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선란 저
무라타 사야카 저/김석희 역
조해주 저
나오미 크리처 저/신해경 역
2023년 05월 17일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을 오해했습니다
사람이라 이해하고 사람이라 오해했습니다
사람을, 마침내 사람됨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시인의 말 中
[ 손을 놓치다 ]
분침이 따라잡지 못한 시침
마음과 따로 노는 몸
체형을 기억하는 데 실패한 티셔츠
매듭이 버린 신발 끈
단어가 놓친 시
추신이 잊은 안부
그림자가 두고 온 사람
아무도 더듬치 않는 자취
한 명의 우리
[ 서른 ]
뜬구름을 잡다가
어느 날 소낙비를 맞았다
생각 없이 걷다가 길을 잃기도 했다
생각이 없을 때에도 길은 늘 있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그런데 머리는 왜 안 돌아갈까?
너무 슬픈데 눈물이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다음 날, 몸 전체가 통째로 쏟아졌다
어른은 다 자란 사람이란 뜻이다
한참 더 자라야 할 것이다
나이를 먹어도 먹어도
소화가 안되는 병에 걸렸다
[ 한발 ]
이 사람아, 지금 오면 어떡해!
이 사람아, 벌써 가면 어떡해!
시침과 분침과 초침이
정확히 두번 만나는 동안
늦거나 일렀다
아무리 간발에 다가가도
감정을 에누리할 수는 없었다
[ 사람 ]
이 사람아 이게 대체 얼마 만이야!
우리는 길에서 만났다
처음으로 교복을 벗고 만났다
서로의 이름을 잊은 채
어딘가 낯이 익고
익숙한 냄새가 나고
사람임은 분명해서
너는 쫙 편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바닥에는 이름 대신
손금이 구불구불했다
어떤 길을 따라가도 순탄 할 것 같았다
눈이 있는 사람
사람 보는 눈이 있던 사람
재물선이 선명해서
나는 네가 큰사람이 될 줄 알았지
너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손금이 목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사람을 좋아하던 사람
사람 좋은 사람
잘못을 해도 쉽게 인정해서
나는 네가 새사람이 될 줄 알았지
손금 하나를 무작정 따라가다
갈림길에 섰다
등을 댈 것이냐 돌릴 것이냐
내가 뱉었던
네가 들었던
모진 말이
등줄기로 흘렀다
어딘가 귀에 익고
친근한 말맛이 나고
억양마저 확실해서
나는 쫙 편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양 볼이 뜨거워서
손금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손바닥을 맞추곤 하던 사람이
가차 없이 손바닥을 뒤집어버리듯
등을 돌리고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이 사람아 벌써 가면 어떡해!
사람이 사람을 불렀다
방금 전까지는
사람이었던 사람을
이 사람을
... 소/라/향/기 ...
<왼손은 마음이 아파>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오은 시인의 시집. 같은 시인이 썼고 비슷한 시기에 나온 시집이건만, 왠지 나는 두 시집이 서로 많이 다르다고 느꼈다. <왼손은 마음이 아파>에 실린 시들이 간결하고 담백한 느낌이라면, <나는 이름에 있었다>에 실린 시들은 왠지 모르게 묵직하고 진한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니 순백의 표지와 진녹색의 표지가 각 시집의 느낌을 미리 알려주는 듯도 하다.
<나는 이름에 있었다>에는 33편의 시와 2편의 글이 실려 있다. 이중 제목이 '~사람'인 시만 21편이다. '도시인', '애인', '무인공장', '주황 소년'처럼 사람을 뜻하는 한자 '인(人)'과 사람의 하위 분류에 속하는 '소년'이 제목에 들어있는 시를 더하면 총 25편이 사람에 관한 시다('58년 개띠'도 사람의 특성을 나타내는 단어가 포함된 제목이지만 여기에는 포함하지 않았다). 그만큼 시인이 사람을 만나 사람을 겪고 사람을 생각하고 관찰하여 쓴 시가 많이 담겨 있다.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답게 사람을 궁리하'여 쓴 시들이랄까.
이중 가장 마음에 남는 시는 '유예하는 사람'이라는 시다. 시 속 화자는 새벽에 고등학교 동창의 죽음을 알리는 부음을 받는다. 장례식장에 도착한 화자는 그제야 친구와 '친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둘은 한때 같은 축구부에서 공을 찼고, 부활동이 끝난 후 옷을 갈아 입으며 장래에 뭘 하고 싶은지에 관해 이야기하곤 했다. 졸업 후 화자와 친구는 오랫동안 소원했다. 화자는 그 시절 그 추억은 그대로인데 친구는 더 이상 지금 여기에 없다는 사실이 야속하다고 느낀다. 멀리 있다고 느꼈던 죽음이 이만치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 허기가 진다.
이 시가 유독 마음에 남는 건 시 속 화자와 거의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에 고등학교 때 친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였고, 서로의 사정으로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기에 장례식장에서 영정 사진을 본 순간 슬픔과 미안함과 원망과 죄책감의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장례식장에서 친구와 이별한 후 오늘까지 단 하루도 친구 생각을 안 한 날이 없다. 친구와의 추억은 그대로인데 정작 친구는 지금 여기에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읽는 사람'이라는 시도 좋았는데, 이 또한 시 속 화자가 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취미가 뭐냐고 묻는 질문 앞에 작아지기 일쑤였던 화자는 독서가 가장 무난한 취미라는 말을 듣고 읽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 날부터 화자는 언제 어디서나 읽었다. 벤치에서든 식당에서든 지하철에서든 화장실에서든 계속 읽었다. 책이나 잡지나 신문이나 벽보나 전단이나 우윳갑 뒷면에 적힌 영양 성분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원에서 자주 마주치던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근데 읽지 않을 땐 대체 무얼 하세요?' 그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읽었지만 그는 정작 제 마음만은 읽지 못했다'
처음엔 이 시를 낄낄거리며 읽었다. 언제 어디서나 닥치는 대로 읽는 화자의 모습이 너무 나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을 읽고서는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읽는 것 말고는 다른 취미가 없어서, 이제까지 수천 권에 달하는 책을 읽었지만 정작 내 마음만은 읽지 못해서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어쩌면 이제 나에게 '읽는 사람' 말고 다른 별칭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쓰는 사람', '만드는 사람', '하는 사람' 등등.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 될까. 나부터 기대된다.
/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고/ 그래도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하는 이야기...
- 도시인 : #지하철 - 훗날을 기약하는 마음으로 갈아탄다/ 막히지 않기를/ 이따금 숨 고를 수 있기를/ 땅 아래로 들어가/ 강 위를 달리기도 한다...
- 손을 놓치다 : 분침이 따라잡지 못한 시침/ 마음과 따로 노는 몸... 매듭이 버린 신발 끈/ 단어가 놓친 시/ 추신이 잊은 안부/ 그림자가 들고 온 사람/ 아무도 더듭지 않는 자취/ 한 명의 우리.
- 주황 소년 : ... 소년이 주황 소년에서 성장하려고 할 때마다/ 노을은 밤새 볼을 붉혔어/ 길을 가다 난데없이 오렌지가 후두둑 떨어졌어/ 능소화는 겨울에도 피어났어/ 꿈속에서도/ 체리 껍질과 바나나 껍질을 밟고 미끄러졌어...
- 58년 개띠 : 앞만 보며 달려 왔어요/ 뒤를 볼 겨를도 없었어요...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서 멈췄어요/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속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그림자가 꿈틀거렸어요/ 뒤를 돌아보니 거울이 있었어요/ 내가 있었어요/ 잊고 있었던 얼굴에는 물굽이가 가득했어요/ 어디로 흘러도 이상할 게 없는 표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