썬킴 저
김동섭 저
낸시 아이젠버그 저/강혜정 역
<역사에 없는 사람들의 미국사>라니, 제목만으로도 기대가 되었다. 대서사 뒤로 숨겨진, 가려진, 지워진 소서사를 찾아 꼭꼭 음미하면 섧게 잊혀진 이들이 웃으며 돌아오는 것 같달까. 타고난 연민덕인지 내 스스로 마이너 인식이 강해서인지 여하간 나는 특히 요즘 더, 알려지지 않은 개개인의 진실한 삶에 주목하고 있다. 이 책은 읽기 전 제목이나 소개가 주는 인상, 기대 그 훨씬 이상이었다. 몇 장(chapter)을 읽고는 작가 소개를 다시 읽고, 몇 장을 더 보고는 옮긴이 소개를 찾아 곱씹고 마지막 옮긴이의 말까지 읽고 책을 덮고서는 '아!' 나의 감동이 괜한 호들갑이 아니었구나!
<역사에 없는 사람들의 미국사>는 로널드 다카키의 <다문화 미국사를 비추는 또 다른 거울>이 더 넓은 독자층에 읽히도록 내용을 추려 그의 사후에 새로 펴낸 책이라 한다. 미국의 민중사를, 다양한 이주민 집단의 역동을 기조로 쓴 독보적인 책이나 출판 시장의 불황과 원저의 적지 않은 분량, 국내 대중에게 생소한 저자 등 여러 가지 어려움 등의 상황을 고려하여 원저에 앞서 각색판이 번역 출간된 드문 사례.
다카키가 생전 공교육 교육자들을 위한 저술과 연수도 꾸준히 진행하여, 교육 현장에서 미국사의 접근 방식이 크게 바뀌었다고 인정받고 있다 하고, 번역이 본업이 아닌 옮긴 이의 애착으로 이 책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을 말미에 알게 되니 원저자, 옮긴이, 출판사 모두에게 경외심이 인다. (메모: 로널드 다카키, 오필선, 갈라파고스)
#1. 다문화 아메리카
미국을 짬뽕이니 잡채니 비빔밥이니 많이들 말 했지만, '막연히' 안 것이었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진짜로 안 게 아니었다는 것을 책을 단 몇 장 넘기고 알게 되었다. 내가 알았던 것은 미국에 정착한 사람은 유럽의 이민자, 미국은 곧 백인이라는 짧은 거대 서사 뿐이었다. 1951년, '오늘의 미국인을 있게 한 위대한 이주민들의 서사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역사학자 오스카 핸들린의 <쫓겨난 사람들>은 퓰리처상을 수상했지만 그 대상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에 그쳤다. 저자 다카키는 1993년 이 책(원저)을 통해 아프리카와 아시아, 중남미, 북미 원주민까지 포함한 미국사를 그려냈다.
책은 영국의 아일랜드 정복에서 시작했다. 1600년대의 영국의 북아메리카 이주가 시작되기 전, 아일랜드로 인해 위험에 직면할까 경계하여 먼저 식민지화 한다. 영국은 아일랜드와 북미를 '야만'으로 낙인찍고 원주민을 소탕한다. 아일랜드인의 이민 뿐 아니라 십여개의 챕터를 통해 이민사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역사 속에 등장했던 민족, 인디언, 개척을 진두지휘한 장군, 특별히 저항하고 일어났던 노동자 개개인이 많이 등장한다. 그 때마다 개인의 발언, 일기 등이 함께 소개되어 소서사를 알게 해 주는데 후일 자서전 등의 형태로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한 덕분이다. 챕터별로 다양한 사람과 책이 소개되어 그 또한 읽을 거리인데 철저한 고증에 기초하고도 개개인을 직접 만난듯한 현장감 있는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19~20C에 걸쳐 세계 각국에서 전쟁을 피해, 먹고 살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중국인은 금광이나 철도 노동자로 가서 후에 농장과 공장의 노동자가 되었다. 400만 명에 달하는 아일랜드인이 (영국의 침탈로) 집을 잃고 굶주림에 내몰려 미국으로 건너 가 종교적 차이로 적개심과 편견에 고통받았지만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은 아시아계 이민자와 달리 백인이라는 이유로 비교적 미국 시민이 되기 쉬웠고 교육의 기회도 열려 1900년경에 는 중산층에 진입할 수 있었다. 유대인은 러시사의 박해를 피해서, 무슬림은 전쟁을 피해서 미국으로 갔고, 멕시코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국경이 변경됨으로써 그 지역민은 변방의 미국인이 되어 버렸다. 비슷하게 푸에르토리코 사람들도 자신의 의지에 반해 미국 시민이 되었고, 식민지가 된 푸에르토리코에서는 의회에서 통과된 법에 따라 미국 시민권은 부여받았으나 대통령 선거는 할 수 없는 신세였다. 아프리카에서 노예 신분으로 팔려 온 흑인은 철저히 백인 사이에서 재산 취급을 받으며 처참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북미 원주민의 경우는 또 다른데,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이 땅에 살고 있던 토박이였는데 '야만인'이라는 낙인과 함께 무력에 의해 터전을 빼앗기고 변방으로 내쫓겨야 했다.
백인들은 특정 한 인종의 강세를 원치 않았고, 더 싼 임금의 노동을 원했기 때문에 이민자들 대부분은 노동자로서 착취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 간에도 서로 경쟁하며 다투어야 했다. 이주민 대부분은 개척지인 미국에서 임시 노동자로서는 필요한 존재였지만 영주민 신분으로는 환영받지 못했다. 의회로부터 때로는 입국금지법으로 때로는 강제송환조치로 때로는 혼혈결혼금지 등 다양한 방법으로 철저히 차별받았다.
#2. 미국사를 통해 우리 역사를 보다.
흑인 하인은 재산 취급을 받았다. 그들은 법적으로는 아직 노예가 아니었으나 노예와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 오래지 않아, 노예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도록 법이 바뀌었다. 1661년 버지니아 의회는 흑인에 대한 종신 예속, 다시 말해 노예제를 인정하는 법을 통과시켰으며 8년 후 또 다른 법에서는 흑인을 재산으로 규정했다. 노예의 제도화는 이렇게 북아메리카에서 뿌리를 내렸다.
p.52. < 역사에 없는 사람들의 미국사> 중
처음에는 '의회가 노예를 합법화 했다고? 법이 이렇게 정의롭지 못할 수가 있나?!' 의아함과 반감이 올라왔는데 곧 이어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노비법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아시아계 이주민 이야기에 짧지만 한국도 등장하는 책이기도 했지만 어쩐 일인지 두꺼운 미국사를 읽는 내 우리 역사를 비추어 보는 경험을 했다.
흔히 서구 열강이라 불리는 아일랜드, 이탈리아, 또 세계 강국의 대열에 선 일본, 중국 등의 이주민들이 내가 한 번도 상상치 못했던 열악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인지, 학창시절 가장 많은 외침을 받은 나라가 우리라거나 일본의 침략을 끊임없이 받았단 것을 세뇌당했기 때문인지 그동안 나는 일제 강점기이라는 우리 비운의 역사가 '한(恨)'이라는 특수한 민족성을 만들어 낼 만큼 세계사 안에서 이례적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영국 스톤헨지 관광 버스에서 만난 아일랜드 관광객, 영국과 아일랜드는 사이가 안 좋다 말할 때 살짝 전해졌던 그늘, TV에서 반미정서를 말했던 어느 멕시코인에게서 뿜어져 나온 열기까지 이해하지 못한 채 내 켠에 쌓여있었던 정보가 처리되는 편안함을 느꼈다. 아일랜드와 영국, 멕시코와 미국 사이에 있었던 사건을 고작 책 몇 장으로 보았을 뿐인데 한국과 일본의 역사가 세계 유일의 특수가 아닌 보편이었다는 것이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 이해가 주는 안정감이 있었다. 지배와 정복과 개척의 역사를 인류의 보편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지만, 생존의 본능이 치열했던 시간들이 누구에게나 있었다는 것, 그 안에서 각자 지난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살아있는 역사'와 '삶'을 보게 했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한국인과 같은 아시아계 이주민이 세탁소, 가게, 식당을 하는 사례가 많은 이유였다. 아시아인 특유의 부지런함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주민의 역사속에서 자영업의 선택은 노동 시장으로부터의 배척과 관련되어 있었다.
광산과 공장과 들판을 가릴 것 없이 인종적 적대감이 들끓자 수천명에 달하는 중국인은 자영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가게와 식당, 특히 세탁소를 개업했다. 세탁업은 다른 업종에 비해 수월하고 개업에 드는 비용이 덜했기 때문이다. 물을 데우는 난로와 세탁용 수조, 건조 공간, 잠잘 공간 그리고 간판만 있으면 충분했다. 심지어 영어를 썩 잘하지 않아도 일을 하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중국인은 어쩔 수 없이 이 직종을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중국에서라면 세탁업은 남자들이 하는 일이 아니었겠지만 미국에서는 그나마 그들이 맡을 수 있는 몇 가지 일 중 하나였다. 세탁업을 한다는 것은 제한적으로나마 고용 가능성이 열려 있던 노동 시장에서의 퇴출을 의미했다.
p.138. < 역사에 없는 사람들의 미국사> 중
또,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조선의 노비로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군이 되어 돌아온 이병헌의 역 유진초이는 굉장한 역사적 상상의 산물이라 생각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이와 같은 수많은 개인의 역사가 있었음을 알았다.
다양한 민족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겪은 차별의 역사를 순차적으로 읽으면서, '이 책은 이렇게 수난당하는 여러 민족의 이야기를 엮은 것으로 끝나는 걸까?'내심 걱정했는데, 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면서 전개에 변화가 생긴다.
미국 사회에서 인정받고자 미국인이지만 사실상 이방인이었던 이주민들은 (유진초이처럼!) 입대를 자원했고, 노동 시장에서 경쟁력이 떨어져 내버려질 위기에 처한 이들은 군수 산업 노동 수요 증가로 일자리를 얻는다.
그리고 전쟁 후, 여전한 인종 차별 앞에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 중 1942년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대변하는 신문 <피츠버그쿠리어>에 실린, 젊은 흑인이 이제 국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자고 "반쪽 미국인으로 살기 위해 희생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실린 편지 글이 인상적이다.
… 그러나 또한 바로 이 시기에 다른 승리는 과연 거둘 수 없는 것인지 묻고자 합니다. …
피부색이 어두운 스물여섯 살의 미국인으로서, 다음의 질문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반쪽 미국인'으로 살기 위해 내 목숨을 희생해야 하는가?", "이후에 평화가 찾아오면 다음 세대의 삶은 더 나아질 것인가?", "내 목숨을 희생하는 대가로 완전한 시민권을 보장해 달라고 한다면 지나친 요구일까?", "내가 아는 미국은 과연 지킬 가치가 있는 나라인가?", "미국의 유색인은 과거부터 쌓여온 굴욕을 여전히 감수하고 살게 될 것인가?"…
"승리의 V"사인이 억압과 예속과 폭정에 맞서 승리를 위해 싸우는, 소위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주목을 끌며 내걸리고 있습니다. 이 V 사인이 지금 이 거대한 투쟁에 가담한 이들에게 그런 의미라면, 미국의 유색인에게는 이중의 승리를 상징하는 이중의 VV를 사용하게 하도록 합시다.…
p.256. < 역사에 없는 사람들의 미국사> 중
#3. '침묵'을 거두고
워싱턴 행진의 연설자 중에는 요아힘 프린츠도 있었다. 프린츠는 유대인의 종교적 지도자인 랍비로서 나치 독일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생존한 인물이다. 그는 운집한 군중에게 인종적 불평등에서 가장 절박한 문제는 혐오나 편견이 아니라고 말했다. 문제는 바로 침묵이었다. 그는 불의를 목격하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관자야말로 불의가 지속되도록 인정하는 것이므로 도덕적으로 유죄라고 경고했다.
p.267. < 역사에 없는 사람들의 미국사> 중
우리 나라 교육에 '교육'이 없다는 비판은 오래되었지만, 곪을 대로 곪은 학교 현장의 농이 연일 터지고 있다.
얼마 전 '교사가 언제부터 이렇게 말하지 않는 집단이 되었는가? 교직에 어떤 질적 변화가 있었는가? ' 질문을 받았다. 엄중하게 받아 들게 된다.
다카시의 말로 마무리한다.
미래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우리의 선택은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 자신의 시각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 소수를 생략하는 역사는 분절을 강화하지만, 모두를 포함하는 역사는 집단 간 분절을 잇는 가교가 된다.
p.292. < 역사에 없는 사람들의 미국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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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도서관 스페셜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역사에 없는 사람들의 미국사』
로널드 다카키/ 레베카 스테포프(지음) / 갈라파고스(펴냄)
밀려오고 적응하고 내쫓기며...
이민자들이 만든 나라, 미국
책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짧은 역사를 말한다. 북미 원주민의 땅에 유럽 이민자들이 밀려들어왔다. 우리는 학창시절 역사 시간에 미국의 역사에 대해 어떻게 배웠던가? 잠시 떠올려본다. 간략하게 배운 역사는 오히려 편견과 오go를 가지게 했다. 명확한 것은 유럽에서 아메리카를 차지하러 흑인 노예를 실어서 이동해왔던 완벽한 침략의 역사라는 점이다.
책의 저자는 일본 이민 3세대로 그의 조부모님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였다. 학창 시절 내내 그를 따라다니던 질문 정체성에 관한 문제. 그는 미국인도 아니었고 일본인도 아니었다. 미국인 여성과 결혼할 때 상대편 부모님의 반대를 경험했었던 저자. 늘 테두리 밖에 있었던 저자. 이제 그는 필생의 사명으로 생각했던 수십 년간 인종, 민족학과 다문화사, 소수민족에 대한 이야기를 이 책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과연 미국의 역사가 혹은 세계사가 모두를 아우르는 역사인가? 아프리카계, 아시아계, 아일랜드계, 유대계, 멕시코계, 라티노, 무슬림, 북미 원주민 등의 소수민족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남북전쟁으로 노예제가 종식된 이후에도 ㅏ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인종 분리와 법외 처형은 계속되었다. 이 책은 그들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투쟁을 다룬다.
이주해 온 어떤 이들이 이런 차별을 각오하면서도 미국을 선택한 이유는 아메리칸드림의 영향이 없지 않다. 또한 전쟁을 피해 도망치듯 온 사람, 혹은 쇠사슬에 묶여 대서양을 건너온 흑인들... 저마다의 사연으로 운명으로 미국 사회에 편입된 사람들.
책은 18세기 영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역사부터 시작한다. 어린이 노동의 실태, 불평등한 계약에 대한 투쟁사, 미국 역사에서 생략된 소수민족의 정착기, 투쟁사를 편지, 서신, 사진 자료로 세밀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고 했던가? 아시아계와 아일랜드, 유대인 등이 미국의 경제를 일으키는데 어떤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그 생생한 과정을 담고 있다. 과연 미국은 자유와 평등의 나라인가?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차별은 계속된다. 또한 이 책은 원래 살던 북미 원주민들의 삶을 담고 있다. 이주와 정착의 역동이 만든 나라 미국의 소수 민족 역사를 생생히 들여다보는 책~!
다문화의 시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결혼 혹은 노동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이주해 온 소수자들에 대해 얼마나 포용하고 있는지? 이제 세계는 하나의 세계다. 지금은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지만 아닌 날도 있을 것이다. 과연 당신이 말하는 '우리'의 범주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갈라파고스 출판사로부터 선물받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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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없는 사람들의 미국사》
(A Different Mirror For Young People)
로널드 다카키 지음 | 레베카 스테포프 엮음
[갈라파고스] | (2021)
이민자의 관점에서 역사 새로 쓰기
노파심인지도 모르겠지만, 소위 ‘빅 히스토리’라는 관점이 유행하는 현상을 다소 우려하면서 바라보는 이유가 있다. ‘빅 히스토리’ 관점에서는 우주의 역사나 지구의 역사, 혹은 각 나라의 역사에 관한 서술을 하나의 거대한 시간성 속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흐름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 우려하거나 문제될만한 것은 없어 보인다. 내가 우려하는 부분은 이런 관점이 여러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의미와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반화된 지식과 판단에 접하게 되는 경우다. 독자가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때 인간에 대한 관심이 희석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 결국 나만의 노파심일까.
예를 들면 미국은 북미 원주민이 살던 땅에 유럽인이 유입되어 형성된 이민자들의 나라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 역사를 설명할 때 일반화된 핵심 개념과 설명만으로는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현실이 은폐되기 쉬울 것이란 생각이다. 이런 문제는 이미 많은 역사학자들이 부지런히 고민하고 기록을 남기고 있을 것이므로 나만의 노파심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유행처럼 느껴지는 ‘빅 히스토리’의 관점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일도 새로운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자칫하면 역사적 ‘설명’ 뒤에 정작 ‘사람’이 가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면 내가 독자들의 지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일까.
에르난도 코르테스는 1519년에 16명의 기병과 600명의 보병을 이끌고 멕시코 해안에 상륙했다. 그가 다녀간 후 50년 만에 멕시코 중부 지역의 아메리카 원주민수가 300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감소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천연두와 같이 유럽에서 들어온 질병이 가장 큰 영향을 주었을 테지만, 그렇다고 아즈텍 문명을 몰락하게 만든 유럽인들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빅 히스토리’의 관점에서는 16세기 멕시코 지역의 역사를 ‘16세기에 멕시코 중부 지역의 인구가 유럽인의 유입과 질병으로 90% 감소했다’라고 간결하게 정리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술만을 역사책에서 접했을 때, 후대의 독자들은 과거의 선조들이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그리고 우리는 이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 생각을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다. 인간의 역사가 ‘인구’로, 그리고 ‘숫자’로만 기록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닐까. 역사책을 읽을 때 직관적이고 깔끔하게 정리된 ‘빅 히스토리’ 책들을 보면 내가 이따금씩 우려감을 느끼는 이유다.
《역사에 없는 사람들의 미국사》는 이런 개인적인 우려를 상당히 불식시켜주는 책이다.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에서 주목하고자 했던 노력들의 계보를 잇는 책이 아닐까 싶다. 하워드 진은 이 유명한 미국사의 첫 장부터 아메리카 원주민의 수난사로 시작했다. 그의 저술을 처음 접했을 때, 신선하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하워드 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군에 복무하면서 폭격기에 올라 폭탄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책에서 ‘내가 무슨 일을 했던가’를 솔직하게 고백했던 부분도 기억난다.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 높은 상공에서 무감각하게 폭탄을 떨어뜨렸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폭격 받은 도시 현장을 지상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가 받았을 충격을 상상해본다. 내게는 ‘빅 히스토리’의 관점에서만 역사를 바라보는 경우는 폭격기에서 무심히 풍경을 바라보는 폭격수의 입장과 비슷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로널드 다카키가 쓰고, 이를 논픽션 작가 레페카 스테포프가 청소년용으로 다듬고 엮은 이 책은 폭격을 받은 현장을 지상에서 바라보는 일이 될 것이다. 내가 이 책에 특히 주목하게 된 이유다.
‘파도가 좋아 서퍼가 되려 했던’ 청년 다카키는 하와이로 이주한 일본인 후손의 3세대다. 그의 할아버지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던 노동자였다. 저자가 살았던 마을은 일본인을 비롯하여 한국, 중국, 포르투갈, 하와이 혈통의 노동자들이 모인 다문화 공동체였다. 특히 그가 저술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From the Land of Morning Calm》와 《다른 해변에서 온 이방인들 Strangers from a Different Shore》(1998)은 구한말부터 시작된 한인 이주의 역사를 조명한 책이라고 한다. 언젠가는 이 책들도 국내에 소개되지 않을까한다. 이 책을 엮은 레베카 스테포프 역시 인문분야의 논픽션 도서들을 선보인 작가다. 특히 청소년을 위해 하워드 진, 제레드 다이아몬드, 다윈, 찰스 만의 저서들을 편집하여 새롭게 발표한 시리즈로도 잘 알려져 있다.
역자의 설명에 따르면 원저자 다카키 교수가 평생 붙들었던 관심사는 이민자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새로 쓰는 일이었다. 이번에 출간된 《역사에 없는 사람들의 미국사》에서는 저자의 그런 의도가 개별 인구 집단에 적용되었다. 아메리카 원주민, 흑인 노예의 삶, 아일랜드인들의 이민, 중국인들의 역사, 러시아를 탈출하여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들 등에 관해 서술되어 있다. 허먼 멜빌의 장편소설 《모비 딕》(1851)에 등장하는 포경선 ‘피쿼드’호가 백인들에 의해 멸종한 원주민 부족의 이름인 것, 그리고 이 배에 10여 개국에서 온 선원들이 있던 설정은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소설은 한 국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미국의 족보이기도 하다. 이처럼 미국은 다양한 국적의 이민자들이 유입되어 이루어졌다. 미국인들은 각자 자신에게 익숙했던 영역의 경계를 넘어온 이들이었다. 미국이야말로 다양한 ‘경계인’들의 나라였다. 하지만 백인 남성 위주의 성채를 세우고 이를 지키려고 했던 행보는 미국 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분열과 충돌의 씨앗을 심어놓았다. 2021년에 백인 인구가 사상 최초로 감소하고 있다는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사는 이 ‘백인들의 우려와 불안감’을 투명하고 절박하게 비춰주는 듯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미국-멕시코 국경의 담장을 높이려 했던 시도 역시 그런 백인들의 두려움을 짐작해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최근의 뉴스보도에 근거한 역자의 설명 따르면, 국내 전체 학생 중에서 한명 이상의 외국계 혈통 부모를 가진 다문화 가정의 학생이 3% 넘게 차지한다. 비록 전 세계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이동이 제한적이긴 하지만 다문화가정의 비율은 당분간 줄어들 것 같지 않다. 우리나라의 인구 구성도 지속적으로 다양화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둘 때, 다카키 교수가 서문에서 밝힌 말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개별 집단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이것들이 모두 모여 세계 시민국가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11) 대한민국도 결국 현대사를 새로 써야 하지 않을까싶다. 각 다문화가정의 후손들 역시 언젠간 자신이 속한 역사를 새롭게 써야하고, 누군가는 결국 다시 쓰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점차 다양해지는 집단의 관점에서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다시 새롭게 기술되어야 할 이유를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