스러워도, 어떤 꿈을 품으며 현재의 곤란을 이겨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저자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현재가 지극히 좋은데 왜 또 다른 꿈을 품냐는 거죠. 오히려 꿈(있지도 않지만)을 생각하면 저자 같은 사람은 (괜찮던) 현재가 (갑자기) 괴로워지는 겁니다. 저자의 의도는, 이뤄질지 안 이뤄질지도 불확실한 꿈 같은 것으로, 괴로운 현재에 최면을 거는 당신들은 과연 건강한 사람들이냐고 되묻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런 질문에 얼마나 당당하고 확신 있게 받아칠 수 있을까요?
과거 X세대라는 개념이 코인될 때부터, 현대인들은 더 이상 집단이나 군중 속의 일원이 아니라 자기 개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게 하나의 사명처럼 여겨졌습니다. 이걸 못하면 멍청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감각의 소유자로 치부되었죠. 그런데 세월이 다시 한참 지나 이 책 저자 같은 사람이 등장해서는, 왜 개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냐며, 오히려 튀지 말고, 나답지 않아도 된다며 그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라고 합니다. 어쩌면 이런 제법무아, 물아일체의 경지(?)가 더 모던한 태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알고보면 개성이라는 게 어디 있습니까. 기껏해야 삼류 잡지나 TV(이미 철저히 상업화한)를 보고 양아치 패션 따라하는 걸 개성이라며 미화, 포장, 왜곡하는 거죠.
XXX이나 기타 사회에 크게 물의를 빚은 자의 재판이 열리면 그를 방청석에서나마 응징(?)하고자 몇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참석하려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원래 민주주의 국가에서 재판은 공개재판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반 재판을 방청하려는 사람은 (당연히)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반대로, XXX의 경우처럼 피고인을 응원하기 위해 방청석을 일부러 메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p65에는 교수의 비위를 폭로하는 어느 학생이 외롭게 투쟁하며(소송 진행 중), 자신 혼자가 아니라는 걸 상대에게 알리기 위해 법정 방청객 알바를 의뢰하는 예가 나옵니다. 이런 경우는 웃고 넘어갈 수가 없죠. 꼭 대가를 지급하지 않아도, 만약 한국에서 이런 일이 있다면 유명 커뮤니티게시판에 글 하나만 올려도 "의용군"이 대거 몰려들 겁니다. 방청뿐 아니라, 법정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범위 안에서 야유도 적절히 보내는 등 "덕불고 필유인"을 실천하려는 사람이 많지 싶습니다.
이분이 "아무것도 안 하는 직업"으로 유명해지자 반대로 이를 오마주(p83)해서 "무엇이든 다 해 주는 직업"도 등장했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무엇이든 들어(聽) 주는 일" 같은 건데, 저자는 자신의 일과 저런 (모방자의) 일을 미묘하게 구별합니다. 즉 자신의 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 중 일부인 그저 듣는 일"이지만, 오마주하는 사람들의 "듣기만 하는 일"은 "안 하는 게 아니라 무엇인가 하는 일"이란 거죠. 요약하면 자신은 총체적 부작위, 그들은 "특정 작위"라는 건데 이쯤되면 심오한 철학의 세계로 진입하는 듯도 하네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듣기만 하)는 사람"은 "카운슬러"하고는 다릅니다. 카운슬러는 (이 책 저자와 그의 폴로어[이 책에서는 팔로워를 이렇게 표기합니다]들의 생각에 따르자면) 내담자와 결국은 상하관계가 형성되기 쉽기 때문에 완전한 힐링이 어렵다고 합니다. 반면 "들어 주기만 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이미 내린 해법에 전폭 동의해 주는 셈이므로 더 도움이 많이 되는 거죠(어디까지나 이분들의 생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어떤 해답을 주려 애쓰지 말고 그냥 듣기만 해 주는 걸 원하고, 그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야 하겠습니다. 반대로, 맞장구도 과하게 치지 말라고 합니다.
이 중에는 과거 옴진리교 신도였는데 그 종교 단체가 사회적으로 엄청난 물의를 빚은 후 어디 가서 자신의 그런 이력을 이야기도 못 하고 냉가슴을 앓던 이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분한테는 적절한 리액션을 좀 보여 줘야 효과가 더 좋은 텐데, 맞장구를 친다는 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동조해 주었으며 저자는 그런 자신의 "자연스러운 반응, 응대"에 만족하는가 봅니다. 그 사람은 아직도 옴 진리교 수뇌부가 과연 테러 명령을 직접 내렸는지 의문을 품고 있는데, 교단에서는 항상 자신에게 친절하게만 대해 주었기 때문이라네요. 대부분의 문제 종교 신도들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기에 외부인에게 "우리 OO교가 무슨 잘못이냐?"고 되묻는 습관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말을 하는 순간 그는 소외, 배제되는 건데 말이죠. 이유가 필요 없습니다. 외부인은 아무도 그런 질문에 긍정하지 않고 즉시 상대를 멀리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말 그대로 아무 일도 안 하는 게 직분이므로, 이게 무슨 봉사 활동으로 번진다거나 의뢰인에게 과하게 공감해도 안 됩니다. 의뢰인이 그걸 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의뢰는 DM으로 저자에게 전해지는데 저자 역시 그런 식으로 소통합니다. 이때 아주 형식적인 DM만 보내며 응대하기도 하지만 그게 건성이라고 비판 받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과몰입은 의뢰인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스펙이 뛰어난 사람도 AI가 널리 보급된 미래에는 직업을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저자의 직업 같은 일은 이미 어느 정도 "봇"에 의해 대체되고 있을 수 있으며, 이에 대해 저자도 조바심을 느끼기는 하는 것 같습니다. 운이 없으면 이 저자의 다음 책은 "이제 실직했고, 새롭게 찾은 나의 일이 어떠한지"를 담았거나, 혹은 실직 후의 비분강개함을 털어놓는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현재 자신의 일에 만족하며, 공감과 중립, 과몰입과 쿨한 동조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미묘하게 오가며 적정선을 지키는 자신의 능력과 성취에 만족하는 듯 보입니다. 어쩌면 그는 AI에 맞서 인간만이 해 낼 수 있는 영역의 한계가 어디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파일럿 노릇을 하는 중일 수도 있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출판사 후원을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 미메시스 / 렌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우정
아이와 어른은 친구나 우정에 드는 비용이나 스트레스에 차이가 있는 것은 확실. 어른, 특히 사회인이 되면 요구되는 친구 이미지도 점점 복잡해짐.
의뢰인 친구
의뢰를 하는 의뢰인은 자기 취미에 친구를 말려들게 함으로써 그 친구에게 어떤 종류의 빚을 지는 데에 주저가 되는게 아닐까 싶다.
서로 대하기 쉬운 상대나 편리한 친구를 원한다는 공통 인식은 있다.
거짓 없는 의뢰인 친구
용도에 따라 친구 역할이 요구되는 게 스트레스였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의뢰인이 원하는 역할을 연기하는 셈.
거짓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편하다.
의심부터 가게 만드는 의뢰
만약 내가 사생활에서 누군가에게 혼자서는 들어가지 못하는 가게가 있는데 같이 가달라고 부탁받는다면 뭔가 다른 목적이나 밀당이 숨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자연스레 들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이용하는ㄴ 사람에게는 그게 없다.
어디까지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써 아무런 꿍꿍이 없이 나를 쓴다는 걸 알 수 있어서 안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