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규 저
제니퍼 건터 저/김희정,안진희,정승연,염지선 역/윤정원 감수
스티븐 E.쿠닌 저/박설영 역/박석순 감수
김진옥,소지현 저
사라 에버츠 저/김성훈 역
전호근 저
윌리엄 글래슬리의 ‘근원의 시간 속으로’는 서정(抒情)과 서사(敍事) 또는 감흥과 객관의 절묘한 결합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저자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데이비스 캠퍼스의 지질학자이자 덴마크 오르후스 대학교의 명예 연구가다. 대륙의 기원과 진화, 그것들을 활성화시키는 과정 등을 연구한다. 저자 윌리엄 글래슬리, 구조지질학자 카이 쇠렌센, 구조지질학자로 지구화학과 광물학에도 조예가 깊은 존 코르스트고르가 한 팀을 이루었다. 무대는 그린란드다.
이곳은 지의류가 넘쳐난다.(99 페이지).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야생 중 하나인 그린란드는 국토의 대부분이 얼음으로 덮인 곳이기도 하다.(25 페이지) 세 사람의 탐사는 카이와 존이 암석을 읽는 과정에서 근본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논문이 발단이 되었다. 그들은 탐사를 통해 논란 또는 분란을 잠재울 자료를 수집하고자 했다. 과학은 골치 아픈 분야라고 말하는 저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는 현실을 단순화한 것으로 결점이 내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74 페이지)는 설명을 덧붙인다.
저자에 의하면 그렇기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부단한 수정이 필요하다. 출간된 논문 또한 완벽할 수 없다. 모든 과학자는 다른 이들이 자신의 논문을 보완할 거라고 기대한다. 문제는 발전을 위한 지적 정도가 아닌 의도적 묵살(默殺)이다. 자신들의 논문에 대한 비난에 가까운 논문을 접한 세 사람은 격한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암석에 대해 정말 잘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전문 용어들에 실어 자신들의 생각을 표했다.
책은 흥미진진하다. 기반암이 무엇인지 같은 기본적인 사안은 물론 지질학 자체에 대한 설득력 있는 정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반암이란 토양이나 굳지 않은 퇴적물 아래에 자리한 단단한 암반이다. 저자가 풍경의 뼈대나 다름없다고 보는 기반암은 그곳에 대한 인상을 형성하고 바람에게 길을 안내한다. 저자는 기반암의 골조라는 말도 한다.(109 페이지) 조류(潮流)의 흐름은 기반암에 의해 제약을 받고 빙하는 기반암 위에 얹혀 있다. 기반암 결정 구조 안에 들어 있는 물은 기반암이 해저의 진흙에 불과했을 때부터 그곳에 있었다.(148 페이지)
그러면 지질학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지질학을 드라마가 가득한 분야가 아니라고 정의한다. 암석은 무심하게 답사를 기다릴 뿐이며 꼼꼼히 들여다봐야만 점진적인 변화가 담긴, 지루할 정도로 더딘 단서를 천천히 제공한다. 하지만 관점이 뒤바뀌고 새로운 가설이 등장하며 학계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68, 69 페이지)
이 말은 지질공원해설의 위상을 숙고하도록 이끈다. 참으로 더딘 지질의 변화를 어떻게 감지해야 할까? 지질공원 해설이란 지질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고고학과 생태학, 역사를 포괄하여 지질공원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그럼 저자는 더딘 지질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는 대지의 중추에 담긴, 멈춘 적은 없지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느리게 작동하는 역동성에 매료되었다고 말한다.(41 페이지)
과학에 바탕한 말이지만 시적으로도 들릴 만큼 인상적인 말을 하나 보자. 그것은 “지구의 대기는 지구가 호흡한 산물이며 해양과 강의 구성요소는 생명이 신진대사 활동을 벌인 결과”(18 페이지)란 말이다. 이 말은 “우리는 순전히 학문 연구로서 과학적 흥미를 품고 있지만 우리가 겪은 경험은 신비에 가깝다.”란 말과도 어울린다. 저자는 우리가 야생을 잃으면 우주에서 정신의 중요성을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을 잃을 것이라 말한다.
‘근원의 시간 속으로’에는 저자의 다섯 차례에 걸친 그린란드 탐사 경험이 담겼다. 저자는 모든 것은 침식에 결국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고 말한다.(65 페이지) 책에는 생소한 용어들도 많다. 봉합대(suture zone), 감람암(橄欖巖) 등이다. 봉합대는 충돌한 두 개의 대륙이 외과 수술에서 꿰매어진 것처럼 만난 지대를 말한다. 감람암은 현무암질의 용암을 만드는 근원암(89 페이지)으로 보통 퇴적물과 함께 산출되지 않는다.(95 페이지) 퇴적물에서는 석류석이 풍부한 암석이 생기기 마련으로 감람암과 석회석이 가까이 자리하려면 구조적으로 강렬한 힘이 필요하다. 이 암석들은 사라진 바다 가설을 지지할 증거다.
베개 현무암이란 말도 그렇다. 베개 용암이라는 말만을 들어온 입장에서는 흥미롭게 들린다. 전단대(剪斷帶; shear zone)도 그렇다. 지구 역사의 대부분을 지배한 것은 적막(寂寞)이라 정의하는(61 페이지) 저자는 자갈투성이 해변을 걷는 동안에는 첨벙거리는 파도 소리나 자신의 부츠가 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 시간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야생의 고독 속을 홀로 걷는 시간이라 고백한다.(93 페이지)
원자와 분자는 한번 방출되면 무언가 새로운 것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98 페이지) 저자는 이끼에 대해 해박하지 않다. 정착 가능한 자리를 찾아 스스로를 그 안에 밀어넣는(53 페이지) 이끼를 이야기하며 저자는 다양한 형태의 지의류가 존재하지만 광물과 암석에만 단련된 자신의 눈은 몇 종류의 지의류만 식별할 수 있을 뿐이라 말한다.(99 페이지) 지의류는 1년에 0.85mm 정도 자라면 빨리 자라는 편에 속한다.(101 페이지) 1년에 0.025mm 정도 자라는 지의류도 있다.
저자는 전체의 다른 부분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은 없으며 전체는 처음부터 우주의 모든 것이었다고 설명한다.(103 페이지) “기억에 저장된 과거가 풍부할수록 지금 이 순간과의 일치성이 더 강해지며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115, 11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물은 암석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분해하기도 한다. 우리는 끊임없는 재구성의 과정 속에서 탄생했다.(117 페이지) 맞는 말이다. 그러니 이는 앞에서 인용한 “모든 것은 침식에 결국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65 페이지)는 말과 어긋나는 듯 보인다.
저자가 바라보는 식물은 암석의 균열 부위와 틈에서 끈질기게 뿌리내리며 살아가는 존재다.(122 페이지) 지구 내부에 깊숙이 묻힌 채 수백 도로 달궈진 결과 재결정화가 이루어진 석회암은 대리암이 되었고 진흙과 모래는 녹색 편마암과 편암이 되었다.
저자가 지질학을 전공한 것은 우연이었다.(126 페이지) 서핑에 미쳐 해양학을 공부하게 된 저자는 생물학, 화학, 지질학, 물리학 중 하나를 전공한 뒤 집중 공부해야 하는 상황에서 지질학을 선택했지만 별 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다가 “우리가 서 있는 곳은 6,500만년전 지하 15km에 위치했던 마그마의 방입니다.”란 교수의 말에 매료되어 지질학에 큰 흥미를 갖게 되었다.(127, 128 페이지) 저자는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는 흥분이 앞서지만 그보다 더 선명한 감각은 우리가 그곳에 있다는 경이로움이라 말한다.(173 페이지)
대륙은 처음 형성될 때 맨틀에서 올라오는 다양한 마그마로부터 진화한다. 일부 마그마는 지각을 관통하여 성장하고 있던 대륙 표면 위로 용암의 형태로 분출하지만 아래로부터 올라와 대륙의 바닥을 만나게 되는 어떤 마그마들은 너무 점성이 높거나 무거워서 지각을 뚫지 못한다.(187, 188 페이지) 저자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윤곽의 희미한 형체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다.(190 페이지)
“새로운 지점을 살펴볼 때마다 또 다른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고 그것은 지질학적인 이야기에 살을 덧붙여줄 작은 통찰력을 제공한다.”(193 페이지) 이 문장의 핵심 어휘는 '지질학적인 이야기에 살을 덧붙여줄 작은 통찰력'이란 말이다. 나 또한 지질학적 이야기로부터 작은 통찰력을 길어올릴 수 있기를 바라며 책을 읽는다. 책 곳곳에 지구 역사를 헤아리게 하는 글, 그리하여 지질학자의 남다른 안목을 보여주기에 족한 글이 등장한다.
“수천 년 전 하늘에서 내려온 빗물이었던 빙벽은 동쪽으로 몇 백 킬로미터 이어져 있었다. 이 빙벽은 깊숙이 묻힌 상태에서 압축을 받은 뒤 재결정화 과정을 거쳤고 빙상의 거의 바닥까지 가라앉은 다음 기반암에서 암석의 파편을 떼어내 이들을 고운 가루로 분쇄했을 것이다. 그 후 1년에 몇 센티미터의 속도로 아주 천천히 융기해 이제 내 앞에 놓은 절벽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201 페이지)
그러고 보니 그린란드는 지구에서 가장 광활하고 끝없이 펼쳐진 야생 중 하나로 국토의 대부분이 얼음으로 덮여 있다는 부분(25 페이지)을 전해야겠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부분을 보자. ”빙하는 크레바스와 길게 갈라진 틈으로 부서지면서 다시 흘러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이 글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한 ‘마지못한 듯 떨어지는 물‘과 공자가 말한 ‘용감한 물‘을 연상하게 한다. 단순한 의인적 표현이라기보다 대조되는 담론 또는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2미터 높이의 노두(露頭)의 기단에 주름져 있는 암녹색과 황갈색의 두터운 이끼 덤불을 보며 저자는 자신이 진균학자였다면 천국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겠지만 지질학자인 자신은 어리둥절해하며 그곳을 지나갈 뿐이라 말한다.(212 페이지) 물고기 사냥에 뇌가 연결되어 있다는 바다표범처럼 우리도 풍경이나 깨끗한 물, 하늘을 바라보는 저마다의 방식이 있다고 말하는 저자에 의하면 이는 생존과 관련된 진화론적인 지식에 기인한 방식으로 우리는 이처럼 내재된 지식과 교훈의 총체다.(215 페이지)
과학, 아니 사는 것의 패턴이라 할 내용이 ’야생의 대지와의 작별‘이란 장에 나온다. 이 지역 역사에 대한 상충된 해석은 해결되었지만 오랜 역사의 단서를 고려한 결과 새로운 복잡함이 드러난다는 말이다.(217 페이지) 자연의 과정을 분석적으로만 기술하는 것은 부적절한 방법이라는 말(222 페이지)을 기억하자. 우리의 생각과 꿈은 우리가 알고 보는 것들의 표면에서 반사된 것들이란 말(225 페이지)은 참 인상적이고 시적이다. 미래는 계속해서 뼈의 표면에서 탄생하고 있었다는 표현(162 페이지)과 함께 볼 부분이다.
”툰드라 표면에는 새의 뼈와 북극 여우의 두개골, 순록의 뿔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진화론적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는 이 증거는 우리가 가는 곳마다 새하얀 땅 위를 어두운 음영으로 장식하고 있었다.”(162 페이지) 야생을 잃으면 우주에서 정신의 중요성을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을 잃을 것이라 말한 저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어떤 생각을 더할까? 야생은 추론하고 시를 짓고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우리의 능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자유롭게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문턱이다.(226 페이지)
“석류석 덩이가 손가락 끝에 단단하게 부딪히는 감촉을 느끼며 내 손길이 신성모독인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92 페이지)는 저자는 자신이 서 있는 곳,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과 결정이 따뜻한 태양빛을 받고 있는 이곳의 풍경은 너무도 광활해 또 다시 누군가의 손길이 닿거나 누군가 발견하게 될 확률이 극히 낮았다고 생각하며 그런 생각만으로도 이 헐벗은 암석이 그토록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지 정말 기이했다고 말한다.(92 페이지)
저자는 현미경을 통해 암석의 얇은 조각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어떤 인간도 상상하지 못한 맨눈으로 본 적 없는 색상과 형태의 환상적인 기하학에 빠져들어 자기 인식은 사라지게 된다고 말한다.(228 페이지) 물론 단순히 연속적인 사건들을 표로 만든다고 역사가 재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광물이 언제 형성되고 조직이 언제 생기는지 그 연대를 알아내는 방법이 필요하다.(229 페이지) 그에 부합하는 광물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저어콘이다. 복원력이 뛰어나고 지각의 중간층이나 깊은 층에 있는 암석이 경험하는 대부분의 온도와 압력에서 안정적이고 단단한 저어콘은 지질학적 시계다.(230 페이지) 저어콘에는 우라늄이 들어 있다. 우라늄은 일정 속도의 방사성 붕괴를 통해 납, 토륨, 헬륨으로 분해된다.
저자는 그을린 머리카락 냄새, 사막의 모래 냄새를 풍기는 (깨진) 암석에 대해 이야기한다.(97, 235 페이지) 이 암석은 적어도 지표 60km 아래에 묻혔던 존재다. 이 암석은 저자가 그토록 강조하는 야생의 진면모를 느끼게 하는 진객(珍客)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전문 영역의 책이지만 술술 읽힌다. 저자의 인문적 지향성과 뛰어난 글솜씨 덕이리라. 현장을 돌아본 살아 있는 여정이 가장 중요한 몫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저자가 섭섭해할까? 어떤 경우든 적극 추천한다.
이 책은 지질학자인 윌리엄 글래슬리가 본인의 그린란드 탐사에 대해 쓴 글이다. 탐사 에세이라니. 그것도 그린란드 북극.
꿀잼의 냄새가 느껴졌다. 오지 탐험은 로빈슨 크루소나 캐스트 어웨이, 아니면 뭐 버티컬리미트 등등 흥행보증 스펙타클 쇼 잔치니까.
근데 걸리는 점은 하필이면 과학자다. 내주변 이과 특: 노잼에 자꾸 원자가 어쩌고 열역학이 어쩌고 뭐가 뭐에 대한 무슨 반응으로..
암튼 소설이 아니지만 서사는 있다. 주인공이 과거 동료들이랑 판구조론 상 지층 지질 구조 변화와 그 역사에 대한 그린란드의 과거 탐사 연구한 논문이 있었던가 했는데 얘들보다 후배격인 후발주자 애들이 저거 사진보니까 가정 자체가 오류라고 학술지에서 디스해서 주인공 크루가 명예 실추, 무엇보다 친구가 마상을 크게 입음. 서사는 복수극이지. 그린란드 지질학계 재탈환을 위해 10년인지 20년인지 만에 세친구 다시 만나서 재탐사를 떠남. 이제 거기서 빼박 학술 증거를 찾아야 하는데.. 과연 이들은 그린란드 지질학 통의 자리를 되찾을수 있을까?
글래슬리의 글은 많은 순간 과학적이면서 동시에 철학적이고 문학적이라 느꼈다. 이는 내가 현장에 함께 하는 느낌을 받으며 동시에 글쓴이의 지식과 사유 과정에도 동화되는 몰입감을 주는듯 했다.
동료들과 해상에서 유빙의 신기루를 볼때 저자가 느낀 마술적 순간을 표현하는 장면과 더불어 내게 최고의 압권은 암석 샘플을 채취하는 장면인데
별안간 그슬린 머리카락, 뜨겁게 달군 금속, 사막 먼지 같은 희미한 냄새가 샘플 표면에서 대기로 퍼져 나갔다. 내가 암석을 망치로 깨는 순간 암석이 노두의 얼굴에 꼭 붙어 있을 수 있었던 화학 결합이 깨지고 말았다. 작은 결정에 금이 갔고 알갱이의 경계가 갈라졌으며 밀도 높은 암석에 균열이 생겼다. 결정구조에 갇혀 있던 원자와 분자가 20억년 만에 처음으로 깨끗한 공기와 따뜻한 북극 태양 광선에 노출되었다. 변위되고 깨져버린 초미세한 입자와 무기 분자는 균열된 부위에서 떨어져나와 보이지 않는 원자의 장단에 맞춰 공기중에서 춤을 췄다. 부드러운 바람의 예측 불허한 변화에 맞춰 움직였다. 해방된 파편은 대기중으로 퍼져나가 내얼굴로 다가오더니 결국 나의 기도에 자리한 감각 기관에 영향을 미쳤다.. (중략)
이 깨진 표면은 호기심에서 비롯된 폭력적 행위로 이세상에 탄소와 칼슘, 마그네슘 원자를 쏟아냈다. 그 암석을 만든 모든 것, 평소라면 아주 느린 침식을 통해 바다로 흘러들어갔을 모든 것이 일순간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그 암석층 원자는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분자의 구성요소였다. 소듐에서 셀레늄에 이르기까지 모든것이 폭발해 바람에 실려갔다. 이 모든 성분의 화학반응이 낳은 뉴런과 시냅스의 뒤엉킨 네트워크 속에 생각과 상상력이 떠다녔다. 꿈의 잠재력이 그곳에, 내가 냄새를 맡고 있는 그 암석의 원자 안에 있었다.. (중략)
원자와 분자는 한번 방출되면 무언가 새로운 것의 일부가 될 수 밖에 없다. 한떄 속했던 광물 구조와는 완전히 다른 물질이다. 이 작은 샘플을 추출하는 파괴적인 행위는 미약하게나마 해방이자 창조 행위로, 의도적은 아니지만 미래에 작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저자는 자신의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사물과 현상을 단순 분류 측정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다른 근원적 물음과 이유에 대해 사유하는 매개로 작동시키고 이를 자신의 문학적인 필체로 묘사한다. 때로는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적이고 이의 시적 변용은 루크레티우스가 생각나기도 했다.
이밖에도 인상깊은 장면들이 많지만 적으면 스포니까..
자연에 대한, 우주 안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성찰, 인류 문명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고찰 등이 매 순간마다 저자의 생각을 차지했고 이것들은 탐사 과정의 서사 속에서 무겁거나 지루하지 않게 사건들과 어우러지며 진행된다.
처음엔 그린란드 빙하지대의 암석을 연구하는 지질학자의 에세이라고 해서 눈부신 태양빛을 반사하는 순백의 얼음산과 푸른 바다를 상상했다. 이름은 생소하지만 “존 버로스 상”을 수상했다며 표지에 멋진 메달 사진까지 붙여놓았으니 내용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제목이 좀 고상해보였는데 원제와 살짝 다르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 A Wilder Time. “야생”과 “근원”은 분명 다른 의미인데 왜 이런 제목으로 출간되었을까? 그리고 그린란드라는 “공간”에 간다는데 왜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을까? 궁금해졌다. 책장을 열어보니 기대와 달리 웅대한 자연의 풍광을 담은 컬러사진은 한 장도 없고, 그린란드의 지도와 지질구조가 까끌까끌한 종이 위에 담백한 글씨체와 함께 몇 장 박혀있을 뿐이다. 처음엔 비용 절감을 위해 번역본에서 사진을 뺀 것은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책장을 넘겨 “감수의 글”을 읽어 내려가자 이 책에서는 더이상 현란한 그림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얼음으로 덮인 땅에서 드문드문 노출되어 있는 돌을 찾아 헤메는 사람들이 있었다”로 시작하는 감수자 좌용수 교수의 글은 장대한 서사시의 서문을 열듯 빙하 속에서 머리를 내민 돌맹이 하나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해주는지 소개하며 저자 윌리엄 글래슬리의 머리말로 연결한다. 감수자는 “야외 지질조사의 여정을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니 매우 놀라웠다”며 저자의 글에 감탄하는데, 나는 정제된 표현 속에 겸손함까지 느껴지는 감수자의 문장력에 감탄하여 감수의 글만 두 번 반복해서 읽었다.
왜 그린란드인가? 그린란드의 빙하가 녹으면 빙하 아래 묻혀있던 기반암이 노출되는데, 풍화되지 않은 이 암석이 땅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자와 두 명의 동료로 구성된 탐험대는 15년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대륙의 형성과 이동의 흔적을 보여줄 단서를 찾아 탐험했고, 그 과정에서 경험한 야생을 <근원의 시간 속으로>에서 깊은 사색의 언어로 풀어냈다.
처음 그린란드에 도착했을 때, 저자는 문명과의 단절을 절감하며 “시원섭섭한 우울함”을 겪었다.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TV 모니터를 통해 내가 바라본 빙하지대는 경탄할 만한 아름다움을 자랑하지만, 현장에 생존과 탐구를 위한 최소한의 장비와 함께 남겨진 저자는 “야생의 아름다움에 애정 따위는 없었다”고 한다. 24시간 태양이 떠 있는 백야 아래 “하루”라는 시간은 무의미해지고, 자신이 밟고 있는 빙하가 21세기의 것인지, 아니면 원시 빙하기에 들어와 있는지도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돌로 둘러싸인 딱딱한 세상을 부드럽게 감싸안은 포근한 벨벳”같은 툰드라를 걸었을 때, 자신은 “오후의 산들바람보다 존재감이 없었다”고 말한다. 지성으로 이 세계를 바로 이해하고 있다고 여겼던 학자 글래슬리는 모든 소리가 광활한 야생의 정적 속에 묻혀버린 땅 위에서 비로소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눈물을 흘린다. 야생이 적막한 이유는 조용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은 우리의 감각기관이 감지할 수 있는 한계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자연 앞에서 더욱 겸손해진 학자의 탐구는 암석을 분석하며 태고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진화적 관점에서 돌맹이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들의 탐험 목적은 알프스나 히말라야 산맥 형성과 같은 지각 변동이 그린란드에서도 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고등학교때 배운 나의 지구과학 지식으로는 모두 다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이들의 탐사 과정과 연구성과를 따라가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놀라운 것은 자세한 그림과 도표가 아니더라도 이들이 증명해야 했던 과학적 논점과 빙하지대의 풍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툰드라에 손가락을 깊숙이 찔러 넣어 토양의 질감을 느낄 때나 신기루 같은 지진현상과 피오르 바다 청어들의 역동적인 생존의 몸부림을 목격할 때, 그리고 문명세계로 돌아와 샤워실로 가는 동안 느끼는 폐쇄공포증상 까지도 생생하지만 차분하게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며 또 하나 감탄한 것은 일관된 어조와 글씨체였다. <근원의 시간 속으로>는 감수자와 저자, 그리고 번역가 까지 마치 한 사람이 쓴 것 처럼 단정하고 일관된 어조를 유지할 뿐 아니라 글씨체도 그에 딱 어울리게 선택했다. 번역도 잘 된 것 같다. 한자가 병기되지 않아 이해되지 않는 단어들이 아쉬웠지만, 원문은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하지 않고 우리말 문장 그대로 가슴에 담아두고 싶었다. 저자의 생각은 매우 깊어서 두세 번 다시 읽어야 문장의 멋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부분도 있었고, 때론 은유가 심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다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마음으로는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은 240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이었지만 빨리 읽어낼 수 없었다. 저자가 이끼 낀 바위들과 툰드라의 보드라운 땅을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내딛었듯이, 저자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신중하게 선택되고 정제된 표현들로 응결되어 강한 인상을 남긴다.
이렇게 책을 마무리할 때 쯤 처음에 품었던 의문이 풀렸다. “A Wilder Time”을 왜 “근원의 시간 속으로”라는 제목으로 표현했을까. 그가 연구한 그린란드의 암석은 그 땅이 처음 생기기 시작할때 부터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가 찾는 모든 단서들은 오랜 시간에 걸친 이야기를 품고 있었고, 그가 목격하는 야생의 생명과 자연현상들도 그 암석이 품은 이야기와 함께 따라가다 보면 모두 근원의 시간으로 수렴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니 이 책에 사진 한 장 없는 이유 또한 알게 되었다. 저자는 야생의 “공간”으로 들어가 “시간”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