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첼 카슨 저/김은령 역/홍욱희 감수
안데르스 한센 저/김아영 역
앨릭스 코브 저/정지인 역
유시민 저
조던 피터슨 저/김한영 역
최종엽 저
“어떤 신앙 전통도 군사적으로 막강한 제국의 후원이 없었다면 ‘세계 종교’가 되지 못했을 것이며, 모든 전통은 어쩔 수 없이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개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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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전쟁은 자원 경쟁에서 비롯된다. 인류는 더 많은 식량, 자원, 토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을 벌여왔다. 전장의 깃발에는 온갖 숭고하고 휘황찬란한 가치가 아로새겨져 나부끼지만, 사실 자원 경쟁의 틀을 넘어서는 고도의 대의명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의 명분이란 살이 터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참상으로부터 애써 눈을 돌리게 하려고 고안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원 경쟁이라는 명백하면서도 얄팍한 동기를 넘어서는 숭고한 정신적 차원의 명분이 정교하게 구성되어야만 사람들은 쟁기를 버리고 칼을 들 수 있다.
전쟁은 다양한 경로로 명분을 섭취하지만, 그중에서도 종교는 그야말로 가장 풍성한 명분의 보고나 다름없었다. 근대 이전에 종교는 정치 및 일상생활과 완전히 융합되어 있었다. 종교적 가치와 양식은 삶의 모든 양태를 좌우했다. 하지만 그 어떤 신이나 예언자도 특정 민족 구성원 전체에게 직접적이고 명백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전할 수는 없었기에 종교적 의사결정의 많은 부분은 늘 특권적 소수의 해석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종교가 삶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컸다는 점, 그러면서도 시공간을 초월한 일관된 교리적 해석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 전쟁의 제1명분으로서 종교의 입지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사제와 권력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신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민족이고, 우리가 가는 길을 막는 자들은 모두 타락한 이교도들이므로 신이 벌하실 것이다. 종교는 이처럼 선한 우리와 악한 타자로 구성된 이분법적 세계관을 확고히 하는데 긴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이러한 역사가 되풀이되면서 어느덧 종교 자체가 모든 폭력의 근본적 원인으로 느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이 고대부터 동시대 테러리즘까지 종교와 폭력의 역사를 가로지르며 하고 싶었던 말의 요지는 폭력의 원인으로서 종교를 지목하려는 손쉬운 접근의 유혹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문제의 원인은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원 경쟁이라는 본질을 교리로 희석하려는 호전적인 권력과 왜곡된 민족주의에 있다. 전쟁의 명분으로서 경전에서 끌어다 온 문장에 집착하다 보면 폭력을 추동한 진짜 주체와 의도는 가려지게 된다.
저자는 고대 수메르 문명에서부터 힌두, 이슬람, 유교, 법가,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 등 거의 모든 민족과 종교를 얕게 아우르며 종교와 폭력에 결부된 역사적 실례들을 속도감 있게 보여준다. 종교와 폭력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만 거의 700페이지를 채운 셈인데, 진정 세계사 전체를 빈틈없이 아우른 것 같은 착각을 준다. 그만큼 두 키워드는 지금까지의 거대서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지배적 변수였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저자는 특히 모든 종교가 역사적 흐름 속에서 불필요한 폭력을 억제하는 평화적 완충지대의 역할과 오히려 폭력을 부추기는 호전적 기능을 교차적으로 표출하며 긴장의 역사를 구성해 왔음을 강조한다. 우리가 아는 한 완전히 평화적인 종교도, 완전히 호전적인 종교도 없다는 것이다. 만약 완전히 평화적인 종교가 한때 존재했었다고 하더라도 아마 우리는 오늘날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완전히 평화적인 종교가 어떻게 그 교리를 누군가에게 전하며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길 수 있었겠는가?
모든 종교에는 실로 다양한 면모가 깃들어 있다. 인류는 자연이라는 무지막지한 힘에서 느껴지는 무력감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보고자 신화를 창조해 냈고, 종교적 신념은 가공할 정신적 응집력을 만들어내 단독자들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성취하게 했다. 우리는 피라미드와 고딕 양식의 중세 대성당을 바라보며, 저런 성취를 가능하게 만든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물리적 토대를 벗어난 저 너머의 세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성취다. 믿음은 암암리에 희로애락의 모든 국면에 기저 조건으로 작용한다. 철천지원수를 사랑하게 만들 수도, 가족 간에 칼을 들이대게 할 수도 있다. 인류 문명사의 최고 걸작품을 탄생케 할 수도, 반대로 그 걸작품을 한순간에 먼지로 만들어 낼 수도 있다. 하나의 종교가 그 모든 양극단의 의사결정 과정에 근거가 될 수 있다. 이편이나 저편이나 하나같이 같은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서로의 목전에 칼끝을 겨눈다.
신이 죽었다고 선언된 오늘날에도 그러한 종교의 양면성과 아전인수는 여전히 유효하다. 신이 죽은 성좌에 인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대신 앉아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야당이나 여당이나 똑같은 ‘국민’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기 뜻을 관철하려 악다구니를 부린다. 독재국가는 배타적 민족주의를 내세워 타자를 악마화하며 정권의 당위성을 옹립한다. 분쟁지역에 군대를 파견하는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그곳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십자군 전쟁 이후로 자유의 수호는 전쟁의 가장 당면한 명분이었으나, 진정한 의미에서 집권 세력이 아닌 평범한 백성들의 자유를 최우선 과제로 고려한 전쟁은 없었다.
폭력의 시간에 광신도적 열정만을 주범으로 몰아 손가락질한다면 폭력을 선동한 권력자들은 진짜 의도를 은폐할 시간을 벌게 된다. 진짜 미치광이가 허공을 향해 휘두르는 주먹질이 아닌 이상, 모든 조직적 폭력은 자원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고, 그 폭력으로 주머니를 채운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누가 세계의 고통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책의 끝에 있는 후기의 제목입니다)
무려 610쪽에 걸쳐 저자의 설명과 주장, 각종 인용된 자료들을 읽으면서 책을 든 것을 잠깐 후회했습니다. 종교이야기가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책을 든 주된 이유는 ‘신의 전쟁’이라는 제목에서 추정되듯이 신의 이름으로 벌어진 잔인한 전쟁의 기록들을 보기를 기대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으로서 종교가 가진 폭력성, 특히 서구 제국주의에 빌붙어 식민지 주민들을 괴롭히고 착취한 제국주의의 첨병이었던 선교사들의 잔인성을 확인하고, 어떻게 평화와 공존 관용을 주장해야 할 종교인들이 개인적 민족적 국가적 야망을 가진 자들의 하수인이 되었을까 확인하고 반성하고 반복되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 저자는 혹시 알고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읽기로 했던 것입니다.
저자의 책 중에서 머리말을 정리하고 보니 ‘어! 내가 생각한 내용이 아닌 것 같은데’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수는 제국주의의 정치적 폭력과 억압에 대항하는 대안을 만들기를 원했고, 그의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했다는 설명 이후에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무기가 된 내용들을 정리했습니다. 책 읽기를 마무리하면서 저자의 후기가 많은 분량의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라 간추리며 종교에 대한 선입견을 수정하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저자의 후기를 정리합니다.
종교는 단일하고 변함없는 고유의 폭력적 본질이 있다는 주장은 부정확합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종교적 믿음과 관행이 완전히 정반대의 행동 경로의 영감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빈 라덴과 탈레반의 극단적 이슬람주의자들은 사실 수니파와 시아파로 갈라져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에서 극단주의자로 분리되어 아프가니스탄에서 세력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무슬림은 폭력적인 테러리스트다는 주장도 있지만 무슬림은 평화를 사랑한다는 주장도 타당하다는 설명입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종교와 세속의 구분은 없었습니다. 모든 국가 이데올로기는 종교적이었습니다. 존 로크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평화의 열쇠라고 믿었지만 민족 국가는 전쟁 반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문제는 ‘종교’라고 부르는 다면적 활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과 국가의 본질에 깊이 새겨진 폭력에 있으며 국가는 처음부터 주민 가운데 적어도 90%에게 강압적 복속을 요구했습니다. 이를 위한 수단으로 군대가 있었습니다. 통치자가 국가 폭력을 피하더라도 군대를 해체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렇게 세속주의가 없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정치를 종교적인 방식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의 신앙 전통 내 종파적 증오는 실제로 치열하고 적의가 가득하지만 거의 언제나 정치적 차원이 존재했습니다. 종파적 증오의 유발자들은 종교의 옷을 입고 있지만 자신들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종교를 이용했다는 말입니다.
액턴 경은 민족 국가가 인종적이고 문화적인 ‘소수 집단’을 박해할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는데 이 ‘소수 집단’은 사실상 이단의 대체물입니다. 그러나 과거 수니파 무슬림은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배교자’라고 부르는 것을 언제나 혐오했습니다. 이라크, 파키스탄, 레바논에서 전통적인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은 민족주의나 탈식민 국가가 겪는 문제들 때문에 악화되었습니다. 제국주의의 폭력과 압제가 분열을 악화시켰습니다.
종교는 늘 공격적이라는 말은 결단코 사실이 아닙니다. 때로는 오히려 폭력에 제동을 걸기도 합니다. 서양에서 이제 세속주의(교회와 국가가 분리된 사회)는 정체성의 일부입니다만 세속주의에도 그 나름이 폭력이 있습니다. 혁명 프랑스는 강요 강압, 유혈에 의해 세속화되었습니다. 세속화는 때때로 성지에서 학살하고, 성직자들을 고문 투옥 암살하는 등 종교에 피해를 끼치기도 했습니다.
전쟁은 “관계를 보지 못하는 무능력”이 원인입니다. 우리가 왜 관용을 해야 하는지, 왜 폭력을 거부해야 하는지, 왜 억압을 강요하지 말아야 하는지는 역사를 뒤돌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얽혀 있는 관계를 보지 못하는 무능력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종교가 가장 훌륭했을 때 해낸 일을 지금 우리가 다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사족 : 툭하면 북한과의 갈등을 조장하여 지지를 받고자 하는 자들은 북한과 우리가 어떤 관계인가를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북한 평양에 탱크를 몰고 가야 한다는 주장이나, 선제공격을 하겠다는 주장이 결국 어떤 결과를 낼 것인가에 대한 답은 ‘전쟁’이구나라는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습니다.
“전쟁은 관계를 보지 못하는 무능력이 원인이다”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제국주의와 기독교
비잔티움, 제국의 무기가 된 신앙, 기독교
콘스탄티누스는 주교들에게 제국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새로운 권위를 부여했고, 특히 출신이 비천한 일부 사람들은 주교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오늘날 의회의 자리를 놓고 정치가들이 경쟁하는 것만큼이나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4세기 말에는 폭동이 도시 생활의 일반적 특징이 되었다. 이방 부족들이 쉴 새 없이 변경을 공격했고 시골에는 도적이 많았으며 도시에는 난민이 쏟아져 들어왔다. 인구 과밀, 질병, 실업, 세금 증가로 인해 긴장이 생기고, 이것은 종종 폭력적으로 폭발했지만 군대는 국경을 방어하는 데 필요했기 때문에 총독은 이런 봉기를 진압할 군사력이 없어 군중 통제의 책임을 주교에게 넘겼다. 시리아의 주교들은 이미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고 병원에서 들것에 환자를 나르고 무덤을 파는 일을 지역 수사들에게 맡기고 있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379-395년 재위)는 자신이 공격적 형태의 기독교를 동방에서 실행에 옮기겠다고 결심했다. 테오도시우스는 입맛에 맞을 때는 로마 귀족에게 선심을 쓰는 체했지만 사실 서민에게 공감하여, 불만을 품은 시민을 그들이 사랑하는 수사를 통해 꾀어내어 권력의 기초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교도 신전을 파괴하는 일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388년 황제는 수사들에게 공격 허가를 내렸고, 수사들은 시리아의 마을 성지들을 역병처럼 공격했다. 일부 주교는 이런 문화 파괴 행위에 반대했지만 잠시뿐이었다.
이런 공격들이 성공하자 테오도시우스는 제국에서 이데올로기의 일치를 이루는 최선의 방법은 희생제를 금지하고 모든 옛 성지와 신전을 폐쇄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런 기독교적 국가 폭력에 가장 권위적인 축복을 한 사람은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354-430)였다. 그는 호전성이 새로운 개종자들을 끌어들인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공격을 당하면 다른 쪽 뺨을 내밀라고 말했다고 해서 악행을 앞에 두고 수동적으로 굴라고 요구한 것은 아니다고 주장하며 폭력을 악하게 만드는 것은 죽이는 행동이 아니라 그것을 촉발한 탐욕과 증오와 야심이라는 감정이고, 사랑-적의 행복에 대한 진지한 관심-의 영향을 받은 폭력은 정당하며, 교사가 학생을 위하여 매를 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행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개인은 설사 자기 방어를 위해 행동한다 해도 불가피하게 적에게 고통을 주려는 무절제한 욕망(리비도)을 느낄 수밖에 없는 반면, 단순하게 명령에 복종할 뿐인 직업 군인은 감정 없이 행동할 수 있다고 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폭력을 개인의 범위 너머에 놓음으로써 국가에 거의 무한한 권력을 부여했다.
610년 페르시아의 코스로우 1세는 비잔티움을 공격한다. 그러나 헤라클리우스와 그의 소규모 정예 부대는 놀라운 반격을 시도하여 소아시아에서 페르시아군을 물리쳤으며, 이란고원을 습격하여 조로아스터교 귀족이 소유한 무방비 상태의 땅을 공격하고 그들의 성지를 파괴했다. 헤라클리우스의 원정은 이전 기독교 로마의 어느 전쟁보다 노골적으로 종교적인 색채를 드러냈다. 실제로 이제는 교회와 제국이 완전히 서로 얽혀 있어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 동안에는 기독교 자체가 공격을 당하는 것 같았다. 7세기 초에 이르면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모두 제국주의적 지배를 위한 전쟁 때문에 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