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분야 전체
크레마클럽 허브

두 리더, 영조 그리고 정조

조선 르네상스를 연 두 군주의 빛과 그림자

노혜경 | 뜨인돌 | 2021년 9월 3일 한줄평 총점 6.0 (20건)정보 더 보기/감추기
  •  종이책 리뷰 (19건)
  •  eBook 리뷰 (0건)
  •  한줄평 (1건)
분야
역사 > 세계사
파일정보
EPUB(DRM) 52.54MB
지원기기
크레마 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 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폰 안드로이드패드 전자책단말기(일부 기기 사용 불가)

이 상품의 태그

카드뉴스로 보는 책

책 소개

영조와 정조의 결정적 순간들,
르네상스 조선을 무엇을 꿈꾸었나

조선 르네상스기의 문을 열어젖힌 개혁 군주, 영조. 난관을 극복하고 국가의 리더가 된 그는, 격동의 시대 한가운데서 갖은 저항에 맞서 국가 개혁을 실행해나갔다. 한편 그 개혁의 기치는 후대 정조로 이어졌으나, 아쉽게도 미완의 실험에 머물고 말았다. 새 세상의 꿈을 향해 나아간 영조 그리고 정조. 그들의 통치행위 50장면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를 통해, 근대 태동기 조선 군주 및 정치지도자들의 리더십을 살핀다. 아울러 영조와 정조에 관한 오해와 편견을 넘어서서, 당대 조선 사회를 올바로 이해하는 새로운 역사적 시각을 제시한다.

목차

들어가는 글 :
영조와 정조, 불안과 공포 속에서도 리더로서 비전을 품다
제1장
조선 르네상스 군주의 초상 : 영조와 정조
1. 왕이 되고프면 민정 시찰을! : 연잉군의 준비
2. 영조의 치명적 콤플렉스, 그리고 넘어서기
3. 영조의 후계자 교육 :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
4. 왜(倭) 자가 붙은 건 꼴도 보기 싫다!
5. 영조는 왜 서둘러 노인 소리를 듣고자 한 걸까
6. 정조의 자기과시적 리더십 : 화성에서의 일장 연설
7. 피 묻은 적삼이여, 오동나무 지팡이여 : 금등문서
8. 나는 부딪히면 바로 폭발한다 :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9. 조선의 덕후는 서글프다 : 정조도 배척한 마니아들
10. 정조가 친위 부대 장용영을 만든 이유는?
제2장
개혁을 향한 의지 : 저항, 극복 그리고 미완
1. 청의 조문단을 오해하다 : 외부에 대한 수용성의 한계
2. 진정 백성을 위한 것이었는데… : 균역법, 절반의 개혁
3. 흰 걸 검다고 해도 모를 터! : 영조의 외국어 교육 정책
4. 특혜 말고 솔선수범! : 영조의 새 좌경법
5. 영조가 귀찮은 속대전 편찬에 나선 이유
6. 이을 것과 고칠 것을 분명히! : 영조의 계술(繼述)
7. 교육이 빠진 우상화는 소용없다 : 영조의 서원 철폐령
8. 전례가 없으면 어떤가 : 영조와 정조의 전례 사용법
9. 나는 군사(君師)다 : 정조, 미완의 개혁들
10. 청탁 근절은 의정부에서! : 초계문신 제도의 한계
제3장
제도적 실험들 : 시대에 대한 이해 혹은 오해
1. 봉분도 깎고 비석도 뽑고 : 과잉 충성의 부작용
2. 여염집 탈취를 금한다! : 영조의 부동산 정책
3. 문서에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 영조의 행정 관행 개혁
4. 낡은 제도에 새 생명을 : 영조가 시행한 특별한 시험
5. 명분도 실효성도 부족한 편법 : 공명첩의 양면성
6. 왕인 내가 이렇게 절약하는데! : 영조의 사치 금지령
7. 횃불 말고 초롱으로 밝혀라 : 절약 강조의 아이러니
8.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정책 : 금주령
9. 정조는 왜 열심히 기록했을까 : 『일성록』의 실용성
10. 문제는 평시서가 아니다 : 경제의 새 판을 꿰뚫은 정조
제4장
공감과 참여의 리더십 : 진심 그리고 한계
1. 허울뿐인 자존심이냐, 원칙을 지켜 얻는 실리냐
2. 믿음을 줘야 성을 지킬 수 있다 : 영조의 총력 방어론
3. 창업은 쉽고 수성은 어렵다 : 영조의 경복궁 되살리기
4. 반대가 많은 대형 사업, 관건은 공감이다
5. 영조가 민심 청취에 직접 나선 이유는?
6. 공공에 기여한 자에게 기회를! : 영조의 공신 활용법
7. 전통의 부활, 재창조 : 영조의 친경(親耕)
8. 실효를 겨냥한 정조의 복지 : 척서단 제공
9. 모두에 실질적 혜택을! 그러나… : 정조의 사면령
10. 한 가지만 고쳐서는 안 된다 : 상피 제도
제5장
변혁의 시대 리더의 권위 : 묘수 혹은 악수
1. 내로남불의 정치 : 당동벌이(黨同伐異)
2. 게으른 부하에 대한 영조와 정조의 다른 대처법
3. 영조가 소론을 남겨둔 까닭 : 이인좌의 난
4. 같은 생각을 품은 자, 나와 엎드리라 : 나주 벽서 사건
5. 버릇없는 박문수는 어떻게 보검의 손잡이가 되었을까
6. 무례한 신하를 제압하는 방법 : 영조와 대보단
7. 가혹하게 처벌하면 부조리가 사라질까 : 영조의 팽형 쇼
8. 오늘 저녁은 배불리 먹지 마라 : 정조의 사조직, 규장각
9. 사적인 정을 쌓아야 한다! : 정조의 비선, 동덕회
10. 정조, 내가 바로 만천명월주인옹이다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저자 소개 (1명)

저 : 노혜경
호서대학교 혁신융합학부 교수.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미국 UCLA에서 Postdoctoral Scholar 과정을 거쳤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실학박물관 학예사, 덕성여대 연구교수 등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조선후기 수령 행정의 실제』 『영조어제 해제 6』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공저) 『인도, 신이 인간이 되어 사는 세상』(공저) 등이 있다. 조선 후기사 중 행정 분야로 연구를 시작했지만, 인접 학문과의 융합에 뜻을 두고 다방면으로 관심을 넓혔다. ‘조선의 생활문화나 ... 호서대학교 혁신융합학부 교수.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미국 UCLA에서 Postdoctoral Scholar 과정을 거쳤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실학박물관 학예사, 덕성여대 연구교수 등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조선후기 수령 행정의 실제』 『영조어제 해제 6』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공저) 『인도, 신이 인간이 되어 사는 세상』(공저) 등이 있다.

조선 후기사 중 행정 분야로 연구를 시작했지만, 인접 학문과의 융합에 뜻을 두고 다방면으로 관심을 넓혔다. ‘조선의 생활문화나 제도의 전통이 근대를 넘어 현대로 연결된 지점은 없을까’ ‘조선의 상업은 왜 오늘날의 경영이나 기업으로 연결되지 못했을까’ 등을 궁리하며 지방사, 생활사, 왕실사, 법제사, 상업사, 경영사, 기업사로 연구 영역을 확대했다. 학문 영역의 벽을 넘는 중간적 주제들에 대한 관심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울러, 오늘날의 다양한 사회문제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그 시원적인 조각들을 찾아내는 데에도 힘을 쏟고 있다. 꼭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역사라는 ‘빅데이터’의 활용법을 공유하는 작업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전공 연구와 대학 강단에서의 교육은 물론, 대중 인문 강연 또한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온라인 강연 플랫폼, 그리고 유튜브 ‘인문채널 휴’ 등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출판사 리뷰

다시 읽는 영조, 새로 읽는 정조

당신이 알고 있는 영조와 정조를 리셋하라!

조선 르네상스의 두 리더,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알고 있나

오늘날 한국인에게 익숙한 조선의 두 군주, 영조 그리고 정조. 우리는 이들의 곡절 많은 이야기를 다양한 작품을 통해 접해왔다. 조선 역사를 다룬 많은 책에서 두 군주의 통치행위와 그 시대상을 다양하게 해석하여 제시했고, 여러 영화와 드라마 등 사극에서도 이들을 둘러싼 이야기를 앞다투어 다루었다. 이렇게 곳곳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영조와 정조의 모습에는, 그런데 어떤 ‘스테레오 타입’이랄 게 있다. ‘영조는 불우한 아들 사도세자를 비정하게 죽인, 노회하고 히스테릭한 군주.’ ‘정조는 문예를 사랑하고 인재를 애틋하게 여긴, 인품 좋고 너그러운 군주.’ 대략 이런 구도다. 역사에 기록된 당시 궁중의 일들을 놓고 보자면 이런 인상평이 나올 법도 하고, 더욱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대비해놓은 ‘캐릭터’가 대중문화 작품들에서 활용하기에는 더없이 좋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해석과 작품이 줄을 이었고, 대중 역시 두 인물을 그렇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영조와 정조의 ‘진짜’ 모습일까? 이런 인상평에 가려, 두 군주의 통치행위 전반을 오인하거나 곡해할 우려는 없을까? 이 책 『두 리더: 영조 그리고 정조』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한다. 두 인물의 리더십 특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50가지 장면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그 분석들을 종합하여 ‘정치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입체적으로 재정립한다. 이로써 기존 역사 교양물들이 보여준 편향적이고 패턴화된 시선을 넘어서서, ‘조선 르네상스’를 이끈 ‘두 리더’ 영조와 정조를 좀 더 정확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두 개혁 군주의 초상
: 시대정신, 개혁 의지, 그리고 제도적 실험

이 책은 두 군주 영조와 정조의 면면을 살피는 데 있어, 시대에 대한 판단력과 개혁 의지, 그 개혁을 실행하기 위한 제도적 실험, 그리고 그 수행 과정에서의 공감 및 참여 유도와 같은 리더십을 꼼꼼히 톺아본다. 우선 이 책 전반부에서는 주로 두 군주의 시대정신과 개혁 의지의 충실성을 살피고, 그것이 어떤 제도들로 실현되었는지 혹은 굴절되었는지 깊이 들여다본다. 영조와 정조. 두 사람 모두 시대의 변화 요구를 인지하고 그에 부응하여 개혁 정책들을 펼쳐나가려는 의지가 충천했다. 오늘날 두 임금을 ‘개혁 군주’로 부르는 데 큰 이의가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의 요구에 대한 판단에서는 긍정적인 면과 아쉬운 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우선 영조. 그 자신이 출신 배경에 대한 한계를 지닌 인물로서, 콤플렉스와 그 극복 의지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모친이 무수리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의 정통성 논란을 자아내는 중요 요소였는데, 실제로 그는 신하들이 자신을 무시하여 자꾸 뜻을 거스른다며 히스테릭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이런 ‘불편함’은, 한편으로는 신분 구조의 변동 양상을 보이는 당대 사회를 직시하고 그에 선제 대응하는 개혁성의 유인이 되었다. 궁중에서는 후궁들의 대우를 개선하는 정책을 펴고(1장 2절), 관료사회에는 소외된 계층을 양지로 끌어내고(3장 4절) 공동체에 기여한 자를 우대하는 과거 제도를 도입한다(4장 6절). 또 백성들에게는 민심을 적극 청취하고 실질적인 현실 개선을 위한 파격 정책들을 펼치는 등, 사회계층의 상하부 할 것 없이 두루 ‘공평’의 분위기가 형성되게끔 노력한다.

정조는 어땠을까. 그 또한 할아버지이자 선왕인 영조의 개혁 기조를 그대로 이어받는다. 영조가 전례 악용으로 인한 민간의 폐해를 막고자 관청의 관행 기록을 전부 불태우게 한 것처럼, 정조도 전례의 극복을 강조했다. 왕실 행사에 백성을 무상 동원하던 관행을 깨고 그들에게 포상한 것을 비롯해, 다양한 민간 지원책을 펼친다(2장 8절). 그런데 ‘공평’을 추구하며 민간의 세금이나 부역을 감면해주거나 관료를 특진시키는 등의 정책은, 또 다른 불평등을 야기하거나 행정상의 부조리를 초래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4장 9절). 아울러 정조는 자신이 공언했던 것만큼의 개혁을 단행하지는 못한다. 개혁 정책에는 반대 세력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그는 그들을 설득하여 찬성으로 돌릴 논리를 제시하기보다는 자기 확신에 따른 정책 추진 쪽으로 기우는 경향을 보인다. 선왕인 영조는 영악하다 싶을 정도로 신하들과 논리 싸움을 벌여, 사소한 지점은 양보하더라도 결국엔 자신의 개혁 정책을 관철한 경우가 많았다. 그에 비해 정조는 신하들을 말판 위의 말처럼 여기곤 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미리 확정해놓고 정책의 판을 짜다 보니, 옳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미완에 그치고 마는 개혁 정책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2장 9절).

두 군주의 리더십
: 공감과 설득이냐, 친목과 자기 확신이냐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영조와 정조의 리더십을 비교해보는 단계로 자연스레 넘어가게 된다. 이 책 후반부에서는 주로 두 군주의 통치 스타일을 살피고, 새 시대가 요구하는 군주의 상에 두 사람이 얼마나 도달했는지 가늠해본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렇다. 영조는 민심을 최대한 듣고 공감하며 구성원의 자연스러운 참여를 이끌어내는 리더십을 구사했으나, 갈등이 극심한 정국에는 자기 통제를 잃는 모습도 보였다. 한편 정조는 전 계층이 두루 실질적 혜택을 누리게 하는 개혁 군주를 꿈꿨으나, 그 과정에서 관료들과의 사적인 관계를 형성하여 정국을 압도하는 ‘밀실 정치’를 구사했다. 우선 영조의 리더십을 보자. 영조는 왕이 될 수 없는 왕자 신분이었던 20대 시절을 궐 안이 아닌 창의동 사저에서 보냈다. 이때 궐 밖 민간의 실상과 고충을 관찰한 그는, 훗날 왕에 즉위하여 펼쳐나갈 ‘민생 특화’ 정책들을 하나하나 구상해나갔다.

기득권자들의 저항을 줄이면서, 보잘것없는 백성들까지도 희망을 갖는 나라를 만들려면 백성 일반과 관료사회의 공감과 동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영조는 수시로 민심의 요구와 동향을 직·간접적으로 파악했고, 개혁에 소극적인 관료집단도 설득했다. 그의 대표적 민간 생활환경 개선 사업인 ‘청계천 준천’은, 개천 주변뿐 아니라 이외 지역 주민의 동의까지 얻어내 인력 동원을 원활히 할 수 있었다(4장 4절). 한양 도성 백성의 자부심과 책임감을 이끌어낸 수도 방어 계획 ‘수성절목’도(4장 2절), 공감과 참여를 기반으로 한 영조 리더십의 대표적인 사례라 볼 수 있다. 한편 ‘이인좌의 난’ 이후 20년 만에 되풀이된 ‘나주 벽서 사건’에서는, 갈등을 넘어서고 신뢰를 사수하려는 예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 영조의 한계도 엿볼 수 있다(5장 4절).

정조도 백성의 복리 증진에 꼭 필요한 정책들을 펼치고자 애썼다. 화성 건설 당시 땡볕에서 고생하는 일꾼들을 위해 환약 ‘척서단’을 개발·보급하여 백성의 사기를 복돋았다(4장 8절). 아들 순조의 세자 책봉식을 기념하는 자리에서는 양반과 평민, 서울과 지방 할 것 없이 두루 실질적 혜택이 가는 포상과 사면을 궁리하기도 했다(4장 9절). 그런데 이 이벤트는, 앞서 언급했듯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선한 목적에 도취되어 자기를 과신한 결과다. 여기서 정조 리더십의 과잉, 혹은 한계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칭했다(5장 10절). 만 갈래 개천을 비추는 밝은 달의 주인공. 그것은 어두운 데 처한 백성까지도 구제하겠다는 의지를 넘어서서,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자신이 모두 관장하여 직접 계몽하고 이끌겠다는 ‘자기 과신’의 표상이었다. 관료라는 시스템을 불신하는 리더십, 게다가 규장각이라는 사실상의 ‘사조직’을 결성하고(5장 8절) 동덕회라는 ‘비선 조직’을 가동해 정국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리더십은(5장 9절), 조선 후기 ‘세도정치’로 인한 조선 사회의 혼란을 가속화했다.

리더십 실종의 시대,
영조와 정조를 타산지석으로 삼는 지혜

이처럼 『두 리더: 영조 그리고 정조』는 ‘르네상스’를 이끈 두 군주의 통치행위를 꼼꼼히 살핌으로써, 사회 대개혁의 기치를 들어 올렸던 18세기 조선의 정국을 보다 깊고 넓은 시각으로 바라본다. 또한 그런 대대적인 변화를 이끌고자 분투한 두 군주의 리더십을 다면적·다층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조선 르네상스가 본격 시작된 배경과 그것이 더 큰 걸음을 내딛지 못한 까닭을 아울러 분석한다. 이들이 보여준 이상과 좌절, 리더십의 도전과 한계는 단지 당대에 국한된 게 아니었다. 이 책의 50개 이야기 꼭지 끝마다 저자가 달아놓은 ‘영조/정조 그리고 리더십’은, 낡은 틀을 깨야 하는 시대에 리더가 어느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오늘의 우리에게 넌지시 들려준다.

근대 이후 민주주의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정치지도자들의 통치 리더십은 점차 세련되어지고 고도화된 합리성을 갖추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대중이 피부로 느끼는 실상은 그 반대에 가깝다. 독특한 대통령제를 구축하고 발달시켜온 자칭 ‘세계 지도 국가’ 미국이 제46대 대선과 그 이후 정권 이양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실망 그 자체였다. 고도화된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보여주는 이런 리더십의 위기상은 차치하고라도,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우리 역시 어떤 공동체의 리더로서 혹은 구성원으로서 늘 리더십의 불완전성에 불안함을 느낀다. 이 책 『두 리더: 영조 그리고 정조』에서 시사하는 변혁의 시대 리더십의 면면을 보며, 위기의 시대를 사는 오늘의 독자가 일말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길 바란다.

이 책에서 만나볼 수 있는
영조와 정조 리더십의 숨은 맥락들

- 사도세자 살해의 배경에는 영조의 ‘정조 왕세손 책봉’ 기획이 있었다?
- 정조의 ‘스스럼없는 서신 정치’는 오히려 신뢰 붕괴와 반감을 불러왔다?
- 영조가 반대파를 살려둔 이유는 일당독재 견제를 넘어선 ‘협치’에 있었다?
- 규장각은 정조의 친위 세력이 친목을 다지는 ‘사조직의 라운지’였다?
- 영조의 탕평책은 ‘내로남불’ 정치를 막기 위한 과도기적 정책이었다?
- 정조의 ‘비선 조직’ 동덕회는 의외로 효과적인 탕평 보조 수단이었다?

종이책 회원 리뷰 (19건)

파워문화리뷰 두 리더 : 영조 그리고 정조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스타블로거 : 수퍼스타 산*람 | 2023.01.28

두 리더 : 영조 그리고 정조

노혜경

뜨인들출판/2020/12.7

 

영조와 정조는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고 있는 두 왕이다. 조손간인 이들은 조선의 경제와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이기에 실정을 한 부분도 분명히 있다. 두 왕의 리더로서의 역할은 어떠했는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그 결과로 내 놓은 것이 두 리더 : 영조 그리고 정조라는 책이다. 저자 노혜경은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호서대학교 혁신융합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 후기 수령 행정의 실제>, <영조어제 해제 6>,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공저) 등이 있다.

 

리더가 비전을 품었다고 해서 곧장 성과가 발휘되는 건 아니다.(p.13)” 성공을 위해선 시행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장애와 반대, 갖가지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한다. 진정힌 리더라면 지혜와 용기, 끈기를 가지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한다. 두 리더 : 영조 그리고 정조의 주인공 영조와 정조는 새로운 시대를 자각한 리더로 큰 업적을 쌓으며 조선 르네상스를 이끈 군주라는 타이틀을 얻었다.(p.14)하지만 실제로 행했던 국가 경영 방식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들에게도 그림자가 모두 있었다. 리더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첫째, 위기 속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자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것에 기초해, 내가 해야 할 비전과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 책은 5가지 주제로 나누어 리더십을 설명한다, 각 주제마다 10가지 사안을 중심으로 리더로서 두 왕은 어떤 판단과 결정으로 시대를 이끌었는지 분석하고 이 분석 속에서 리더로서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성공한 요소와 실패한 요소로 나누어 기술한다. 그럼으로써 현재의 리더들이 어떻게 처신하고 조직을 이끌어가야 할 것인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1장 조선 르네상스 군주의 초상 : 영조와 정조

영조는 미천한 후궁의 아들로 태어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후궁의 신분으로 왕을 배출한 후궁에 대한 예우로 사당과 무덤을 격상하고 그 제사를 국가 의례로 공식화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런 영조의 조치가 확대되어 탄생한 것이, 국왕의 생모가 된 후궁들의 사당을 모아놓은 칠궁이다.(p.28)” 그 칠궁 자리에 현재 청와대가 자리 잡고 있다. 아버지가 사도세자인 것이 콤플렉스였던 정조는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영조가 공인했다는 증거인 금등문서를 공개한 이후 사도세자의 신원작업을 본격화 한다. 그리고, 정조는 즉위 전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자신을 두둔하는 시파와 반대하는 벽파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었을 뿐 아니라 암살 시도도 두 번이나 겪었다. 조선의 왕 중, 암살이 정말로 시도된 경우는 정조가 유일하다.(p.78)” 평생을 따라다닌 위기의식 때문인지 정조가 만든 것이 화성과 장용영이다. 정조 암살설이 나오게 된 데에는 화성건설과 장용영 설치가 낳은 극적 긴장감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아버지 사도제자의 묘를 옮긴 정조는 현릉원이 있는 곳은 화산(花山)이니 , 옛날 요임금이 화() 지방을 돌 때 장수, , 다남 이 세 가지를 축원한 고사에 따라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 하겠다고 하면서 새로운 도시 이름을 화성으로 바꾼다. 이렇게 시작된 화성 건설은 1796832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정조는 다혈질이라 흥분을 잘했다. 노론 벽파의 수장인 심환지에게 나는 태양증이 있어 부딪히면 바로 폭발한다.(p.68)”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훗날 아들 순조의 장인이 된 김조순에게는 옳지 못한 짓을 보면 바로 화가 치밀어 얼굴과 말에 나타나며, 아무리 억누르려고 애를 써도 태양증 기질을 고치기 어렵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2장 개혁을 향한 의지 : 저항, 극복 그리고 미완

영조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법전 정리 사업을 시작했다. 바로 속대전의 편찬이다. 법이 너무 많고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서 관리가 제멋대로 법을 집행해 왔다. 힘없는 벡성들은 아무리 가벼운 죄라도 형벌을 받는데 권세가만 빠져나가니 이것이 내가 속대전을 편찬하는 이유다.(p.114)” 속대전경국대전이후 발효된 법을 새로 추가한 것이 아니다. 법과 수교의 충돌 사례, 다양한 조문의 문체, 형식부터 고친 것이었다. 이렇게 경국대전을 편찬하고 속대전에 나오기까지 260년 이상이 걸렸다. 그런데 속대전이 나온 뒤에는 바로 대전통편>, <대전회통같은 통일 법전이 줄줄이 나온다. <속대전이 법전의 체계를 통합했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개정판을 내기가 쉬워진 것이다. 정조는 일성록을 작성했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는 왕이 죽은 뒤 자료 편찬과 정리 작업이 시행되지만, “일성록은 가장 최신의 소식을 바로바로 편집하게 했다는 점이다.(p.201)” 신하들의 상소문, 임금의 포고문, 임금의 동정, 정부에서 편찬한 서적, 죄수의 심리, 진휼, 격쟁 등을 가능한 한 전문을 실어서 인과 관계를 알 수 있게 했다. 한마디로 국정 전반을 일성록검토만으로 파악할 수 있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3장 제도적 실험들 : 시대에 대한 이해 혹은 오해

조선시대라고 해서 아무 범죄에나 사형을 선고하지는 않았다. 사형에는 원칙이 있었다. 반역이나 존속상해와 같은 강상죄에나 적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p.183)” 살인죄에는 원칙적으로 사형을 내렸지만, 과실치사나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상당히 참작을 해서 형을 낮추었다. 단 이때의 반역에는 왕명을 어기거나 왕을 모욕하는 행위도 포함된다. 그래도 가능한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조선 시대 사법의 전통이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폭증하는 부와 생산의 확대를 배경으로 탄생한 것이다. 여기에 조응해 욕망의 개방, 인간 본성을 긍정하는 새로운 사조가 탄생했다. 하지만 조선은 반대로 갔다. 사치와 욕망을 억제해서, 즉 분배를 조정해서 기존의 생산 수준에 맞추려고 했다. 더 큰 문제는, 조선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치 금지령을 시행해 왔다는 점이다.(p.183)” 여기에 더 강한 금지령을 내리니 마른 걸레를 짜내는 식이었다. 당연히 제대로 시행될 수가 없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부자, 형제, 사촌, 처가, 외가 쪽 친척들까지, 이해관계가 걸린 관직에 함께 재직하지 못한다는 법이 있었다. 서로 피한다는 의미로 상피라고 했다.(p.268)” 과거 시험을 볼 때 아버지나 형이 시험관이면, 아들이나 동생이 그 시험에 응시생이 될 수 없는 식이었다. 이런 상피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인사 명령을 내리면 인사 담당자가 탄핵을 당하고 징계를 받았다고 한다.

 

4장 공감과 참여의 리더십 : 진심 그리고 한계

조선의 왕들은 거의 미행을 하지 않았다. 연산군의 비행을 부각하기 위해 신록에 몇 차례 등장하는 하지만, 왕이 시정 감찰을 위해 돌아다닌 기록은 적어도 정사에는 없다.(p.238)” 비밀리에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겠지만, 아마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밤에 돌아다녀도 정작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가로등도 없고 깜깜한 밤에 통금으로 인적 드문 길에서 어떻게 민생을 살피겠는가? 무엇보다도 일단 위험한 일이었다. 대신 낮에 궁 밖으로 행차를 했다. 영조와 정조는 부지런히 밖으로 나갔다. 영조는 총 909, 한 달에 1회 꼴, 정조는 총 607, 한 달에 2회 꼴로 궁 밖 행차를 했다. “화성 건설은 임금제 고용 노동을 체계적이고 대규모로 시행한 최초의 공사였다. 그로 인해 공사비는 예상보다 3배 많이 지출 됐지만, 10년을 예상했던 공사 기간을 28개월로 단축할 수 있었다.(p.260)” 합리적인 경영의 힘이었다. 여기에는 임금만이 아니라 척서단(더위먹은 데 치료약) 제공과 같은 복지 정책도 큰 역할을 했다. 척서단은 실제로 환자 치료뿐 아니라, 인부들의 사기와 자부심을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5장 변혁의 시대 리더의 권위 : 묘수 혹은 악수

영조시대 암행어사로 널리 알려진 박문수는 실제는 암행어사에 임명된 적이 없었으나, 일제 때 소설에서 암행어사로 등장하면서 어사로 유명해졌지만, 실은 박문수는 임금 앞에서도 고개를 잘 숙이지 않고 막말을 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영조는 어느 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요순과 같은 임금이 되려고 한다.’ 이 말은 정치적인 의도 없이 순수하고 공정하게 통치하려고 하니 자기 말을 믿어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박문수가 이 말을 듣더니 요순은 아무나 됩니까? 보통 사람은 요순의 절반만 가도 성공하는 겁니다.’ (p.305)”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조는 신하들의 이기주의, 당파성, 가족주의를 심하게 미워했지만, 정작 자신은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거나 편견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위험을 경시했고, 자신을 과신했다. 정조는 자신의 권력으로 편법적인 인사를 시행하는 이상을 나가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정조 스스로는 자신의 방식이 본보기라고 간주했다.(p.281)”고 한다. 정조는 북학파를 등용해 규장각을 통한 청 문화의 수입과 문물의 개화에 힘썼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정조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보여준 참신한 문체를 불순한 잡문체라고 비난하고, 순수한 정통 고문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문체반정을 주도했다.(p.328)”이렇게 최종적으로는 문체반정이라는 문예운동까지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의 편지 297통을 보면 뜻밖의 반전이 보인다. 정조의 가감 없는 성력과 언행이 바로 그것이다.(p.68)” 정조의 최대 단점은 신하를 불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피해의식,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늘 조급함이나 망설임으로 나타났다. 일이 잘 안 되면 정조는 늘 주위의 부하를 탓했다. 이런 분위기의 조직은 결코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고, 변화에도 창의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고 하는 영조와 정조는 각각 비천한 후궁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아버지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영조와 정조에 대해 좀 더 입체적으로 알 수 있고 리더로서의 덕목을 갖추어 가기를 기대한다.

 

13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접어보기
[서평] 두 리더, 영조와 정조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YES마니아 : 로얄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공*안 | 2021.01.03

두 리더, 영조와 정조

 

세자가 없어야 세손을 즉위시킬 수 있다. 영조는 그것이 국가와 왕실을 유지하기 위한 최상의 선택이라고 믿었을 것이다.(38)

 

콤플렉스 덩어리 왕 영조. 아들을 죽이는데,

결국은 아들의 기대에서 비롯된 욕심이 부른 비극이었다.

그리고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데에는 세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조와 정조를 따라 다니는 수식어는 참 많은 것 같다. 조선의 르네상스, 여야 정치의 조화를 꾀한 탕평책, 변화와 개혁의 아이콘 외에도 아들 사도세자와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미묘한 관계. 아버지를 죽인 할아버지, 자신이 죽인 아들의 아들인 손자 정조. 자칫 큰 갈등 구조에 빠질 수 있는 관계였지만, 이 두 사람은 왕과 세손으로서의 본분을 지키며 세자가 빠진 상태에서 정치적 동반자가 되어 위태위태한 상황에서 정치적 동반자가 된다.

 

학문을 좋아하는 호학의 군주로 이름 높은 정조는 조선시대 세종과 더불어 여러 측면에서 대단히 큰 호평을 받은 임금이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군주 혹은 개혁군주란 수식어가 늘 따라 다닌다. 뿐만 아니라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사회 안정과 경제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탕평책을 실시하여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당색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과 실력 중심으로 유능한 인재를 뽑아 적재적소에서 그 능력을 발휘하게 하였다.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과 같은 서얼 출신의 학자들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던 것도 다 정조가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혹자는 조선후기 르네상스 시대를 연 인물이 바로 정조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조의 삶은 세손시절부터 대단히 힘들었고, 위험했으며, 끊임없이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갈등으로 정조 나이 8살에 결국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의 보살핌 속에서도 끊임없이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했다. 다행히 할아버지의 눈에 들어 아버지가 이어받았어야 할 왕의 자리를 할아버지에게서 자신이 바로 승계를 하게 된다.

 

상풍의 기후 평안하시진 문안 여쭙고자 합니다. 숙모님을 뵌 지 오래되어 섭섭하고 그리웠는데 어제 편지 보니 든든하고 반갑습니다.(210)

 

개인적으로 정조 임금을 좋아한다. 다른 왕들과 다르게 굉장히 어려운 과정을 통해 왕이 되었고, 왕위에 올라서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는 다른 군왕들과는 무언가 분명 다른 군왕이었다. 특히 신분제도에 대한 개혁과 더불어 벼슬을 할 수 없는 서얼들의 관직 등용은 조선에서는 유래를 찾아 보기 힘든 거의 파격적인 인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조는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변화를 주도하였다. 만약 정조가 50세란 나이에 죽지 않고, 20년 아니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조선의 미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정조 관련 책이나 글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종종 그런 생각, 상상을 해 본다. 위에 인용한 편지는 정조가 어린 시절 큰 외숙모 여흥 민씨에게 보낸 편지로 어린시절 정조가 쓴 한글편지 중 굉장히 널리 알려져 있다. 정조는 어려서부터 편지를 통해 인척들과 이런저런 소통을 나누는데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문제는 정조가 편지로 정치를 했다는 사실이다. 현명한 신하와 깊이 친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정조는 편지라는 사사로운 매개체로 이를 실천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국가경영에서 국왕에겐 국왕의 위치가 있고 신하에겐 신하의 위치가 있는 법이다. 정책을 결정하고 조정하는 데 있어서 개인적인 편지를 이용해 막말을 하고 자신의 감정을 모두 드러낸 정조의 행동은 편지를 받는 상대에게 오히려 불신감만 키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편지를 모두 태워서 없애버리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심환지는 한 통도 없애지 않고 모두 모아두어 현재까지 남아 있게 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방증한다.(72)

수원 화성을 처음 보고, 수원 화성이 이렇게 멋진 곳 인줄 알게 되었다. 몇 년 전 회사 일로 수원에 출장을 가서 23일 정도 머문 적이 있는데, 그때 수원 화성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업무 일정을 마치고 화성 곳곳을 둘러보았다. 밤에 팔달산 정상에 올라 수원시를 야경을 내려다 보며, 200년 전 이 자리에 있었을 정조 임금을 생각하기도 하였다.

수원 화성은 조선의 명군으로 칭송받던 정조임금에 매우 의미가 깊은 곳이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을 항상 마음에 품고 군왕이 된 정조는 아버지를 잃고 33년을 홀로 살아온 어머니의 환갑날 세상에서 가장 성대한 행렬을 이끌고 이곳 수원 아버지의 무덤을 찾는다. 정조는 화성 행차를 통해 효심을 보여주고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개혁정치를 통해 이 곳 수원 화성에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의지를 펼쳐 보이려 했다. 그 길의 여정에서 정조는 백성들을 만났고, 그들이 사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살폈다.

영조와 정조는 둘 다 특이한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올랐다. 두 군왕 모두 왕이 못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늘은 그들의 편을 들어 주었고 역사에 자신들의 행적과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영조와 정조의 이념과 통치철학이 궁금하다면 읽어볼만한 책이다.

 

 

 
이 리뷰가 도움이 되었나요? 접어보기
두 리더: 영조 그리고 정조 리뷰 후기입니다.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제*퀸 | 2021.01.03

두 리더: 영조 그리고 정조 리뷰 후기입니다.

 

조선 후기 중흥기(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영조와 정조

 

임금이 되기 위한 과정은 험난했지만 그 험난한 과정 속에서 백성의 삶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은 훗날 치세의 토석이 되었다.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아끼고자 했던 마음 씀씀이가 그 당시에도 후대에도 재평가 받았다는 점에서 괄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옥의 티도 있었으니 모든 일이 다 성공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 당시 조선의 사회가 받쳐주지 못한 점도 있었고 두 군주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그러한 점을 냉철하게 꿰뚫어 보면서 분석하고 역사를 재해석하였다.

 

조선의 사회에서 발전하지 못한 부분은 현실 안주형도 있었고 유교적인 문화도 있었다.

조선의 학식있고 배운 것이 많은 명망 높은 관리들이 그것을 모를리가 없었다.

개혁을 하면 자신들의 입지와 기득권을 내놓아야 하는 실정이기에 평상시대로 변화 없이 가는 것을 원했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숱한 반대의 반대, 전례를 들어 의견을 내놓지만 두 군주는 이러한 점을 꿰뚫는 눈이 있었다.

그 눈은 많은 학문적 연구와 공부로 인한 지식적 배경, 스스로 깨닭은 무언의 논리와 같은 것이었다.

또한 백성들의 실상을 누구보다 알고자 했고 실제로 겪기도 했기에 그 절대적 논리로 무장한 두 군주를

신하들은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세종 또한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도 수많은 반대에 부딪혔지만 어렸을때부터 익힌 공부의 학문적 지식과 음양조화의 이치를 깨닭았기에 절대 논리로 신하들을 이길 수 있었다.

 

태평성대나 중흥기의 군주들은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진리를 몸소 보여주었다.

 

두 리더: 영조 그리고 정조 두 군주의 치세는 영원히 빛이 날 역사적 산물이다.

이 리뷰가 도움이 되었나요? 접어보기
  •  종이책 상품상세 페이지에서 더 많은 리뷰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가기

한줄평 (1건)

0/50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