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 저/이시형 역
원래 영문판으로 읽다가 좋아하는 번역가님이 번역하신 책이라고 들어 구입하게 되었다.
홀로코스트 시대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물, 안네 프랑크.
이젠 전 세계에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고 그녀의 일기는 계속해서 후대에 전해질 것이다.
그 시절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또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기 위해.
책의 마지막 구절 '안네의 일기는 여기서 끝난다'라는 말이 참 구슬프다.
안네 프랑크. 유대인 소녀의 일기이다.
세계2차대전 당시 어린나이였던 안네의 시선에서 어른들의 위선과 전쟁의 참혹함을 읽어내려갔다. 솔직하면서도 담백하게 현상을 이야기하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서 솔직하게 자기감정을 들어내는 모습의 안네는 정말 다른 또래 아이들과 다를 것 없는 성장 중인 청소년이었다.
이번에 다시 이 책을 읽게 되면서 전쟁의 무모함과 참혹함, 그리고 비인류적인 부분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안네의 일기』는 독일의 유대인 박해를 피하여 2년 동안 은신처에서 생활한 안네의 기록이다. 안네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오토 프랑크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프랑크 일가는 히틀러 집권 이후 점점 심해지는 독일의 박해를 피하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으나, 2차 세계대전으로 네덜란드가 독일에 점령 당하자 1942년부터 은신처를 마련하고 도피 생활을 시작한다. 안네는 생일 선물로 받은 일기장에, 키티라는 가상의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으로 일기를 써 내려갔다. 『안네의 일기』는 세계적인 고전이 되었고, 어린이나 청소년을 위한 다이제스트본이 널리 읽혔기에, 일기의 일반적인 내용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유대인에 대한 차별상, 숨어 지내야만 하는 삶의 불안과 공포, 전쟁과 탐욕에 대한 비판적 시선, 미래에 대한 불안과 그럼에도 잃지 않는 희망 등의 주제는 익히 알려져 있다.
고전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지만 아무나 제대로 읽지는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익히 알려져 있는 내용이더라도 실상을 들여다보면 의외의 새로운 지점들이 발견된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중요한 사실들이 비본질적인 면으로 보이기도 하고, 감춰져 있던 사실들이 보물처럼 나타나 기존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부수기도 한다. 『안네의 일기』 역시 마찬가지다. 앞서 언급한 일반적 내용보다 아버지에 대한 애정, 어머니와 언니와 겪은 불화, 함께 은신처에서 생활하는 판 단 가족과의 끊임 없는 마찰, 페터 판 단과 나누는 사랑, 성에 대한 호기심, 청소년의 독립성과 자유 옹호, 여성의 지위에 대한 성찰, 고정관념에 저항하는 태도, 엄청난 공부량, 열악한 식량 문제 등 생활세계 측면의 테마는 이념적 주제에 가려져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안네의 실존은 유대인 박해로 희생된 소녀라는 단편적인 이해를 훨씬 초과한다. 무엇보다도 13세의 소녀가 15세에 이르기까지 이룩한 인격적 성숙은 읽는 이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긍지를 생각케 한다. 이 글에서는 『안네의 일기』의 내용을 정리하기보다는 글의 형식적 특성과 안네 프랑크의 정신적 해방 과정에 주목하려 한다.
생생한 인물 묘사
『안네의 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까닭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안네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이 눈앞에 보이듯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때문일 것이다. 일기는 보통 자신의 상념과 에고에 대한 집착이 추상과 과잉으로 흐르기 쉬운데, 안네는 관심을 자신이 아닌 대상에 기울인다. 외부 세계를 섬세하게 인식하여 언어로 옮긴다. 사람 사이의 대화까지 옮겨져 있다. 그래서 흡사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우린 이미 약속을 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싸우지는 말자고. 난 약속을 꼭 지킬 거야."
"나도 그래, 페터. 하지만 아빠는 그걸 안 믿어. 아빠는 우리가 그냥 친구인 줄로만 알았대. 네 생각엔 우리가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것 같니?"
"난 그렇다고 생각해, 넌?"
"나도 그래. 그래서 아빠에게 말했어, 널 믿는다고. 널 신뢰한다고. 내가 아빠를 믿는 것처럼 페터 너를 믿고 네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안 그러니?"
"그랬으면 하고 바라지."
그는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졌어.
"난 널 믿어, 페터."
나는 계속 말했어.
"난 네가 좋은 성격을 가졌고, 앞으로 이 세상을 씩씩하게 해쳐 나갈 거라고 믿어." (387~388쪽)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의 면면도 그림 그리듯 되살아난다. 함께 지내는 사람에 대해 평하는 문장들이 많은데, 막연하게 판단하지 않고 언행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수긍케 한다. 뒤늦게 합류한 뒤셀은 자기중심적인 생활 방식 때문에 안네의 가족, 판 단의 가족과도 많이 다투게 된다. 안네의 묘사만으로 뒤셀의 인격을 짐작할 수 있다.
뒤셀 씨가 생일을 맞았어. 처음에는 생일에 아무 관심 없는 것처럼 굴더니 미프가 커다란 시장바구니에 선물 꾸러미를 가득 채워서 들고 오자 어린애처럼 급흥분을 하더군. 그의 애인인 샬롯테가 달걀이랑 버터, 과자, 레모네이드, 빵, 코냑, 야채가 든 케이크, 꽃, 오렌지, 초콜릿, 책, 그리고 편지지를 보낸 거야. 그는 선물을 탁자에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사흘 동안이나 자랑스럽게 전시했단다. 유치한 사람!
뒤셀 씨는 어디 가더라도 절대 굶주릴 일은 없을 거라고 믿어. 그 사람이 찬장에 숨겨둔 빵이랑 치즈, 잼과 달걀을 우리가 발견했으니까. 우리는 그를 받아들여 은신처를 제공했느넫, 그런 우리 등 뒤에서 자기 혼자만 배를 불리며 그렇게 시치미를 떼다니, 정말 염치 없고 뻔뻔하지 뭐야. 우리는 모든 걸 그와 함께 나누었는데! 더더욱 참을 수 없는 건 우리뿐 아니라 클라이만 씨, 포스카윌 씨, 베프도 철저하게 나 몰라라 하면서 빵 부스러기 하나 베풀려 하지 않는 거야. 예를 들면 클라이만 씨가 오렌지를 그렇게 먹고 싶어 하는 걸 알면서도 뒤셀 씨는 자신의 식욕이 더 급하다는 식이지. (141~142쪽)
안네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분명 모든 사건을 사실 그대로 옮겨 적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키티에게 '최대한 재미있게 알려주려고 한다'고 종종 언급한다. 친구에게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조곤조곤 얘기해 주듯이. 안네는 이미 일기를 쓰는 때부터 작가가 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살아있는 언어로 표현할 줄 알았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구미에 맞게 각색해 흥미롭게 들려주었다.
변증법적 지양의 정신
2년 간 이어진 안네의 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나가면 은신하는 기간 동안 안네가 도달한 정신적인 성숙에 감탄하게 된다. 일기는 주관을 토로하는 텍스트이므로, 안네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기 어렵지만, 자신을 여러모로 객관화하여 서술하려는 면모가 두드러지며, 그러한 자의식을 스스로 감지하기도 했다. 한정된 공간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여덟 명이 함께 생활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 지속되는 갈등은 전쟁을 방불케 한다. 안네는 주기적이고 지속적으로 구성원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을 '전쟁'에,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말을 '폭풍우'에 빗대곤 했다. 안네는 고분고분한 언니 마르고와는 달리 어른들의 말에 부당한 점이 있으면 맞대응해서 버릇없는 아이, 가정교육을 잘못 받은 아이라는 비난을 종종 받은 모양이다. 일기의 초기와 중기에는 자신을 이해해주는 어른이 없다는 생각에 고독을 자주 토로한다.
누구라도 좋으니 이런 나를 좀 이해해줄 사람이 있을까? 안전하게 지내는 걸 감사할 줄 모른다고 비난만 하지 말고, 유대인이건 아니건 그 문제를 넘어서 내 안에 있는 어린아이, 순수한 즐거움을 갈망하는 어린아이를 이해해줄 사람이 과연 한 명이라도 있을까? (217쪽)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고 자기 주장만 앞세우기를 좋아하며, 이기적인 면모를 보이는 판 단 부인을 안네는 싫어했다. 일기에는 판 단 부인이 안네를 비난하는 말들이 다수 기록되어 있으며, 그녀의 언행에 대해 불쾌함과 분노를 표출하는 부분이 많다. 그런데 안네는 은신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함께 지내는 사람들을 달리 보게 된다. 13세에는 판 단 부인과 판 단씨가 안네의 부모님과 싸우는 까닭은 판 단 가족의 이기심과 편견에 찬 사고방식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했으나, 14세부터는 그들의 좋은 점도 함께 보려고 노력한다. 판 단 부인의 경우 그녀의 말을 잘 경청해주면 억지를 부리는 일이 별로 없다며 옹호하는 부분도 있다. 거꾸로 아빠는 자기 마음을 이해하는 자상한 사람이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안네의 고독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 없음도 깨닫게 된다. 예전에 알고 있던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이 2년 사이에 빠르게 변화한다. 개인 공간을 가질 수 없는 열악한 삶의 조건이 정신의 부화를 촉진한 것 아닐까.
안네가 공동체에서 느낀 고독은 그녀의 실존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간다. 그녀는 외로움으로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에 절망하다가 구원의 빛을 본다. 그것은 사랑이다. 페터를 달리 보게 된 것이다. 일기의 초반에는 페터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다가 중반 이후로 페터와 급속도로 가까워지면서 일기장은 페터 이야기로 채워진다. 페터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으로 시작하여, 페터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가고, 그의 마음을 궁금해 하고, 결국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들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것은 낭만적 사랑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형성하는 에고의 환상에 토대를 두고 있다.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대상에 덧칠된 나의 환상이다. 청소년기부터 사랑에 눈 뜬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겪게 되는 보편적 경험이 안네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안네는 페터와 볼을 스치는 꿈을 꾸고, 페터와의 관계를 지속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도 계속 그 꿈을 언급한다. "꿈속에서 느꼈던 페터의 뺨을 잊을 수가 없어. 그 황홀하던 순간!"(346쪽) 안네에게 그 꿈은 사랑의 원형인 셈이다.
환상이 실재가 아님을 자각하게 되는 때, 다시 말해 사랑에 빠진 사람의 콩깍지가 벗겨질 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상대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이다. 서로의 마음을 탐색하는 기간에는 상대에게 거절당할 수 있다는 불안이 환상을 존속시키거나 강화한다. 상대가 나를 좋아하기를 바랐으면서도 소망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순간, 환상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욕망은 결여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결핍이 충족되었을 때, 내가 원하던 것이 사실은 다른 데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안네는 페터가 자신에게 완전히 의존하기 시작함을 확신한 순간부터 페터를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한다. 한동안 페터를 맹목적으로 미화하던 관점에서 벗어나 페터의 자상하고 친절한 면모와 약한 신념과 의지를 동시에 보게 된다. 페터의 약점을 진심으로 보완해주고 싶어한다. 일기에 나타난 관심사는 다시 다양해진다. 강렬한 사랑의 감정을 통해서 안네는 낭만적 사랑에 빠졌다가 나오면서 인간을 바라보는 안목을 확장한 것이다.
은신처의 생활은 안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정신은 변증법적으로 성숙해진다. 그녀는 만약 피신하지 않고 학교를 계속 다녔다면 어땠을지 생각한다. 그랬다면 안네는 고독을 경험하지 못하고 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서 밝고 쾌활한 아이로 불리며 즐겁게 생활했을 것이다. 대신 자신의 실존을 자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은신처에서 겪은 고독감으로부터 진정한 자기('무거운 안네')와 겉으로 보이는 자기('가벼운 안네')의 괴리를 인식하고 '진정한 자기'와 대면했다. 그녀의 비정상적인 격리 생활이 자기 존재의 자각이라는 뜻밖의 선물을 선사한 셈이다.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된 실존
안네의 정신적인 성장은 거저 주어진 것은 아니다. 안네가 지니고 있는 타고난 자질도 한몫했다. 옳지 않은 말이라면 어른들의 입에서 나왔더라도 반박하고 저항했다. 나름대로의 뚜렷한 주관을 지니고 있었고, 그에 맞지 않으면 회피하기보다 싸워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비록 버릇 없다는 말을 들을지언정 그녀는 '힘에의 의지'를 무의식적으로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안네는 어른들을 매개로 주입되는 지배적 담론에 맹목적으로 젖어들지 않고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할 수 있었다.
일기의 후반부에는 사회에서 유포되는 일반적인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안네의 면모가 확연히 드러난다. 이를 테면, 연합국인 영국에 대한 네덜란드 사회의 편견을 비판한다. 네덜란드인은 영국이 네덜란드의 해방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며, 네덜란드를 해방시킨 뒤에는 당연히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네덜란드인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일종의 집단적 환상이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이 한국을 돕는 미국은 우리의 친구라고 믿는 것과 같다. 영국이든 미국이든 그들은 친구가 아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국가 장치일 뿐이다. 그들이 선의로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순진하고 비현실적이다. 안네는 어른들이 품은 허상을 말도 안 된다고 평가한다. 안네는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지 않았던 것이다.
남성에 비해서 여성의 불리한 지위가 부당하다고 생각한 대목은 놀랍다. 안네와 함께 지내는 가족 누구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서 안네와 같이 생각하고 안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안네는 혼자서 성적 차별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여성의 존엄성'을 획득해야 해! 남자들은 어딜 가나 존경의 대상이 되는데, 왜 여자들은 거기에 아예 낄 수조차 없는 거지? 군인과 영웅에게는 감탄과 찬미를 바치고, 탐험가는 불멸의 영예를 얻고, 순교자들은 경배의 대상이 되지만, 여자를 한 명의 전사로 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거잖아."(442쪽) 여자를 한 명의 전사로 보아야 한다는 문장에 눈이 간다. 안네의 정신은 지속적으로 해방을 향하고 있었다.
감금되어 있던 그녀를 누가 해방으로 이끈 것인가? 안네의 일기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은신처의 구성원들은 아니다. 그녀가 자유로운 정신을 구가할 수 있었던 원동력에는 '공부'가 있었다. 어른들은 공부량이 많지 않았으나 청소년에 해당하는 페터 판 단, 마르고 프랑크, 안네 프랑크는 거의 매일 오랜 시간 공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페터 판 단: 영어 공부, 프랑스어 공부(통신강좌), 네덜란드어 속기, 영어 속기, 독일어 속기, 영어 상용 편지 쓰기, 목공, 경제학, 가끔가다 계산, 독서는 거의 하지 않으며, 어쩌다 지리 서적을 읽음.
마르고 프랑크: 영어 공부, 프랑스어 공부, 통신강좌로 라틴어 공부, 영어 속기, 독일어 속기, 네덜란드어 속기, 역학, 삼각법, 물리학 화학, 대수, 기하학, 영문학, 불문학, 독문학, 네덜란드 문학, 무기, 지리학, 근대사, 생물학, 경제학을 공부함. 책이라면 일단 다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종교와 의술에 관한 책을 선호함.
안네 프랑크: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를 공부함 네덜란드어 속기, 기하학, 대수, 역사, 지리, 예술사, 신화, 생물학, 성경, 네덜란드 문학을 공부함. 좋아하는 책은 전기류(교양서든 통속서든 구분하지 않음), 역사책, 때로는 문학류와 대중소설도 읽음.(414~415쪽)
이들은 격리되어 있었지만 끊임없이 언어학, 수학, 문학, 역사, 지리, 경제, 예술, 신화, 종교 등의 학문을 공부했다. 안네가 자신을 객관화하고 보편적 진리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토대는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는 공부 역량에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안네는 공부가 힘들다고 하면서도 힘든 과정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타자를 수용하는 훈련이 일상에서 꾸준히 반복되었다. 무엇을 공부했느냐보다도 무언가를 공부한다는 마음의 꼴이 중요한 셈이다. 공부의 요체는 자기-변화이며, 안네는 자기-변화의 의지가 강했다. "솔직히 나는, 자기 입으로 "난 나약해" 이따위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나약한 채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아니, 자신의 나약함을 안다면서 왜 그걸 물리쳐버릴 방도를 구하지 않는 거지? 왜 자신의 기질을 강하게 훈련하지 않는 거지?"(448쪽) 안네는 거의 니체적인 '힘에의 의지'를 깨닫고 있었던 듯하다.
매일 저녁 그날 하루의 일을 되새기면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고 무엇을 잘했는지 점검해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사람들이 훌륭하고 착하게 살 수 있지 않겠니.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매일매일 새로운 모색을 할 것이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분명 가시적인 성과도 거두겠지.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이야. 돈도 전혀 들지 않고, 효과도 아주 좋지. 이걸 모르는 사람은, 이제라도 배워야 하고 경험해봐야 해.
"맑은 양심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450쪽)
안네의 육체는 감금되어 있었지만, 모순되게도 정신은 해방되어 갔다. 그녀가 1944년 8월에 비밀경찰에 의해 발각되지 않고, 아우슈비츠로 떠나는 마지막 기차를 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티푸스로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안네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안네는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세계에 이름을 남기고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졌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안네 프랑크는 죽은 후에야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이 또한 운명의 장난과 같은 모순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