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선 저 저
레이첼 카슨 저/김은령 역/홍욱희 감수
앨릭스 코브 저/정지인 역
유시민 저
안데르스 한센 저/김아영 역
최종엽 저
카렌 암스트롱(지음)/ 교양인(펴냄)
종교의 이름으로 우리는 정작 해야 할 것을 실천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인간은 자신이 저지른 폭력의 죄를 종교라는 위대한 이름으로 세례한 후, 정치적 도구로 삼는 것은 아닌지!!!!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전쟁에 대해 나는 이 책을 통해 알았고 말하고 싶었다.
책 페이지 1에서 〈창세기〉 4:2, 8~10 동생인 아벨을 죽인 카인의 장면을 언급한 의미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책은 저 수메르 시대에서 발원하여, 제국주의의 폭력을 거쳐 종교 근본주의를 관통하여 현대로 거슬러 올라온다. 시간순으로 총 13장으로 서술된다. 다시 한번 묻게 된다. 종교는 원래 폭력적인가? 개종 아니면 죽음이라는 이슬람의 방식, 물론 이슬람 뿐 아니다!! 그들의 경전에서 각자 신이 말한 '자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머리에 이고 산다면, 과연 남의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언행 불일치의 면모를 교회에 다니면서 가장 많이 본다.
동물 공희 풍습 죄 지은 자가 자기 죄를 사함 받기 위해 순한 양을 제물로 바치는 비슷한 모습으로 다양한 종교에서 볼 수 있다. 종교의 폭력적인 면을 쓰려면 지면이 부족할 정도라는 저자!! 문명의 폭력성!!!
수메르, 농경의 시작과 전쟁의 탄생에서
최초의 전쟁 영웅으로 기록되는 길가메시 신화.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에서 언급된 장면들. 수메르인은 최초로 공동체가 생산한 잉여 생산물을 징발하여 특권 지배층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그 무렵에도 농민은 최저 생활 수준으로 살아갔는 것. 노동의 열매를 강탈당한 농민은 노예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조로아스터교는 귀족의 요구에 적합하게 수정되어 페르시아 지배 계습의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들이 살던 시대에는 신들이 우주의 상태를 관리한다고 믿었고 이런 불평등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터. 군대의 폭력을 '문명의 상징'으로 제시했다. 인간이 존재함과 동시에 지배, 피지배가 생겨났고 오늘날에까지 유효하다.....
인도, 비폭력을 향한 험난한 길
인도 아리아인의 의식과 신화는 근동의 목축민과 마찬가지로 조직화된 절도와 폭력을 찬양했다. 그들의 말로 '신성한 질서'였으나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전혀 '종교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베다의 의식은 "네가 주니까 내가 준다는" 상호 교환적이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인도를 이해하는 데는 공통적으로 몇 가지 키워드가 제시한다. 그것은 전사들의 억제를 무디게 하는 '소마', 계급제도와 의무, 베다 의식, 불교 등이다. '신들의 나라'라 불리는 인도, 다양성을 안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계급 제도와 여성차별은 심각하다. 폭력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물리적 폭력만이 폭력은 아닐 것이다. 차별과 편견, 여성의 사회활동 억압 등 이 모든 것이 '폭력'이다.
이 챕터를 읽으며 최근 아프가니스탄의 소식이 떠오른다. 여성의 활동을 제약하는 텔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블을 장악한 모습, 탈출하기 위해 미군 수송기에 줄을 선 수백 명의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표정, 어린 아기들의 얼굴, 겁에 질린 여자들, 먼저 도망친 대통령, 미군의 철수, 한국 교민의 피신 등등 계속 뉴스를 주시하면서 마음이 아팠다..... 이미 아프가니스탄은 너무도 많은 피를 흘렸다. 평화로 가는 길은 이다지도 멀단 말인가! 아직도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하는가?
책의 서사는 다시 중국으로 향한다. 동양의 황제 신화에 담긴 폭력성, 문명의 조건으로써 폭력을 언급한다. 이원론적 관점에서 문명국 VS 야만인 서사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왜냐면 우리는 선진국 VS 후진국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나는 선진국이라는 단어도 별로 달갑지 않다. 무엇이 선진이란 말인가? 자연친화적으로 사는 아프리카인들은 미개하다는 말인가? 우등생과 열등생으로 나뉘는 교실이나, 기득권 VS 비기득권 프레임은 그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념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 이념으로 종교가 사용되었다.
농경사회에서 국가 사회로 변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폭력, 기득권은 자신의 권리를 빼앗일까봐 상상의 적, 공공의 적이 필요했고 그 가장 쉬운 수단이 종교였다. 십자군 전쟁이라든가, 가톨릭 VS 프로테스탄트의 전쟁, 수니파와 시아파, 종교 재판과 30년 전쟁, 산업혁명과 함께 세계로 뻗어나간 제국주의, 이후 민족국가 체제, 미국이 이라크 침공에도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 현대에는 테러라는 이름으로 종교를 지키려 하고, 종교를 위해 전쟁을 명분화 한다.
저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세계 3대 종교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는 가장 주목받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영국인 저자이면서 이슬람의 폭력성에 대해서만 비판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이들 50만 명이 죽었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히로시마에서 죽은 아이들보다 많은 수다.... 그런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서방은 신의 이름으로 민간인을 죽이는 테러를 늘상 또 정당하게 비난하지만 서방이 벌이는 전쟁에서 죽는 수많은 민간인의 고통과 죽은을 '부수적 피해'로 일축한다면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주장할 수 없다고... 모든 국가 이데올로기는 종교적이었다.
결국 이 책이 744 페이지를 들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종교는 고유의 본질을 깨닫고 성찰해야 한다. 종교는 기득권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소외된 '타자'를 향해 있을 때 가장 아름답고 가장 종교적이다.
♣♣덧. 책은 주로 중근동 &서양을 다루고 있다. 고대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종교들 예를 들면 마야나 아즈텍의 종교, 고대 오세아니아의 매우 특이한 종교를 더 추가로 2권이 나오면 어떨까 싶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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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야훼를 믿는 아브라함계 유일신교 3대장 ㅡ 유대교, 기독교(가톨릭, 개신교), 이슬람교 ㅡ 때문에 세상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리고 이는 종교가 본질적으로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기반으로 한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의 <신의 전쟁> 은 이러한 통념에 반박하며 신의 이름으로 가해져 온 '성스러운' 폭력의 역사가 진정 종교만의 책임인지 의문을 제기하며 종교를 수단으로 사용하면서도 목적인양 전면화시키는 농경 기반 제국의 폭력(의 역사)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저자의 수십 년의 연구가 녹아 있는 작품이라 열흘간 읽으면서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평소 지문을 읽으면서 의문스러웠던 포인트들이 있었던지라 그 부분을 해소하고자 서구 기독교 역사를 중심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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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은 인류를 정착시키고 문명을 만드는데 기여한 것도 사실이었으나, 책에 따르면 농업을 기반으로 한 체제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잉여 생산물의 여부 및 그 차이는 계급 사회의 기반을 형성했고, 지배자는 국가 통치 기술로써 종교를 이용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진 자는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폭력과 약탈을 일삼았다.
초기 종교들은 이러한 농경 사회에서 비롯된 제국의 폭력성에 반기를 들며 시작된다고 한다. 특히 농경국가의 폭력성을 고발했던 구약은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로부터 도망 나오면서 농경 사회의 체제 폭력에 정면으로 맞서는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킬 것" 을 이야기한다. 더불어 이스라엘인들에게 구약은 "도시 생활의 계층화된 압제를 버리고 목자 생활의 자유와 평등을 얻으라" 고 고집하는 약속과도 같았다. 예수는 당대 모순적이고도 폭력적인 지배 체제의 질서에 반기를 드는 혁명가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순교자들의 죽음은 신앙의 중심화인 동시에 국가 폭력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슬람교 또한 당대 농경 체제가 유발하는 계급 체제에 반기를 들며 제국에 대항한 공동체 지향적인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한 것이 시작이었다.
순교자 숭배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이들이 예수가 유일무이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한가운데에는 신성한 권능을 지닌 ‘하느님의 친구들’이 있었다. 순교자들은 ‘다른 그리스도’였으며, 그들은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모방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현재로 가져왔다. [...] 순교는 늘 소수의 항의가 되지만, 순교자들의 폭력적 죽음은 국가의 구조적 폭력과 잔혹성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순교는 늘 종교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 선택이었으며, 이것은 나중에도 마찬가지다. 제국의 적으로 겨냥당하고 당국과 완전히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를 맺고 있는 이 기독교인들의 죽음은 다른 종류의 충성을 도전적으로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로마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한 고귀함을 얻었으며, 순교자들은 자신의 죽음을 억압자의 문간에 갖다놓음으로써 효과적으로 억압자를 악마로 만들었다. 동시에 이 기독교인들은 원한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고, 이것이 그들의 신앙에 새롭게 공격적인 날을 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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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제국에 반기를 들며 이어진 종교의 전통이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며 '기독교인 황제' 라는 모순적인 존재를 탄생시킨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타자에서 주체가 된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특징인 강탈과 폭력에 오염된다. 이단은 이제 더 이상 교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제정분리가 불가능했던 로마에서 다른 길을 가는 이단은 곧 황제에 대한 반기, 더 나아가 팍스 로마나에 대한 위협을 의미했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 이단이 탄압되기 시작한다. 신앙인들은 제국을 기독교화하고자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겠으나, 현실은 신앙이 제국주의화되었다.
모든 성공한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되풀이해 나타날 세 가지 주제를 한꺼번에 볼 수 있다. 제국의 선과 그것에 반대하는 악한 자들을 대립시키는 이원론적 세계관, 통치자를 신의 대리자로 보는 선민 사상, 세상을 구한다는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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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은 늘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며, 따라서 국가 폭력은 공공질서에 당연한 것으로 내재화되어 왔을 것이다.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의 변이 또한 이 폭력의 과정이 수반되었고, 그 속에서 불안감을 느낀 이들은 상상의 적을 만들어 타자화시키고 폭력을 행사한다. 끊임없는 <타자에 대한 불안> 은 유대인과 무슬림을 비롯한 '이교도' 에서 '이단' 으로, 이단에서 '타민족' 으로, 주류 문화에 동화되지 못한 '소수 집단' 으로 확장되어 나간다.
농경 국가의 억압은 산업화의 구조적 폭력으로 대체되었다. 더 자비로운 국가 이데올로기가 발전하고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이 전에는 오직 귀족에게만 가능했던 안락을 누리게 되지만, 일부 정치가들의 최선을 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건널 수 없는 간극이 늘 부자와 빈자를 갈라놓는다. [...] 산업화는 민족 국가도 낳았다. 농경 제국은 단일 문화를 강제할 기술이 없었다. 근대 이전 왕국의 경계와 영토는 느슨하게 규정할 수 있었을 뿐이며, 군주의 권위는 일련의 중첩된 충성을 통해 존중되었다. 하지만 19세기에 유럽은 중앙 정부가 통치하는 분명하게 규정된 국가로 재구성되었다. 산업 사회는 표준화된 읽고 쓰는 능력, 공통어, 인간 자원의 통일적 통제를 요구했다. 신민은 통치자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통합된 ‘민족’, 즉 ‘상상의 공동체’ ?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도 깊은 관련성을 느끼라는 권유를 받는다. ? 에 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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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누가 세계의 고통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인류사에서 종교는 늘 공동체를 향했다. 지배 계급의 논리와 합치되며 폭력과 약탈에 변질되어 오긴 했으나, 그럼에도 본질은 주류 체제에서 소외당한 이들을 끌어안기 위한 것이었다.
역사 속 산업혁명과 함께 수반된 제국주의적 폭력은 국외로 뻗어 나가 타자 착취를 정당화하였고, 이는 특히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대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십자가의 폭력으로 침략당한 라틴 아메리카가 아이러니하게도 가톨릭의 힘으로 해방을 맞이하고, 보수적인 가톨릭이면서도 사회 참여적인 해방 신학이 가장 발달한 곳이라는 점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종교로 가장한 군주의 폭력성을 격파하기 위해 종교를 개인화하는 과정이 근대의 역사였다면, 종교가 주류에서 소외된 타자들을 위해 다시 공동체를 향하는 것이 곧 탈근대의 역사라는 말이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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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앙 전통도 군사적으로 막강한 제국의 후원이 없었다면 ‘세계 종교’가 되지 못했을 것이며, 모든 전통은 어쩔 수 없이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개발하게 된다.”
30P
모든 전쟁은 자원 경쟁에서 비롯된다. 인류는 더 많은 식량, 자원, 토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을 벌여왔다. 전장의 깃발에는 온갖 숭고하고 휘황찬란한 가치가 아로새겨져 나부끼지만, 사실 자원 경쟁의 틀을 넘어서는 고도의 대의명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의 명분이란 살이 터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참상으로부터 애써 눈을 돌리게 하려고 고안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원 경쟁이라는 명백하면서도 얄팍한 동기를 넘어서는 숭고한 정신적 차원의 명분이 정교하게 구성되어야만 사람들은 쟁기를 버리고 칼을 들 수 있다.
전쟁은 다양한 경로로 명분을 섭취하지만, 그중에서도 종교는 그야말로 가장 풍성한 명분의 보고나 다름없었다. 근대 이전에 종교는 정치 및 일상생활과 완전히 융합되어 있었다. 종교적 가치와 양식은 삶의 모든 양태를 좌우했다. 하지만 그 어떤 신이나 예언자도 특정 민족 구성원 전체에게 직접적이고 명백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전할 수는 없었기에 종교적 의사결정의 많은 부분은 늘 특권적 소수의 해석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종교가 삶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컸다는 점, 그러면서도 시공간을 초월한 일관된 교리적 해석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 전쟁의 제1명분으로서 종교의 입지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사제와 권력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신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민족이고, 우리가 가는 길을 막는 자들은 모두 타락한 이교도들이므로 신이 벌하실 것이다. 종교는 이처럼 선한 우리와 악한 타자로 구성된 이분법적 세계관을 확고히 하는데 긴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이러한 역사가 되풀이되면서 어느덧 종교 자체가 모든 폭력의 근본적 원인으로 느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이 고대부터 동시대 테러리즘까지 종교와 폭력의 역사를 가로지르며 하고 싶었던 말의 요지는 폭력의 원인으로서 종교를 지목하려는 손쉬운 접근의 유혹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문제의 원인은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원 경쟁이라는 본질을 교리로 희석하려는 호전적인 권력과 왜곡된 민족주의에 있다. 전쟁의 명분으로서 경전에서 끌어다 온 문장에 집착하다 보면 폭력을 추동한 진짜 주체와 의도는 가려지게 된다.
저자는 고대 수메르 문명에서부터 힌두, 이슬람, 유교, 법가,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 등 거의 모든 민족과 종교를 얕게 아우르며 종교와 폭력에 결부된 역사적 실례들을 속도감 있게 보여준다. 종교와 폭력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만 거의 700페이지를 채운 셈인데, 진정 세계사 전체를 빈틈없이 아우른 것 같은 착각을 준다. 그만큼 두 키워드는 지금까지의 거대서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지배적 변수였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저자는 특히 모든 종교가 역사적 흐름 속에서 불필요한 폭력을 억제하는 평화적 완충지대의 역할과 오히려 폭력을 부추기는 호전적 기능을 교차적으로 표출하며 긴장의 역사를 구성해 왔음을 강조한다. 우리가 아는 한 완전히 평화적인 종교도, 완전히 호전적인 종교도 없다는 것이다. 만약 완전히 평화적인 종교가 한때 존재했었다고 하더라도 아마 우리는 오늘날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완전히 평화적인 종교가 어떻게 그 교리를 누군가에게 전하며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길 수 있었겠는가?
모든 종교에는 실로 다양한 면모가 깃들어 있다. 인류는 자연이라는 무지막지한 힘에서 느껴지는 무력감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보고자 신화를 창조해 냈고, 종교적 신념은 가공할 정신적 응집력을 만들어내 단독자들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성취하게 했다. 우리는 피라미드와 고딕 양식의 중세 대성당을 바라보며, 저런 성취를 가능하게 만든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물리적 토대를 벗어난 저 너머의 세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성취다. 믿음은 암암리에 희로애락의 모든 국면에 기저 조건으로 작용한다. 철천지원수를 사랑하게 만들 수도, 가족 간에 칼을 들이대게 할 수도 있다. 인류 문명사의 최고 걸작품을 탄생케 할 수도, 반대로 그 걸작품을 한순간에 먼지로 만들어 낼 수도 있다. 하나의 종교가 그 모든 양극단의 의사결정 과정에 근거가 될 수 있다. 이편이나 저편이나 하나같이 같은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서로의 목전에 칼끝을 겨눈다.
신이 죽었다고 선언된 오늘날에도 그러한 종교의 양면성과 아전인수는 여전히 유효하다. 신이 죽은 성좌에 인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대신 앉아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야당이나 여당이나 똑같은 ‘국민’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기 뜻을 관철하려 악다구니를 부린다. 독재국가는 배타적 민족주의를 내세워 타자를 악마화하며 정권의 당위성을 옹립한다. 분쟁지역에 군대를 파견하는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그곳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십자군 전쟁 이후로 자유의 수호는 전쟁의 가장 당면한 명분이었으나, 진정한 의미에서 집권 세력이 아닌 평범한 백성들의 자유를 최우선 과제로 고려한 전쟁은 없었다.
폭력의 시간에 광신도적 열정만을 주범으로 몰아 손가락질한다면 폭력을 선동한 권력자들은 진짜 의도를 은폐할 시간을 벌게 된다. 진짜 미치광이가 허공을 향해 휘두르는 주먹질이 아닌 이상, 모든 조직적 폭력은 자원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고, 그 폭력으로 주머니를 채운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