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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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리더 : 영조 그리고 정조
노혜경
뜨인들출판/2020/12.7
영조와 정조는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고 있는 두 왕이다. 조손간인 이들은 조선의 경제와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이기에 실정을 한 부분도 분명히 있다. 두 왕의 리더로서의 역할은 어떠했는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그 결과로 내 놓은 것이 <두 리더 : 영조 그리고 정조>라는 책이다. 저자 노혜경은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호서대학교 혁신융합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 후기 수령 행정의 실제>, <영조어제 해제 6>,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공저) 등이 있다.
“리더가 비전을 품었다고 해서 곧장 성과가 발휘되는 건 아니다.(p.13)” 성공을 위해선 시행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장애와 반대, 갖가지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한다. 진정힌 리더라면 지혜와 용기, 끈기를 가지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한다. <두 리더 : 영조 그리고 정조>의 주인공 “영조와 정조는 새로운 시대를 자각한 리더로 큰 업적을 쌓으며 ‘조선 르네상스를 이끈 군주’라는 타이틀을 얻었다.(p.14)” 하지만 실제로 행했던 국가 경영 방식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들에게도 ‘빛’과 ‘그림자’가 모두 있었다. 리더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첫째, 위기 속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자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것에 기초해, 내가 해야 할 비전과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 책은 5가지 주제로 나누어 리더십을 설명한다, 각 주제마다 10가지 사안을 중심으로 리더로서 두 왕은 어떤 판단과 결정으로 시대를 이끌었는지 분석하고 이 분석 속에서 리더로서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성공한 요소와 실패한 요소로 나누어 기술한다. 그럼으로써 현재의 리더들이 어떻게 처신하고 조직을 이끌어가야 할 것인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1장 조선 르네상스 군주의 초상 : 영조와 정조
영조는 미천한 후궁의 아들로 태어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후궁의 신분으로 왕을 배출한 후궁에 대한 예우로 사당과 무덤을 격상하고 그 제사를 국가 의례로 공식화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런 영조의 조치가 확대되어 탄생한 것이, “국왕의 생모가 된 후궁들의 사당을 모아놓은 ‘칠궁’이다.(p.28)” 그 칠궁 자리에 현재 청와대가 자리 잡고 있다. 아버지가 사도세자인 것이 콤플렉스였던 정조는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영조가 공인했다는 증거인 ‘금등문서’를 공개한 이후 사도세자의 신원작업을 본격화 한다. 그리고, 정조는 즉위 전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자신을 두둔하는 시파와 반대하는 벽파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었을 뿐 아니라 암살 시도도 두 번이나 겪었다. “조선의 왕 중, 암살이 정말로 시도된 경우는 정조가 유일하다.(p.78)” 평생을 따라다닌 위기의식 때문인지 정조가 만든 것이 화성과 장용영이다. 정조 암살설이 나오게 된 데에는 화성건설과 장용영 설치가 낳은 극적 긴장감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아버지 사도제자의 묘를 옮긴 정조는 “현릉원이 있는 곳은 화산(花山)이니 , 옛날 요임금이 화(華) 지방을 돌 때 장수, 부, 다남 이 세 가지를 축원한 고사에 따라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 하겠다”고 하면서 새로운 도시 이름을 ‘화성’으로 바꾼다. 이렇게 시작된 화성 건설은 1796년 8월 32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정조는 다혈질이라 흥분을 잘했다. 노론 벽파의 수장인 심환지에게 “나는 태양증이 있어 부딪히면 바로 폭발한다.(p.68)”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훗날 아들 순조의 장인이 된 김조순에게는 “옳지 못한 짓을 보면 바로 화가 치밀어 얼굴과 말에 나타나며, 아무리 억누르려고 애를 써도 태양증 기질을 고치기 어렵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2장 개혁을 향한 의지 : 저항, 극복 그리고 미완
영조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법전 정리 사업을 시작했다. 바로 <속대전>의 편찬이다. “법이 너무 많고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서 관리가 제멋대로 법을 집행해 왔다. 힘없는 벡성들은 아무리 가벼운 죄라도 형벌을 받는데 권세가만 빠져나가니 이것이 내가 속대전을 편찬하는 이유다.(p.114)” <속대전>은 <경국대전>이후 발효된 법을 새로 추가한 것이 아니다. 법과 수교의 충돌 사례, 다양한 조문의 문체, 형식부터 고친 것이었다. 이렇게 <경국대전>을 편찬하고 <속대전>에 나오기까지 260년 이상이 걸렸다. 그런데 <속대전>이 나온 뒤에는 바로 <대전통편>, <대전회통> 같은 통일 법전이 줄줄이 나온다. <속대전>이 법전의 체계를 통합했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개정판을 내기가 쉬워진 것이다. 정조는 <일성록>을 작성했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는 왕이 죽은 뒤 자료 편찬과 정리 작업이 시행되지만, “<일성록>은 가장 최신의 소식을 바로바로 편집하게 했다는 점이다.(p.201)” 신하들의 상소문, 임금의 포고문, 임금의 동정, 정부에서 편찬한 서적, 죄수의 심리, 진휼, 격쟁 등을 가능한 한 전문을 실어서 인과 관계를 알 수 있게 했다. 한마디로 국정 전반을 <일성록> 검토만으로 파악할 수 있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3장 제도적 실험들 : 시대에 대한 이해 혹은 오해
“조선시대라고 해서 아무 범죄에나 사형을 선고하지는 않았다. 사형에는 원칙이 있었다. 반역이나 존속상해와 같은 강상죄에나 적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p.183)” 살인죄에는 원칙적으로 사형을 내렸지만, 과실치사나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상당히 참작을 해서 형을 낮추었다. 단 이때의 반역에는 왕명을 어기거나 왕을 모욕하는 행위도 포함된다. 그래도 가능한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조선 시대 사법의 전통이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폭증하는 부와 생산의 확대를 배경으로 탄생한 것이다. 여기에 조응해 욕망의 개방, 인간 본성을 긍정하는 새로운 사조가 탄생했다. 하지만 조선은 반대로 갔다. 사치와 욕망을 억제해서, 즉 분배를 조정해서 기존의 생산 수준에 맞추려고 했다. 더 큰 문제는, “조선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치 금지령을 시행해 왔다는 점이다.(p.183)” 여기에 더 강한 금지령을 내리니 마른 걸레를 짜내는 식이었다. 당연히 제대로 시행될 수가 없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부자, 형제, 사촌, 처가, 외가 쪽 친척들까지, 이해관계가 걸린 관직에 함께 재직하지 못한다는 법이 있었다. 서로 피한다는 의미로 ‘상피’라고 했다.(p.268)” 과거 시험을 볼 때 아버지나 형이 시험관이면, 아들이나 동생이 그 시험에 응시생이 될 수 없는 식이었다. 이런 상피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인사 명령을 내리면 인사 담당자가 탄핵을 당하고 징계를 받았다고 한다.
4장 공감과 참여의 리더십 : 진심 그리고 한계
“조선의 왕들은 거의 미행을 하지 않았다. 연산군의 비행을 부각하기 위해 <신록>에 몇 차례 등장하는 하지만, 왕이 시정 감찰을 위해 돌아다닌 기록은 적어도 정사에는 없다.(p.238)” 비밀리에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겠지만, 아마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밤에 돌아다녀도 정작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가로등도 없고 깜깜한 밤에 통금으로 인적 드문 길에서 어떻게 민생을 살피겠는가? 무엇보다도 일단 위험한 일이었다. 대신 낮에 궁 밖으로 행차를 했다. 영조와 정조는 부지런히 밖으로 나갔다. 영조는 총 909회, 한 달에 1회 꼴, 정조는 총 607회, 한 달에 2회 꼴로 궁 밖 행차를 했다. “화성 건설은 임금제 고용 노동을 체계적이고 대규모로 시행한 최초의 공사였다. 그로 인해 공사비는 예상보다 3배 많이 지출 됐지만, 10년을 예상했던 공사 기간을 2년 8개월로 단축할 수 있었다.(p.260)” 합리적인 경영의 힘이었다. 여기에는 임금만이 아니라 척서단(더위먹은 데 치료약) 제공과 같은 복지 정책도 큰 역할을 했다. 척서단은 실제로 환자 치료뿐 아니라, 인부들의 사기와 자부심을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5장 변혁의 시대 리더의 권위 : 묘수 혹은 악수
영조시대 암행어사로 널리 알려진 박문수는 실제는 암행어사에 임명된 적이 없었으나, 일제 때 소설에서 암행어사로 등장하면서 어사로 유명해졌지만, 실은 박문수는 임금 앞에서도 고개를 잘 숙이지 않고 막말을 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영조는 어느 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요순과 같은 임금이 되려고 한다.’ 이 말은 정치적인 의도 없이 순수하고 공정하게 통치하려고 하니 자기 말을 믿어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박문수가 이 말을 듣더니 ‘요순은 아무나 됩니까? 보통 사람은 요순의 절반만 가도 성공하는 겁니다.’ (p.305)”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조는 신하들의 이기주의, 당파성, 가족주의를 심하게 미워했지만, 정작 자신은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거나 편견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위험을 경시했고, 늘 자신을 과신했다. 정조는 “자신의 권력으로 편법적인 인사를 시행하는 이상을 나가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정조 스스로는 자신의 방식이 본보기라고 간주했다.(p.281)”고 한다. 정조는 북학파를 등용해 규장각을 통한 청 문화의 수입과 문물의 개화에 힘썼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정조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보여준 참신한 문체를 ‘불순한 잡문체’라고 비난하고, 순수한 정통 고문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문체반정을 주도했다.(p.328)”이렇게 최종적으로는 ‘문체반정’이라는 문예운동까지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의 편지 297통을 보면 뜻밖의 반전이 보인다. 정조의 가감 없는 성력과 언행이 바로 그것이다.(p.68)” 정조의 최대 단점은 신하를 불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피해의식,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늘 조급함이나 망설임으로 나타났다. 일이 잘 안 되면 정조는 늘 주위의 부하를 탓했다. 이런 분위기의 조직은 결코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고, 변화에도 창의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고 하는 영조와 정조는 각각 비천한 후궁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아버지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영조와 정조에 대해 좀 더 입체적으로 알 수 있고 리더로서의 덕목을 갖추어 가기를 기대한다.
두 리더, 영조와 정조
세자가 없어야 세손을 즉위시킬 수 있다. 영조는 그것이 국가와 왕실을 유지하기 위한 최상의 선택이라고 믿었을 것이다.(38면)
콤플렉스 덩어리 왕 영조. 아들을 죽이는데,
결국은 아들의 기대에서 비롯된 욕심이 부른 비극이었다.
그리고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데에는 세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조와 정조를 따라 다니는 수식어는 참 많은 것 같다. 조선의 르네상스, 여야 정치의 조화를 꾀한 탕평책, 변화와 개혁의 아이콘 외에도 아들 사도세자와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미묘한 관계. 아버지를 죽인 할아버지, 자신이 죽인 아들의 아들인 손자 정조. 자칫 큰 갈등 구조에 빠질 수 있는 관계였지만, 이 두 사람은 왕과 세손으로서의 본분을 지키며 세자가 빠진 상태에서 정치적 동반자가 되어 위태위태한 상황에서 정치적 동반자가 된다.
학문을 좋아하는 호학의 군주로 이름 높은 정조는 조선시대 세종과 더불어 여러 측면에서 대단히 큰 호평을 받은 임금이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군주 혹은 개혁군주란 수식어가 늘 따라 다닌다. 뿐만 아니라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사회 안정과 경제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탕평책을 실시하여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당색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과 실력 중심으로 유능한 인재를 뽑아 적재적소에서 그 능력을 발휘하게 하였다.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과 같은 서얼 출신의 학자들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던 것도 다 정조가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혹자는 조선후기 르네상스 시대를 연 인물이 바로 정조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조의 삶은 세손시절부터 대단히 힘들었고, 위험했으며, 끊임없이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갈등으로 정조 나이 8살에 결국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의 보살핌 속에서도 끊임없이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했다. 다행히 할아버지의 눈에 들어 아버지가 이어받았어야 할 왕의 자리를 할아버지에게서 자신이 바로 승계를 하게 된다.
상풍의 기후 평안하시진 문안 여쭙고자 합니다. 숙모님을 뵌 지 오래되어 섭섭하고 그리웠는데 어제 편지 보니 든든하고 반갑습니다.(210면)
개인적으로 정조 임금을 좋아한다. 다른 왕들과 다르게 굉장히 어려운 과정을 통해 왕이 되었고, 왕위에 올라서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는 다른 군왕들과는 무언가 분명 다른 군왕이었다. 특히 신분제도에 대한 개혁과 더불어 벼슬을 할 수 없는 서얼들의 관직 등용은 조선에서는 유래를 찾아 보기 힘든 거의 파격적인 인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조는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변화를 주도하였다. 만약 정조가 50세란 나이에 죽지 않고, 20년 아니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조선의 미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정조 관련 책이나 글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종종 그런 생각, 상상을 해 본다. 위에 인용한 편지는 정조가 어린 시절 큰 외숙모 여흥 민씨에게 보낸 편지로 어린시절 정조가 쓴 한글편지 중 굉장히 널리 알려져 있다. 정조는 어려서부터 편지를 통해 인척들과 이런저런 소통을 나누는데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문제는 정조가 편지로 정치를 했다는 사실이다. 현명한 신하와 깊이 친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정조는 편지라는 사사로운 매개체로 이를 실천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국가경영에서 국왕에겐 국왕의 위치가 있고 신하에겐 신하의 위치가 있는 법이다. 정책을 결정하고 조정하는 데 있어서 개인적인 편지를 이용해 막말을 하고 자신의 감정을 모두 드러낸 정조의 행동은 편지를 받는 상대에게 오히려 불신감만 키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편지를 모두 태워서 없애버리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심환지는 한 통도 없애지 않고 모두 모아두어 현재까지 남아 있게 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방증한다.(72면)
수원 화성을 처음 보고, 수원 화성이 이렇게 멋진 곳 인줄 알게 되었다. 몇 년 전 회사 일로 수원에 출장을 가서 2박 3일 정도 머문 적이 있는데, 그때 수원 화성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업무 일정을 마치고 화성 곳곳을 둘러보았다. 밤에 팔달산 정상에 올라 수원시를 야경을 내려다 보며, 200년 전 이 자리에 있었을 정조 임금을 생각하기도 하였다.
수원 화성은 조선의 명군으로 칭송받던 정조임금에 매우 의미가 깊은 곳이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을 항상 마음에 품고 군왕이 된 정조는 아버지를 잃고 33년을 홀로 살아온 어머니의 환갑날 세상에서 가장 성대한 행렬을 이끌고 이곳 수원 아버지의 무덤을 찾는다. 정조는 화성 행차를 통해 효심을 보여주고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개혁정치를 통해 이 곳 수원 화성에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의지를 펼쳐 보이려 했다. 그 길의 여정에서 정조는 백성들을 만났고, 그들이 사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살폈다.
영조와 정조는 둘 다 특이한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올랐다. 두 군왕 모두 왕이 못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늘은 그들의 편을 들어 주었고 역사에 자신들의 행적과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영조와 정조의 이념과 통치철학이 궁금하다면 읽어볼만한 책이다.
두 리더: 영조 그리고 정조 리뷰 후기입니다.
조선 후기 중흥기(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영조와 정조
임금이 되기 위한 과정은 험난했지만 그 험난한 과정 속에서 백성의 삶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은 훗날 치세의 토석이 되었다.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아끼고자 했던 마음 씀씀이가 그 당시에도 후대에도 재평가 받았다는 점에서 괄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옥의 티도 있었으니 모든 일이 다 성공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 당시 조선의 사회가 받쳐주지 못한 점도 있었고 두 군주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그러한 점을 냉철하게 꿰뚫어 보면서 분석하고 역사를 재해석하였다.
조선의 사회에서 발전하지 못한 부분은 현실 안주형도 있었고 유교적인 문화도 있었다.
조선의 학식있고 배운 것이 많은 명망 높은 관리들이 그것을 모를리가 없었다.
개혁을 하면 자신들의 입지와 기득권을 내놓아야 하는 실정이기에 평상시대로 변화 없이 가는 것을 원했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숱한 반대의 반대, 전례를 들어 의견을 내놓지만 두 군주는 이러한 점을 꿰뚫는 눈이 있었다.
그 눈은 많은 학문적 연구와 공부로 인한 지식적 배경, 스스로 깨닭은 무언의 논리와 같은 것이었다.
또한 백성들의 실상을 누구보다 알고자 했고 실제로 겪기도 했기에 그 절대적 논리로 무장한 두 군주를
신하들은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세종 또한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도 수많은 반대에 부딪혔지만 어렸을때부터 익힌 공부의 학문적 지식과 음양조화의 이치를 깨닭았기에 절대 논리로 신하들을 이길 수 있었다.
태평성대나 중흥기의 군주들은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진리를 몸소 보여주었다.
두 리더: 영조 그리고 정조 두 군주의 치세는 영원히 빛이 날 역사적 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