롭 무어 저/김유미 역
이즈미 마사토 저/김윤수 역
앨릭스 코브 저/정지인 역
야마구치 슈 저/김윤경 역
한상연 저
존 스트레레키 저/고상숙 역
이 책에서 보부아르가 제기한 문제를 생각해 본다.
여성의 불변적 속성에 의해 따른 필연적 결과로 해석하는 세 가지 본질- 보부아르-
여성들은 왜 장구한 역사 동안 주체가 되지 못하고 절대적 타자에 머물러 있을까?라는 질문에 보부아르의 대답은 촌철살인다.
"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즉 여성이 절대적 타자가 된 것은 사회문화적 산물일 뿐, 여기에 어떤 불편적 필연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보부아르는 이 세 가지 본질에 반박하다.
첫째는 생물학적 입장이다. 여성의 신체적 특징에 의해 필연적으로 사회적 역할과 지위가 결정된다는 주장에 대해서, 여성은 남성보다 종족보존에 대한 본능이 강하다. 본래 여성의 역할은 모성에 있고, 따라서 남성보다 신체적으로 열등하다. 진짜 그런가? 라고 묻는다. 여성과 모성의 관계는 자연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출산의 중요성,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자녀의 수, 임신과 분만의 의학적 조건, 남성의 부양능력에 따라 여성이 생식기능에 종속되는 강도가 달라진다는 점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이에 대해서는 생식기능과 낙태권에 관한 논의가 여전히 진행형이다)
둘째는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적 입장이다. 여성은 리비도 발달과정상 결함있는 존재이며 열등한 존재다, 진짜?, 성적 정체성,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남성은 여자아이에게 절대적 권위자로등장한다. 이런 입장은 여성의 종속은 필연적이다.
셋째로 엥겔스의 역사유물론에 따르면, 여성의 종속적 지위는 기술발전에 따른 필연적결과다. 여성의 지위가 이렇게 기술발전의 필연적 결과로 해석할 수 있을까? 타인을 지배하려는 의식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청동기의 발견도 여성의 종속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부아르는 아주 중요한 말을 했다. 여성이 자유를 얻는다. 이는 가부장사회에서는 아무런 쓸모없는 폐물이 됐다는데 그 원인이 있다. 여전히 쓸모있다면, 예속 등으로 여성의 삶을 옥죄기 때문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 실존주의 그리고 페미니즘, 여성해방론
1908년에 출생한 보부아르는 1929년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을 한다. 통속적인 당대의 결혼이 아닌, 각자의 활동에 대한 상호존중하는 인격적결합의 의미로서 결혼이다. 1931년 철학교사, 1043년부터 작가로서 활동한다. 1949년 "제2의 성"을 출간, 이때까지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 당시 페미니즘을 개량으로 봤던 것이다. 1965년 페미니스트라고 밝혔던 것은 프랑시스 장송과의 인터뷰에서였다. 1967년 베트남에서 저지른 미군의 전쟁범죄를 탄핵하기도 했다. 1968년 유럽을 휩쓴 68혁명을 거치면서 두 번째 패미니즘 흐름이 등장, 여성해방운동으로 규정되는 행동주의 시대를 맞이하며, 보브아르의 여성운동 참여 역시 이와 함께 본격화된다.
보부아르의 실존주의
철학적 입장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이말은 무신론이라는 전제가 바탕에 깔려있다. 본질은 이미 정해진 신의 창조물로서의 정체성이다. 즉, 창조주로서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인간을 창조하기에 앞서 일종의 설계도처럼 인간의 본질을 가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본질에 따라 인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창조론에 서면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창조에 앞서 본질이 선행하게 된다. 그러나 존재는 있는 그대로다. 사르트르와 같이 실존주의 철학을 하면서도 그가 주장한 타인과의 대립과는 다른 타인과의 상호인정을 통한 역동적 화해에 방점을 둔다.
도적적 의무와 진정한 자유인
그가 생각하는 도덕적 의무란 알지도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할 보편적 기준이나 정의 원칙에 따른 의무라기 보다는 '사랑'과 같이 무관심을 허락하지 않는 나와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의무라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보면서도 이런 자유가 도덕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유속에 도덕의 법칙이 내재 돼있음을 전제한 것이다(28쪽). 보부아르에 따르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진정한 자유인)은 타인의 자유를 통해 자신의 자유를 하려하고, 자신의 자유만이 아니라 타인의 자유를 목적으로 삼고, 자신의 동료들의 삶과 타인의 자유에 관심을 가지며, 자신의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문제때문에 고심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와 반대로 타인의 목적이나, 이에 대해 자신의 행동이 갖는 의미에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쾌락에 관심을 갖고 타인을 수단으로 취급하며, 타인을 파괴하고 적대시하는 사람(마치 오늘날 대한민국의 몇줌 안되는 이들-정치권, 재벌들, 관료들, 언론들, 이른바 제0권력이라 불리는 집단들-)들은 결국 자신의 자유도 잃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은자유라는 이름 아래 결국 쾌락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새로 시작한 드라마 "마인"에서 부자들은 더 갈구한다. 배고파한다. 욕망의 늪은 한 없이 깊기 때문에...라는 메시지처럼,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가? 동일한 시민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차이를 인정하고 성별에 따라 다른 대우를 해야 한다는 것인가? 페미니즘 이슈들은 하나의 답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첨예한 정치적, 철학적 문제를 여러 방면에서 ‘생각’해야 한다.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은 이를 깊이 고민해온 현대 페미니스트 사상가들을 친절히 소개한다.
이 책을 통해 시몬 드 보부아르, 뤼스 이리가레에서 주디스 버틀러에 이르는 다양한 페미니즘 사상에 입문하고, 앞으로 페미니즘이 나아갈 방향도 짚어볼 수 있다.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는 “여자든 남자든, 우리는 모두 지금보다 더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더 잘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바로 ‘생각’이다.
여성들은 왜 장구한 역사 동안 주체가 되지 못하고 절대적 타자에 머물러 있었을까? 이에 대한 보부아르의 대답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그녀의 유명한 주장에 있다. 뤼스 이리가레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타자가 된다는 것은 주체가 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시몬 드 보부아르 이후의 페미니즘이 ‘제2의 성’의 지위에서 벗어나 타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주체 입장을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뤼스 이리가레는 평등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하면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위한 싸움은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여성해방의 최종적인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재차 강조한다.
길리건은 “여성적 윤리”로서의 돌봄 윤리와 “여성주의적 윤리”로서의 돌봄 윤리를 구분한다. 그녀에 따르면 “여성적 윤리”로서의 돌봄 윤리는 가부장주의 사회에서 여성에게만 강조되었던 윤리이다. 돌봄을 여성의 본성과 연결시켜서 그것을 여성만의 업무로 만들어버린다.
버틀러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젠더 트러블" 은 그 부제가 말해주고 있듯이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그야말로 ‘여성’이라는 정체성 범주의 해체를 꾀하고 있다. 버틀러는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조차도 권력 담론의 일부라고 규정함으로써 성 정체성 자체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성주의 이론이 여성이라는 범주를 넘어서 소수자의 섹슈얼리티 문제로까지 확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