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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황정은, 오은 "읽고 쓰고 말하는 일"
2022년 01월 28일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는 한 사람의 회고록 성격의 에세이로 크게 두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이야기는 대학교 졸업 후 스물두 살에 직면하게 된 1,500일간의 백혈병 암 투병 생활기이고 두 번째 이야기는 암을 이겨낸 후 투병생활 중 슬픔을 공유하고, 힘겨운 나날을 함께해 준 지인들을 찾아 반려견 오스카와 함께 떠난 24,140킬로미터의 미 대륙 횡단 자동차 여행기이다.
두꺼운 편에 속하는 책이고 암 투병기라는 힘든 여정을 함께한다는 것은 어쩌면 독자에게도 부담스러운 시간일 수 있다는 우려는 있지만 드라마틱 하고 소설을 읽는 듯한 그녀의 필치가 호소력이 있어 잘 읽히고, 1,500일간의 백혈병 암 투병 사이 술라이커 곁을 지켜주고 응원해 주던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코로나로 멀어진 거리만큼 마음도 멀어진 내 이웃들에 대한 따뜻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좋았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관계'에 집중했다. 암 투병기에서는 술라이커의 남자친구 '윌'이 많이 등장하는데, 마침 무직이었던 그가 술라이커 곁에서 살신성인하여 보살피는 모습을 보며 암 환자 곁을 지키는 일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당사자인 술라이커는 술라이커대로 누군가를 이해할 여력이 없는 상태인 것이 분명했고, 윌 또한 자신의 모든 시간을 할애하여 돌보다 조금씩 지쳐가는 모습 속에 이 둘의 관계가 과연 사랑하는 사이로 남을 것인지 환자와 간병인의 모습과 같은 새로운 관계로 남을 것인지 궁금했는데, 술라이커가 암을 극복하고 결국 윌과 헤어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어 무척 애석했다. 게다가 마지막 '감사의 말'에서도 윌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어 의아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책이 무척 재미있었던 이유는 백혈병 암 투병기나 미 대륙을 횡단하는 자동차 여행이라서 이기보다는 순전히 저자의 생동감 있는 필력이 아닐까 생각된다. 암으로 인해 당연한 일상이 당연하지 않게 된 술라이커의 이야기가 나에게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볼 줄 알게 된 계기가 되어 귀한 시간이었다.
-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
난 내 나이 37살에 유방암을 처음 진단받았다. 그리고 2년 반만에 재발.
처음 암을 진단받았을 때도 행복감과 안정감이 모두 부서진 느낌이었다.
그걸 조금씩 회복하고 이어져 가는 중에 재발로 다시 무너져 내렸다.
난 더이상 행복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일까.. 우울감에 빠져들고 있는데 이 책을 만났다.
이 책의 문구 중 '부서진 마음의 파편을 이어 붙여 다시 삶으로' 이 부분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나만 이렇게 느낀 게 아니었구나. 다시 시작할 수 있구나. 라는 희망을 보았다.
에세이에 왠 지도지? 하고 봤는데 자세히 보니 지역마다 이름이 적혀 있다.
그녀의 친구들이 사는 곳을 표기해 둔 지도인 것이다.
대학을 갓 졸업한 스물두 살에 저자 술라이커 저우아드는 생존률 35%의 백혈병 진단을 받는다. 진단받기 전까지 원인 모를 증상들로 몸이 상해져 가고, 그 원인이 '급성 백혈병'이라는 걸 알았을 때 느낀 것은 안도감이었다고 한다. 몇 달이나 오진 속에서 갈팡질팡한 끝에 마침내 가려움, 구내염, 무력감의 원인을 밝혀낸 것이다. 건강 염려증 환자가 아니라, 지나친 유흥이나 현실에서의 부적응 때문이 아니라, 내가 또렷이 발음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확실한 질병의 결과였던 것이다.
나는 반대로 무엇때문에 내가 암에 걸렸는지 고민과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단순히 질병이 원인인건데 나는 왜 죄책감을 느껴야 했던걸까.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닌데 말이다.
유방암과 급성 백혈병과 비교할 만한 대상은 아니지만, 어떤 암이든 너무 무서운 질병이다.
그래서 암과 관련되어 비슷한 경험을 하는 것 같다. 아픈 사람에게 상업적으로 사기치는 사람들은 어디든 꼭 있고.
저우아드는 예상치 못한 병마 때문에 절망했고, 삶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도 느꼈지만, 매일 일기를 쓰며 내면의 힘을 되찾기 시작한다. 글쓰기는 비탄을 정돈할 수 있게 한 치유의 수단이자 세상과의 연결감을 유지하는 매개였다. 개인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한 저우아드의 글은 많은 주목과 사랑을 받았고 언론의 눈에도 띄어 《뉴욕 타임스》에서 ‘중단된 삶’이라는 정기 칼럼을 연재하기에 이른다. 칼럼을 읽은 전국 각지의 독자들은 수많은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들에 담긴 마음들은 저우아드에게 구명줄이 된다. 병을 치유하고 삶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저우아드는 그들을 찾아나선다. 투병 중 블로그에 올린 글들에 편지를 보내준 이들. 누구랄 것 없이 제각기 중대한 사연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평생 불치병과 함께하며 내내 열정적으로 살아온 노교수, 자살한 아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려 애쓰는 어머니, 청소년기부터 암 투병을 해온 십 대 소녀, 인생의 절반을 감옥에서 보낸 사형수… 이들과 직접 만나기 위해, 그리고 답을 모색하기 위해, 저자는 뉴욕부터 캘리포니아까지, 미국 전역을 도는 24,140킬로미터의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 로키산맥을 통과하고 외딴 해안도로를 달려 한 명 한 명을 만나는 여정이 마치 한 편의 로드무비처럼 펼쳐진다.
나 역시 우울감에서 해방되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저우아드처럼 글솜씨가 형편없어서
그냥 주저리주저리 ㅋㅋㅋ 그녀의 글에는 힘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 것 같아 부럽기도 하다.
그리고 미국 전역을 자동차 여행을 하다니 그녀의 용기도 부럽다.
책의 원제 ‘Between Two Kingdoms(두 왕국 사이에서)’는 수전 손택의 책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따온 말이다. “인간은 모두 건강의 왕국과 질병의 왕국, 두 곳의 이중국적을 갖고 태어난다. 우리는 좋은 여권만을 사용하길 바라지만, 누구든 언젠가는 잠시나마 다른 쪽 왕국의 시민이 될 수밖에 없다.”
손택의 말처럼 사람들은 질병을 두려워하고 최대한 외면하며 어떻게든 건강을 추구하곤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우리는 평생 ‘아프거나 덜 아픈 상태’를 반복하며 두 왕국 사이의 경계를 이리저리 오가고, 좋음과 나쁨, 완전함과 불완전함 사이의 그 어딘가에 머문다. 사람이란 ‘두 왕국 사이의 그 허술한 경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말 자체가 그냥 위로가 되었다. 우리는 불안전함을 극복하려 애쓰는 게 아니라, 현재 나의 몸과 마음을 받아들이고 때로 닥쳐오는 불행에 크게 휘청이지 않는 균형 감각을 기를 때에야 비로소 엉망이지만 완전한 방식으로 인생이라는 축제를 즐기며 살아갈 수 있다.
투병의 경험뿐만 아니라, 실패의 경험에서도 적용되는 말인 것 같다.
절망할 필요 없다. 그저 균형 감각을 키우고 있는 과정일 뿐.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