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급진적인 자기방어와 책임 없는 의존이라는 불안 앞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유형의 모습은 에고의 강도가 서로 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뱀이 자기스스로를 먹는 것처럼 근본적으로 하나의 형상, 반복되는 고통과도 같다. 모두 변화를 거부하는 불안장애의 거울과도 같은 단면일 뿐이다. (-17-)
이것은 넷플릭스가 조직을 운영하는 원칙에 대해 '통제 대신 맥락을 공유'함으로써 구성원들이 자율적이고 능동적으로 회사가 추구하는 방향성에 맞는 의사결정을 내리고 행동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맥락을 답은 강령이다. 분명 한 가지 상황이 아닌 여러 상황에 적용할 수 있되 구성원에게 맥락을 '왜' 공유해야 하고 '어떻게' 공유해야 하는지,그리고 맥락 공유에 대한 예외는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 맥락이 담겨 있어서 잘못된 해석과 오용을 방지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76-)
월가가 아마존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아마존이 돈 벌 생각이 없다는 것도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위험을 감수하고 과감한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월가는 아마존이 새로운 시도는 하지 말고 전자상거래 분야에 집중하면서 다른 일반적인 회사처럼 매달 꾸준히 수익을 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마존은 새로운 형태의 회사입니다. 우물 100개를 파면, 50개는 실패하고 40개는 그저 그런 결과를 보여 주고 나머지 10개가 향후 20년을 먹여 살릴 이익을 내는 거죠. (-155-)
우리가 일련의 내러티브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바는, 결국 모든 문제는 곧 '인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만약 인류가 비관적 운명에 처한다면 그것은 머지 않아 초지능이 이루어져 그들에 의해 우리가 속박받고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의지에 의해 때로는 의도한 혹은 의도치 않은 복잡계 상호작용의 산물로서 주어지는 것일 터이다.동시에 인류가 여전히 희망적이고 낙관적이라 해도 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196-)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에 다르면 인간은 선천적으로 '도덕적이다'. 인간의 도덕적 직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직관적으로 판단해서 그것을 추구하는 것-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자신이 속한 집단의 사회 문화적 기류에 민감하게 상호작용하면서 성장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은,주로 이 형태가 개인적 도덕관을 바탕으로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속감을 느끼는 집단 속에서 집단적 올바름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235-)
다큐멘터리는 소셜 미디어가 구현하는 기술적 '초개인화'는 자칫 우리를 정신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음'을 경고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주체적 의지와 관계없이 마케팅, 설득의 목적이 다분한) 초개인화 메시지나 영상을 접하다 보면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주장도 맞는 말처럼 들린다. 이런 개인이 많아지면 결국 사회는 분열된다. 2016년부터 시작해서 올해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미국의 '피자게이트'(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피자가게 지하에서 아동 성매매 조직을 운영했다는 음모론)는 물론, 러시아가 페이스북 가짜 계정을 개설해서 미국 대선에 개입하려 했다는 정항, 2020년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 19 에 대한 음모론까지, 가짜 뉴스는 어느덧 진실이 되고 미디어는 질적 저널리즘에서 황색 저널리즘으로 변질된다. 트리스탄 해리스는 "소셜미디어는 사람들의 판단력을 잃게 만들고, 아무도 진실을 믿지 못하게 한다.이는 민주주의를 공격한다" 라고 경고한다. (-271-)
처음 포드사에 의해서 ,자동차가 대량생산되었을 때, 인류는 환호하였다.말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고, 곧바른 길을 쉽게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심리 때문이다. 그러나 곧 인간은 실증을 내게 된다. 포드 자동차에 대한 붚평, 불만이 쏟아졌고, 한계를 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자동차에 신기술이 100년 내내 개발되었던 것은 인류의 발달과 자동차 기술의 발달에 시사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새로운 변화, 컴퓨터가 등장하였고, 인터넷이 등장하게 된다.
인터넷으로 인해 우리는 백과 사전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두꺼운 책이나 사전을 들고 다니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다.그 어느 때보다 많은 정보를 내 손안에 쥐고 잇었고,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응용프로그램이 생겨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데이터가 수집되고, 그 수집된 데이터를 가공 , 재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과거 대량화는 가능했지만, 개인화가 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할 대, 지금은 기술적으로 개개인에 대해서, 각각 초개인화가 생겨남으로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소비자 각각에 대해서, 맞춤형 마케팅, 홍보가 가능하고, 소비자마다 취향이나 추구하는 것, 원하는 것이나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기술의 발달이 인간을 초개인화할 수 잇게 되었다는 의미와 같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또다른 문제를 차지하게 되는데, 인간을 하나의 소모품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물질 만능주의와 생소주의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비자의 성향에 대해 잘알게 됨으로서,그들의 원츠와 니즈,기대심리까지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그러면, 홍보 마케팅,여론조사 업체는 얼마든지 그 초개인화된 데이터를 이용하여, 목적과 수단으로 활용이 가능해지고, 얼마든지 악용이 가능하다. 어떤 개인에게 가짜뉴스를 뿌리고, 보이스피싱이 가능한 시대에 살아가게 된 결정적인 원인으로, 초개인화에 있었다. 정보의 부재와 초개인화로 인해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정보로 인해 제도적 불이익이 현실화되고 있다. 그리고, 법적 불이익도 동시에 진행된다. 저자는 바로 이 부분을 짚고 있으며,우리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냉소적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개개인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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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후원을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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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개인주의 / 한스미디어 / 상효이재 ]
인간 주체적인 힘
. 과학기술, 혹은 다른 무엇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인간은 그것에 온전히 의지할 수 없다. 조직의 지속 가능한 생존 혹은 성장은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의 주체적인 힘에 의한 것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성선설과 성악설
.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흥미로운 주제로 다뤄졌다. 인간 본성에 대한 대표적인 대립 구도는 성선설과 성악설이다.
성선설
. 성선설을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다는 관점.
. 맹자는 인의예지를 드러내는 사단은 천성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주장했다.
. 루소는 인간 본성은 본디 선하나, 문명과 사회 제도의 영향을 받아 악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성악설
. 성악설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는 관점.
. 순자는 루소와 반대되는 주장을 한다. 인간의 성품은 악하나 인간이 노력함으로써 선을 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 홉스는 자연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라 가장, 인간의 본성이 악함을 추론하였고, 쇼펜하우어 역시 죄악은 인간 본성에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에 제거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인간과 조직 그리고 경영과의 트라이앵글을 어떻게 원만히 풀어갈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논하고 있다. 가장 자기다운 인간,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저 뭔가에 홀리거나 쫓기듯,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어느덧 나이가 들었구나, 아이들이 커서 성인이 되고…. 아 나의 잃어버린 세월이여를 반복할 때쯤 되면, 그제야 나는 누구지, 누구였더라 라는 생각이 찾아온다. 아무튼, 자기다운 인간으로서 정체성과 지금 몸담은 내 삶의 터전의 한 축인 조직, 그리고 그 조직의 경영이라는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초개인주의
초인+개인주의, 니체의 초인으로서의 개인을 말하는 것인가?,
니체가 말한 초인이 아닌 슈퍼맨으로 인식한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물리적으로 극복, 초월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우선 실마리가 될만한 대목을 보자. 기술의 진보는 개인의 취향, 개성까지 고려하여 맞춤화된 제품, 서비스를 쉽게 찾고, 경험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기업의 경영 방향 역시, 이런 추세에 따라 초개인화 전략, 고객을 집단으로 보지 않고, 개인으로 한 명 한 명에게 차별화된 유혹이나 제안을 할 수 있는 것이 ‘초개인화 전략’이다. 그런데 현상은 반대로 초 개인화 기술의 본래 의도와는 달리 사람들의 개성과 주권을 빼앗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인공지능 기반 기술은 개인이 광고를 많이 볼수록 돈을 더 버는 구조의 기업들 때문에 어느덧 인간 ‘상품’으로 전도됐다고…. 초개인화의 가장 근원적인 한계는 기술중심이라는 점이다. 이 기술 중심적 철학은 본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인간을 선택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 만들어버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다시 소외된다. 마치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인간의 조건’에서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는 노동자의 모습처럼 말이다.
자 그럼 시대의 피할 수 없는 변화에 맞춰 인간은 어떤 인간이기를 추구해야 하는가?
이 책은 니체의 예를 가져왔다. 인간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에 비유하면서, 너는 ~해야 한다는 당위, 명령과 복종의 질서이며 이를 따르는 인간은 낙타다. 니체는 인간은 낙타에서 벗어나 사자로 나가야 한다고…. 사자는 무엇을 부정하고 저항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당연히 새로운 가치 창조를 위해서다. 주체성 회복을 위해서는 자율을…. 그리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자유를 추구할 수 있지만, 가치 창출은 못 한다. 그 몫은 어린아이의 몫이다. 이것이 초개인으로 가는 길이다. 가장 자기다운 인간으로…. 생존의 핵심은 기술보다 인간이다. 니체에게 어린아이는 순수긍정, 선입견도 편견도 없이 새로운 시각을 세상에 투영할 수 있다. 삶을 무거운 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놀이, 유희로 통합할 수 있다. 끊임없는 변화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적응할 수 있다.
우리 스스로가 자기다운 인간인 초개인을 추구하는 것이다. 개개인성의 주체성을 되찾고, 그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유연하고 성숙을 위한 노력을 통해 자기 자신을 넘어 다른 이와 협력하고 연대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호모 디그누스의 초개인주의 경영
초불확실성 시대를 건너는 신뢰와 존중의 과학적 관리법
호모디그누스는 존엄한 인간이다. 끊임없이 변화하여 예측조차 할 수 없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단순화의 오류와 그로 인한 본말전도를 겪지 않기 위해서는 ‘존엄’을 되찾아야 한다. 그런데 왜 존중은 다차원이어야 하나라는 의문이 든다. 인간의 생애과정을 단순선형으로 본다면 너무 단순하다. 존중이라는 것 또한 사회환경과 맞물리고, 여기서 생겨나는 다양한 경로,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존중을 복합적인 관념으로 보는 이상, 그 의미를 풍부하게….
다음의 10가지를 기억해두자. 우선은 존중은 자기 자신에게 먼저 베풀어야 하며, 존중은 배우고 성장해 애쓰는 마음이다. 존중은 겸손이다. 그리고 존중은 다른 이의 처지와 맥락을 능동적으로 이해하는 태도다(공감 능력), 존중은 진정성을 가지고 용기는 내는 것이다. 존중은 의미하는 대로 말하는 것이다. 존중은 무례와 폭력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존중은 시스템이다. 존중을 넛징하라, 존중은 새로운 권위다.
존중이란 말을 의미는 이렇게 다양하면서도 다층 위계다. 하지만, 어느 것이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것은 그 안에 인간의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고 기술중심이 아닌 인간 존재 그 자체가 중심이 돼야 한다. 비교적 명쾌하고도 쉬워 보이는 이런 설명들을 하나씩 톺아보면 꽤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고 느낄 것이다.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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