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현 저/이슬아 그림
신영복 저
최종엽 저
김범준 저
한동일 저
박혜윤 저
차라투스트라라는 성인에 가까운 인물이 인세에 머무르면서 깨달음을 공유하고 때로는 초월적 경험을 한다는 점에서 성서가 떠올랐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성인들과는 정반대의 가르침을 설파한다. 신의 죽음이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주장했던 바는 흔히들 익숙한 것 같다. 나아가 그의 입장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도 종종 봤다. 나도 한때는 그랬다. 전지전능한 신이 선하기까지 하다면 어째서 세상은 이 모양 이 꼴이며. 신을 닮게 창조되었다는 인간은 왜 종족을 가리지 않고 다른 개체를 이용하고 괴롭히고 죽이는지.
그런데 요즘은 반증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의심할 만큼 여유가 있진 않아서 굳이 고민하지 않는다. 당연히 결론내지도 못했다. 너에겐 너의 신이 있겠거니 할 뿐 그의 신에게 호기심을 갖지 못한다.
음. 그래도 찜찜하다. 유사과학과 비과학 중엔 사실 과학의 증명이 아직 개척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유사과학적 상상을 하기도 한다. 난 타로를 믿고 사주에 혹한다. 그러면서 신은 안 믿는 거 그것도 웃기잖아....... 이 주제는 언제쯤 후련하게 결론을 낼 수 있을까? 최소 사후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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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니체 정도 유명해지려면 보통은 아닌 것 같다. 통찰력이 좋긴 무지하게 좋았다. 선이 선일 뿐이고 악은 악일 따름인 사회에서 인간의 원죄와 관련된 악한 본성이 건강하다고 말하는 것도, 연민의 정 즉 이타심은 본질적으로 개인의 안위를 고려하는 이기적 선택이라고 말하는 점도 흥미로웠다.
다만 통찰력에 비해 결론이 좀 허무했다. 보편적인 절대선이 없다고 해서 모두가 개인의 선을 추구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 사이 어딘가 공감 가능한 개인과 사회의 합의가 있을 수 있다. 극단주의적 성향이 없잖아 있어 보였다. 결국 자신도 세상을 알게 되는 과정에서 인간적이고 다소 편파적인 세계관을 활용하는데, 그건 어쩌면 불안하고 우연적인 세상을 사는 인간의 본성일 텐데, 다른 인간들이 그래왔던 것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는 것도 안 맞았다.
이전에 읽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에 감명을 받고 그 책보다 더 자세하게 서술해놓은, 다른 저자의 책을 구매해서 읽었다.
각자 평생을 두고 읽을 인생 책, 바이블이 하나씩 있다면 나에게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그것이다.
에너지 보존법칙에 근거하여 니체가 발명해낸 '영원회귀'라는 개념. 내가 현재 지적 수준으로 이해한 '영원회귀'를 설명하자면, 우리 삶이 겉모습만 다를 뿐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인생을 살며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관계'의 영원회귀다. 관계 맺는 것이 영원히 회귀하는 것, 반복되는 것이라고 인식한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지나간 만남에 미련을 남기고 앞으로 올 만남을 두려워하는 일이 멈춰진다. 왜? 어차피 반복될 일이니까! 나에게 계속 '관계'라는 것이 던져질테니 내가 할 일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전보다 나은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면 되는 것이다. 다시 시도하고 도전해볼 수 있는 기회가 무한히 제공되는 것이다! 오락실 게임으로 따지면 동전이 무한대로 제공되는 것이다!
그대 앞에 수천만번의 기회가 제공될텐데 한 번 실패하고 넘어졌다고 좌절하거나 슬퍼하지마라.
지금 삶이 권태로운 이유는 무엇인가? 삶은 영원회귀하고 있는데 그 속에 있는 내가 아무런 도전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삶이 영원회귀한다면 그것을 충분히 즐기고, 무엇을 시도하다가 넘어진다면, 다시! 좌절한다면, 다시! 어설펐다면, 다시! 하면 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다시! 할 것인가? 내가 오락, 쾌락에 꽂혀있다면 영원회귀의 삶 속에서 쾌락만을 계속해서 추구하며 살면 되는 것인가? 여기서 니체는 또 위대한 개념을 만들어낸다. '위버맨쉬'. 자기 파괴와 창조라는 과정을 거쳐 이전보다 뛰어난 인간이 되는 것을 말한다. 자기 파괴란 무엇인가? 나의 생각, 행동, 삶의 양식, 가치관, 철학 등 내 주위에 흐르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깨부수고 철저히 망가뜨려 폐허로 만든다. 그 폐허에 '창조'라는 새로운 씨앗을 심어 내가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자기파괴와 창조는 어디에서 발현되는가? 바로 열정이다. 근대 철학자들은 열정이라는 감정을 숨기기 급급했다. 왜? 그들이 볼 때 열정, 감정이라는 것들은 철저히 이성 아래 조절되어야할 하찮은, 열등한 것들이고 인간을 다른 동물보다 위대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이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니체는 그 생각을 정면반박한다. '자아'가 아니라 '자기'다. 우리는 신체로서 존재하고 이성이라는 것은 신체가 살아가는데 사용하는 도구 중 하나일뿐이다. 이중섭의 '황소'가 역동적인 이유는 이중섭의 생각이 역동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린 손이 그림을 역동적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예쁜 것이 무엇인지, 맛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더 나은 인간이 되겠다는,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내 속의 열정! 그것이 나를 파괴하고 다시 창조한다.
부모님 세대는 속 터질 일이겠지만 니체는 결혼도 미루라고 한다. 니체에게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거나 보살핌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함께 하는 동반자로서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상대방이 더 높은 인간이 되어주도록 만드는 관계를 맺는 것이다. 상대방이 더 높은 인간이 되도록 만들어주려면 내가 충분히 채워진 사람이어야한다. 그리고 그렇게 채워진 사람끼리 만났을 때, 그 사이에 태어난 아기는 부모님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 인류의 '위버맨쉬'가 일어나는 것이다.
;부싯돌로 불을 피우던 인류가 이제는 달을 개척하고 우주의 신비를 풀려고 한다. 이 모든 발전은 평등이라는 안락 속에 '자기 생존'이 인생의 목표인 사람들이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나귀의 삶처럼 나를 억압하는 것에 순응하고 삶을 괴로워하고, 만질 수도 없는 미래의 행복을 꿈꾸며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용기, 끝없는 자기 파괴와 창조, 자기 혁신을 부르짖었던, '자기 발전'이 삶의 목표였던 '위버맨쉬'들이 이뤄낸 것이다. 안주한다면 삶은 편안하고 안정적이지만 평생을 나귀로 살아가는 것이고 거부하고 깨부수고 창조한다면 '위버맨쉬'가 되는 것이다.
예전에 유퀴즈 프로그램에 존리 대표님이 나와서 한 얘기가 있다. 부자가 되는 방법이 무엇인가요? 라는 질문에 존리 대표님이 '어제보다 부자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좋은, 뛰어난 인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면 된다.
나를 억압하는 것들에게 웃어주자! 내가 하는 것들과 함께 춤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