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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 혹은 친밀함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 사람이 서로 협력하고 교류하며, 익숙해지고 발전하는 현상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고민하는 책으로 결국은 교류와 친밀함의 사회적 제도성이 필요함을 이야기 한다. | [수세대에 걸친 가축화는, 기존의 통념과는 달리, 지능을 쇠퇴시키지 않으면서 친화력을 향상시킨다.] |
진화(進化)와 적자생존(適者生存)
‘진화(進化)’라고 하면 ‘나아갈 진 進’이라는 한자 표기 때문인지 뭔가 ‘이전보다 나아진 것’, 즉 진보(進步)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제국주의자들이 사회진화론을 내세워 그들의 침탈을 정당화했을 때 이를 부정하지 못하거나 적극적으로 동조한 이들이 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진화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일까? 나는 진화가 환경변화에 맞서 생존하기 위해 하나의 종(種)이 가진 가능성 중 어느 하나를 극대화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렇게 진화를 해석한다면, 진화는 ‘강한 것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강한 것이다’라는 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인 셈이다. 그렇다면 진화론에서 얘기하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은 환경변화에 잘 적응하는 자, 즉 적자(適者)가 생존하고 번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누가 적자(適者)인가?
일반적으로 허버트 스펜서가 제시한 ‘적자생존’은 주어진 환경에 가장 적합한 종[適者, the fittest]이 살아남는다[生存, survival]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인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에 의하면, 언젠가부터 ‘적자(適者)’의 개념이 ‘신체적 적자’와 동의어가 되었다고 한다. 즉, ‘적자생존’이 힘이 쎈 강자가 힘이 약한 약자를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약육강식’의 논리로 인식되었다는 얘기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데 사용되었던, 유사과학인 ‘사회진화론’이 바로 그런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저자들이
인간의 본성은 어차피 글러 먹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적자생존을 법칙으로 믿는다면, 강한 자가 살아남고 약한 자는 사라지며 사람은 누구나 각자 살길을 찾아야 하는 존재라고 믿는다면, 특히 더 그렇게 느낄 것이다. 자연계를 지켜보면서 사람들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종이 다 그렇다고 믿게 되었다. [p. 11]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미국 등 ‘서양’에서는 여전히 그런 사고가 만연해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나는 적자(適者)를 신체적으로 가장 강한 최적자(最適者)라고 보는 것부터 이해가 안 된다. 다들 알다시피 백악기 시절의 강자였던 공룡,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한 육상동물의 하나로 꼽히는 티라노사우루스를 비롯한 육식공룡들은 소행성 충돌로 인한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했다. 만약 신체적으로 가장 강한 최적자가 적자라면 백악기 대충돌 이후에도 생존한, 두발로 서서 걸었고 깃털을 가진, 수각류(獸脚類) 공룡에 속한 ‘새’가 레페노마무스(Repenomamus)나 디델포돈(Didelphodon) 같은 포유류보다 유력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포유류가 진화의 승자가 될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 신체적으로 가장 강한 최적자라고 할 수 있을까?
어쨌든 저자들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그렇게 오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21세기 다윈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저자들은 다윈의 원래 주장으로 돌아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고 주장한다. 즉,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種)은 더 많은 적을 정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더 많은 친구를 만듦으로써 살아남았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다윈은 자연에서 친절과 협력을 끊임없이 관찰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자상한 구성원들이 가장 많은 공동체가 가장 번성하여 가장 많은 수의 후손을 남겼다”고 썼다. 다윈을 위시하여 그의 뒤를 이은 많은 생물학자도 진화라는 게임에서 승리하는 이상적 방법은 협력을 꽃피울 수 있게 친화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p. 20]
물론 다윈에 했다는 저 말은 진화의 모든 경우에 친화력 혹은 다정한 것을 기준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백악기의 소행성충돌 이후 수각류(獸脚類) 공룡 계통인 ‘새’만 생존한 것도 수각류 공룡이 브라키오사우루스나 티타노사우루스와 같은 용각류(龍脚類) 공룡이나 스테고사우루스나 트리케라톱스 등의 합치류(?齒類) 공룡보다 다정했기 때문은 아닐 테니까.
어쨌든 저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예로 늑대는 멸종 위기에 처했는데,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개는 어떻게 개체 수를 늘려나갈 수 있었을까? 사나운 침팬지보다 다정한 보노보가 더 성공적으로 번식할 수 있던 이유는? 등의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인류의 번성이라는 환경변화에 개과 동물이나 유인원이 적응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친화력의 명암(明暗)
다른 사람 종이 멸종하는 와중에 호모 사피엔스를 번성하게 한 것은 초강력 인지능력이었는데, 바로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인 친화력이다. [p. 29]
친화력은 자기가축화(self-domestication)를 통해서 진화했다.
수 세대에 걸친 가축화는, 기존의 통념과는 달리, 지능을 쇠퇴시키지 않으면서 친화력을 향상시킨다. 어떤 동물이 가축화될 때는 서로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많은 요소가 변화를 겪는다. 가축화징후 라고 불리는 현상의 변화 패턴은 얼굴형, 치아 크기, 신체 부위별로 각기 다른 피부색에서 나타난다. 호르몬과 번식주기, 신경계에서도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가 연구에서 발견한 것은 조건이 일정하다면 자기가축화가 타인과 협력하고 소통하는 능력도 향상시킨다는 점이다.
이 모든 무관해 보이는 변화는 발달과 관련이 있다. 가축화된 종과, 이들과 조상은 같지만 야생으로 남아 있는 더 공격적인 종은 뇌와 신체가 다르게 발달한다. 놀이처럼 사회적 유대를 도모하는 행동의 경우, 야생의 친척 종보다 가축화된 종에게 더 이른 시기에 나타나고 더 오래, 대개는 성인 또는 성체가 될 때까지 유지된다. [p. 31]
드미트리 벨랴예프(Dmitry Belyaev, 1917~1985, 이하 ‘벨랴예프’)와 그의 제자 류드밀라 트루트(Lyudmila Trut, 1933~ )의 야생 여우 가축화 실험은
사람에게 친화적인 동물이 더 높은 번식 성공률을 보일 때 가축화가 발생한다는 공식 [p. 70]
을 이끌어 냈다. 이 말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種)이 진화의 변수로 작용했다는 얘기다.
가축화가 사람에게 쓸모 있는 희귀종에게서만 발생했음을 시사했던 다른 실험 모델들과 달리, 벨랴예프의 연구는 개체의 밀도가 높아지면 개체들 사이에서 자연선택을 통해 대규모의 자기가축화라는 사건이 일어나리라고 보았다. 이 사건은 선택압의 강도, 개체 규모, 그리고 야생 개체군과 가축화 개체군의 유전자 격리에 따라서 아주 빠르게 일어날 수도 있다. 두려움을 매력으로 대체함으로써 생존하는 데 사람을 활용할 수 있다면 어떤 동물이라도 살아남을 뿐 아니라 번성하게 될 것이다. [pp. 83~84]
결론적으로 인간은 친화력으로 진화의 승자가 되고, 또 다른 종(種)도 인간과의 친화력을 키워 ‘자기가축화’되는 방법으로 번성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보다 정확하게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種)은 자기가축화 과정이 시작될 때부터 극도의 자제력을 지녔던 유일한 종(種)이었기에 극도로 문화적인 종(種)이 탄생, 진화의 승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사람의 자기가축화 가설이 옳다면, 우리 종이 번성한 것은 우리가 똑똑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친화적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p. 123]
이 친화력이 상승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동물과 달리 ‘집단 내 타인’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범주도 만들어냈다.
우리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 집단 사람이라고 인식할 수 있다. 같은 스포츠팀 유니폼을 입은 사람, 같은 동호회 사람이면 우리 집단이 되며, 십자가 목걸이 하나로 우리 편으로 여기기도 한다. 우리가 자신을 꾸미는 방식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다른 구성원들에게 같은 편임을 알리기 위한 노력이다. 우리는 집단 내 타인을 위해서 기꺼이 돌봄을 제공하고 유대를 맺으며 심지어 자신을 희생하기도 한다.
~ 중략 ~
사람은 같은 낯선 사람이라도 이왕이면 자신과 같은 집단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돕고 싶어 한다. 나와 같은 소속임을 그 낯선 사람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특히나 더 도우려고 한다. [pp. 158~159]
이런 ‘집단 내 타인’ 혹은 ‘내(內)집단’을 향한 친화력은 집단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타인들을 결속시킨다. 동시에 외(外)집단에 대한 경계와 배제도 강화시키게 된다.
누어 크테일리(Nour Kteily)의 연구에 따르면
외집단에 대한 비인간화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요소는 그들이 먼전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인식이었다. 이것을 보복성 비인간화(Reciprocal Dehumanization)라고 한다. [pp. 193~194]
이렇게 ‘보복성 비인간화’가 발생하면 집단 간의 갈등이 더욱 심해진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우리가 친화력을 지닌 동시에 잔인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잠재력도 지닌 종임을 설명해준다. 외부인을 비인간화하는 능력은 자신과 같은 집단 구성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만 느끼는 친화력의 부산물이다. 하지만 펄럭이는 귀나 얼룩이 있는 털 같은 신체적 변화와는 달리 이 부산물은 실로 가공할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와 다른 누군가가 위협으로 여겨질 때, 그들을 우리 정신의 신경망에서 제거할 능력도 있는 것이다. 연결감, 공감, 연민이 일어날 수 있던 곳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다정함, 협력,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 종 고유의 신경 메커니즘이 닫힐 때, 우리는 잔인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소셜미디어가 우리를 연결해주는 이 현대 사회에서 비인간화 경향은 오히려 가파른 속도로 증폭되고 있다. 편견을 표출하던 덩치 큰 집단들이 보복성 비인간화 행태에 동참하며 순식간에 서로를 인간 이하 취급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로를 보복적으로 비인간화하는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p. 226]
결국 저자들이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진화의 승자가 적자(適者)가 아니라 다정한 자’라는 주장이 아니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내(內)집단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지배 성향의 사람들과 외(外)집단에게는 혐오로 대응하는 우파 권위주의 성향의 사람들에 의해 ‘보복성 비인간화’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진화론을 끌고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저자들의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에서 언급한 접촉과 교류를 통해 비인간화와 배척, 그리고 혐오를 줄이자는 얘기다.
그래서 저자들도 이 책을 자신의 개 오레오와의 얘기로 끝마치려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레오와 나눈 우정과 사랑으로 나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함을.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다. [p. 300]
이 리뷰는 아카넷 출판사에서 출간된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작가님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을 읽고 쓰는 리뷰입니다. 지금까지 읽었던 과학분야의 책 중에서 가장 따뜻한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평상시에 관심 있던 주제였던 부분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고르게 됐는데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얼마나 왜곡되서 사용되고 있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리뷰입니다. 전 대통령님의 추천을 보고 읽게 되었습니다. 읽으면서 느낀 점은 이기적 유전자의 소프트한 버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인 우리, 그리고 생태계의 다양한 생명체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진화하게 된 이유에 대해 다양한 사례와 실험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다정함'이 어리석은 것으로 폄하되는 시대에 좋은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