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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누리 저
한국역사연구회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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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유성호,김상균 등저
김동기 저
100여년의 시간이 흘렀으나 진정한 의미의 평가는 쉬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현대의 변화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 것이 역사여서 그런 듯하다. 결국 판단은 개인의 몫이다. 남은 기록을 세심히 살피는 가운데 자신이 취할 입장을 결정하는 과정이야말로 어쩌면 역사학자 E. H. Carr 가 말한 역사(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이야 경제대국 독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불과 30년 가량 전반 하여도 독일의 인지도는 지금과 달랐다. 이 나라의 동서는 냉전 시기를 상징하는 장벽에 의해 나뉘어진 상태였다. 여전히 치열한 남북 대치 상태가 유지 중인 우리에게 독일은 동병상련의 아픔을 경험한 존재이면서, 바로 옆에 철천지 원수이자 악의 축을 둔 위험한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다. 워낙에 영어권 국가(미국, 영국) 중심의 사고에 능했던 점도 이 나라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우리에겐 상대적으로 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국가가 독일인데, 독일의 입장에서 우리는 어찌 인식됐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왠지 이 책으로부터 얻을 수 있을 듯했다.
책 제목 <우아한 루저의 나라>는 3명의 독일인 시선에 비친 우리나라를 다루고 있었다. 조선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 이름만을 놓고 보면 제국이었던 ‘대한제국’을 그들은 경험했다. 한 때 강고한 쇄국주의 정책을 고수했던 조선의 연장선상에서 건국이 이루어진 대한제국이었음을 고려한다면 낯선 이방인들은 환영 받기가 어려웠으리란 짐작이 충분히 가능하다. 상대가 호의를 베풀지라도 다가서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터인데, 적대적이기까지 하다면? 그게 아닐지라도 이들의 방문은 한 나라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길지가 못했다. 유럽의 여러 국가를 제한된 기간 동안 훑은 것과 어쩌면 흡사할지도. 기록을 읽는 나로서는 여러 가지를 염두해 둘 필요가 있었다.
가장 먼저 만난 인물의 이름은 크노헨하우어(Knochenhauer)였다. 독일 산림청 공무원이라는 그의 신분은 그가 이 땅을 방문한 목적이 무언지를 짐작케 했다. 1899년 무렵 조선은 열강의 관심을 한 눈에 받고 있었다. 나날이 팽창해가던 제국주의 세력은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렸고, 독일 또한 조선에서 금광 채굴권 등 이권 획득을 노리고 있었다. 그의 강연문 ‘Korea’는 이러한 관점이 적극 반영된 결과물로 보아도 무방하다. 강연이 이루어진 곳이 베를린 식민지연구회라는 점이 나에겐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저들에겐 선명한 계획이 있었다?
예술사학자 예쎈(Jessen)의 답사기를 저자는 ‘우아한 루저의 원형’이라 칭했다. 그야말로 존재감이 없던 나라 조선에 대해서는 당대 세력 모두가 동의를 표할 듯한데, 예쎈의 시선은 고대 문화를 향하고 있어 조금 독특했다. 착취할 수 있는 대상, 일본에 의해 이루어진 근대화 등을 빗겨 그는 이 나라 사람들이 일군 하나의 문명을 주목했다. 그는 조선이 중국과 일본의 가교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으며, 조선을 지배하고 있는 일본의 원류가 조선이라는 점을 분명히 파악했다. 그의 시선에 일본은 군국주의에 열광하는 세력이자 서구 문명에 무차별적으로 동화되어가는 중인 존재에 불과했다. 허나 그는 학자였으며, 그릇된 흐름을 멈추게 할 의도나 힘이 없었다. 그가 조선인의 일상 생활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와중에도 일본은 조선을 야금야금 먹어 삼키고 있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마지막 ‘백두산 가는 길’은 지금은 갈 수 없는 곳이 된 북녘땅을 여행한 라우텐자흐 헤르만(Lautensach Hermann)의 기록이 있어 가능했다. 실로 날씨가 좋아야지만 제대로 된 감상이 가능하다는 백두산 천지를 제대로 영접(!)했던 듯. 그가 촬영했다는 백두산 천지 파노라마 사진은 어디에 내놓아도 웅장함 면에서는 뒤처지지 않으리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야말로 ‘대단히 아름다운 풍경’이었는데, 이 나라와 별반 관련이 없는 그에게는 허락된 백두산 방문이 우리에겐 금지라는 사실이 씁쓸하게 다가왔다. 압록강 상류에 위치한 조선인 마을을 담은 사진을 응시하며 오늘날의 모습과 얼마나 달라졌을지를 묻고픈 마음이 들기도 했다. 시도때도 없이 변화하는 도시에 대한 반감이 깊은 것과 별개로, 만일 압록강 유역 마을의 오늘날 모습이 시간이 멎은 듯 고대로라면 안쓰러운 심정을 느낄 것만 같았다.
우리에게 정보가 많지 않았던 것 이상으로 독일인들 또한 우리를 알지 못했다. 수시로 그릇된 표현이 등장했으며, 그 중 일부는 일본인들, 더 나아가 제국주의 국가들의 시선과 판박이 모양새를 하고 있어 언짢았다. 그들은 수시로 다른 열강들의 입장을 고려했으며, 그 결과 조선인들이 내민 손을 결코 잡으려 들지 않았다. 폭력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게 현실이었다. 한 번 시작된 흐름은 막무가내로 넘쳐흐르는 해일과도 같았으니, 제 아무리 독립국가를 표방한들 대한제국으로서는 감내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마냥 무기력하지는 않았다는 점으로부터 적잖이 위안을 얻었다. 파란 눈의 독일인들은 고종 황제가 지닌 애민의식을 조금이나마 느꼈다. 한계가 분명함에도 투사들은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독립을 부르짖었다. 그것도 당당하게.
이 책에 사용된 ‘우아하다’는 표현이 내겐 ‘처절하다’와 동일어로 읽혔다. 고상하고 기품이 있으며 아름답다는 수식어는 아무에게나 사용할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다.
[우아한 루저의 나라]는 '우아한'과 '루저'라는 단어가 연결되어 의아함을 자아내며 묘한 흥미를 일으킵니다. 그러면서 '독일인 3인, 대한제국을 답사하다'라는 부제를 통해 우아한 루저의 나라가 바로 대한제국임을 깨닫게 됩니다. 모든 것이 불안하고 혼란스럽고 치욕스러웠을 대한제국 시대에 독일인들이 본 것은 무엇일지 궁금해지며 책을 만나보았습니다.
[우아한 루저의 나라]는 독일 하이델베르그대학에서 연구년을 보내던 지은이 고혜련이 일제강점기 조선과 관련한 독일 신문 자료들을 수집하고 번역하던 중 찾게 된 19세기 후반부터 조선을 다녀 간 독일인 3인의 여행기로 그동안 한국사에서 접해보지 못한 시점의 이야기라 흥미로웠습니다. 낯선 이방인들의 눈에 비친 우리나라는 어떤 모습이며, 그들의 여행에는 어떤 목적이 숨어있는지, 그러면서 왜 우아한 루저의 나라라 표현하는지 여러 궁금증들을 가지고 책 속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일제강점기 속 대한제국의 이야기를 독일인의 눈으로 만나보는 것은 새로우면서 한없이 순진하면서도 힘없고 무지한 그때 그 시간 속의 우리나라를 만나보며 우리의 뼈아픈 역사를 다시 한번 느껴보게 하였습니다.
한국사 [우아한 루저의 나라]는 19세기 중반 근대화를 무기로 서양의 제국주의가 몰아치던 동아시아의 상황 속 조선에 대한 열강들의 이권 야욕을 향한 모습에서 시작됩니다. 책 속에서 우리는 광산 채굴권을 획득하고 우리나라 금광 지역을 조사하기 위해 직접 방문한 독일 산림청 공무원 크노헨하우어의 강연문「Korea」전문과 독일 예술사학자 예쎈이 미국을 걸쳐 일본을 답사하며 쓴 「답사기:조선의 일본인」그리고 압록강 어귀부터 백두산 천지까지 여행한 라우텐자흐 헤르만의 「조선-만주 국경에 있는 백두산의 강도여행」을 만나보게 되는데, 3인의 색다르면서도 그때 그 시간들을 따라가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흥미로운 여행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선의 풍경부터 생활 모습, 호랑이 사냥, 지층 파악, 고종에 대한 평가, 근대화 정책 속 조선과 일본의 비교, 백두산을 오르면서 만나게 된 강도들의 정체 등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모습들부터 독일인들의 눈에 비친 우리나라의 상황들과 그에 따른 그들만의 생각과 판단들이 흥미로웠습니다. 여행기 속 상황을 잘 느껴보게 하는 여러 사진 자료들이 함께하여 더욱 실감 나게 이야기 속에 빠져볼 수 있었습니다.
정은문고 [우아한 루저의 나라]는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 속 일제강점기 대한제국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조금 더 실제적이며 자세히 해볼 수 있었습니다. 독일인 3인의 여행기 속에 녹아져있던 우리 현실을 바라보면서, 그때 그시간 속 대한제국이 진정 우아한 루저인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하면서 우리가 잊고 있던 역사 속 우리의 시간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