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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름이 있었다

오은 | 아침달 | 2022년 6월 3일 한줄평 총점 10.0 (4건)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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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시 > 시/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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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오은 시인의 『나는 이름이 있었다』가 아침달에서 출간되었다. 2009년 민음사에서 출간한 첫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을 시작으로, 2013년 문학동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2016년 문학과지성사 『유에서 유』를 선보이며 활동은 이어온 시인은 2018년 현대문학의 『왼손은 마음이 아파』 발간과 거의 동시에 아침달 시집을 발간했다. 『나는 이름이 있었다』는 서른두 편의 ‘사람’ 연작으로 구성된다. 「사람」으로 시작해서 동명의 시 「사람」으로 끝을 맺는 이 시집은 읽는 이에게 갖은 사람과의 만남을 선사한다. 「궁리하는 사람」, 「읽는 사람」, 「마음먹은 사람」, 「비틀비틀한 사람」, 「세 번 말하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을 경험하게 한다.

목차

사람
궁리하는 사람
바람직한 사람
얼어붙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
드는 사람
빠진 사람
읽는 사람
좋은 사람
옛날 사람
도시인
손을 놓치다
마음먹은 사람
산책하는 사람
비틀비틀한 사람
일류학
큰사람
애인
응시하는 사람
갔다 온 사람
선을 긋는 사람
주황 소년
유예하는 사람
58년 개띠
계산하는 사람
무인 공장
서른
시끄러운 얼굴
물레는 원래 문래
세 번 말하는 사람
한발
사람
부록
않는다
물방울 효과

저자 소개 (1명)

작가 한마디 말들은 여전히 내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나는 말을 아끼는 것보다 그 넘치는 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싶다. 거기서 나만의 리듬을 찾고 싶다. 나만의 언어를 건져내고 싶다. 등단한 순간과 시인이 된 순간이 다르다고 믿는 사람.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은 정말이지 열심히 한다. 어떻게든 해내고 말겠다는 마음 때문에 몸과 마음을 많이 다치기도 했다. 다치는 와중에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삶의 중요한 길목은 아무도 시키지 않았던 일을 하다가 마주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니 오히려 그랬기에 계속해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쓸 때마다 찾아오는 기진맥진함이 좋다. 무언가를 해냈다는 느낌 때문이 아니라, 어떤 시간에 내가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느낌 때문이다. 엉겁결에 등단했고 무심결에 시인이 되었다. 우연인 듯, 필연적으... 등단한 순간과 시인이 된 순간이 다르다고 믿는 사람.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은 정말이지 열심히 한다. 어떻게든 해내고 말겠다는 마음 때문에 몸과 마음을 많이 다치기도 했다. 다치는 와중에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삶의 중요한 길목은 아무도 시키지 않았던 일을 하다가 마주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니 오히려 그랬기에 계속해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쓸 때마다 찾아오는 기진맥진함이 좋다.

무언가를 해냈다는 느낌 때문이 아니라, 어떤 시간에 내가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느낌 때문이다. 엉겁결에 등단했고 무심결에 시인이 되었다. 우연인 듯,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순간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무언가를 해냈다는 느낌은 사람을 들뜨게 만들지만, 그것을 계속하게 만드는 동력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글쓰기 앞에서 번번이 좌절하기에 20여 년 가까이 쓸 수 있었다. 스스로가 희미해질 때마다 명함에 적힌 문장을 들여다보곤 한다.

“이따금 쓰지만, 항상 쓴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살지만 이따금 살아 있다고 느낍니다.” ‘항상’의 세계 속에서 ‘이따금’의 출현을 기다린다. ‘가만하다’라는 형용사와 ‘법석이다’라는 동사를 동시에 좋아한다. 마음을 잘 읽는 사람보다는 그것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02년 봄 『현대시』를 통해 등단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 『왼손은 마음이 아파』, 『나는 이름이 있었다』와 산문집 『너는 시방 위험한 로봇이다』, 『너랑 나랑 노랑』, 『다독임』이 있다. 박인환문학상, 구상시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작란作亂 동인이다.

출판사 리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오은 시인의 『나는 이름이 있었다』가 아침달에서 출간되었다. 2009년 민음사에서 출간한 첫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을 시작으로, 2013년 문학동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2016년 문학과지성사 『유에서 유』를 선보이며 활동은 이어온 시인은 2018년 현대문학의 『왼손은 마음이 아파』 발간과 거의 동시에 아침달 시집을 발간했다.

『나는 이름이 있었다』는 서른두 편의 ‘사람’ 연작으로 구성된다. 「사람」으로 시작해서 동명의 시 「사람」으로 끝을 맺는 이 시집은 읽는 이에게 갖은 사람과의 만남을 선사한다. 「궁리하는 사람」, 「읽는 사람」, 「마음먹은 사람」, 「비틀비틀한 사람」, 「세 번 말하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을 경험하게 한다.

무인 공장에 내가 있었다. 무인 공장인데 내가 있었다. 무인 공장인데 내가 있는 것이 유일하게 습득한 기술이었다. 어느 날에는 스위치를 켜는 심정으로 불쑥 내 이름을 발음해보았다. 무인 공장과는 달리, 나는 이름이 있었다. 무인 공장과는 달리, 나는 사람이었다.
―76쪽 「무인 공장」 중

심지어 사람이 없어야 할 「무인 공장」에서까지 독자들은 사람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이 없는 공간에 머무는 화자가 ‘무인 공장’과 ‘나’를 비교하며(‘무인 공장과는 달리, 나는 사람이었다’) 사람으로서의 존재감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까닭이다. 결국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 없어도 사람인 채 버티’는 존재이며, ‘무인 공장인데 내가 있’는 것처럼, 곁에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도 사람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스위치가 다시 켜지지 않’게 된 이후에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없게 된 화자는 말한다. ‘비로소 무인 공장이 무인 공장다워졌다’고. 결국 ‘스위치가 켜’져 있다면 제 아무리 무인 공장에 있더라도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방증한다.

소란 때문에 궁금해진 옆 반 선생님이 우리 반을 찾았다 장 선생님 어인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장 선생이 선생님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곤 낄낄 웃었다 김 선생은 아직도 그 게임을 해요? 이럴 때 보면 꼭 옛날 사람이라니까 장 선생의 말에 김 선생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새 새로운 게 나왔나요? 그새라니요, 한 달이 넘었는데! 업데이트를 좀 하세요, 업데이트! 장 선생의 훈계에 제기를 차던 아이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순식간에 옛날 사람이 된 김 선생의 얼굴이 붉어졌다
―38쪽 「옛날 사람」 중

『나는 이름이 있었다』에는 사람만큼 다양한 대사가 등장한다. 주고받는 대화에서부터 혼잣말(그는 고개를 떨구며 혼잣말을 했다. 친했었는데…….―66쪽, 「유예하는 사람」 중), 그리고 독백까지도. 그 까닭에 이 시집은 각각의 시편이 누군가의 일상이자 하나의 에피소드처럼 보이기도 한다. 처음 보는 시가 이토록 정겨운 이유는 시인이 만나고 거쳐 온, 이 시집에 기록한 사람들이 대단히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일반적인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름이 있었다』를 읽는 독자들은 시 속 장면들이 어디선가 경험한 것처럼 일상과 맞닿아 있다고 느끼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와 같은 까닭에 독자들은 『나는 이름이 있었다』에 쉽게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을 테다. 인간이라면 으레 느낄 법한 감정-후회, 환희, 선호, 기쁨, 부끄러움, 분노(사람을 뭐로 보고 이런 걸 줘요?//불우 이웃을 도울 사람이 화를 냈다―34쪽 「좋은 사람」 중)-들이 곳곳에 머물러 있으니 말이다.

사람과 사람, 그 내면에 흐르는 특별한 감정

같은 곳에서 출발했지만 지금 나는 여기에, 너는 거기에 있다. 많이 변했구나. 나는 말했고 너는 웃었다. 오래되었잖아. 나는 그 말이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말인지 헤어진 지 오래되었다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둘 다. 너는 덧붙여 말하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내 마음을 읽는 것은 여전히 잘하는구나. 그럼, 오래되었잖아. 그 말은 분명 우리가 오랫동안 만났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둘 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첫사랑이었다.
―94쪽, 산문 「않는다」 중

『나는 이름이 있었다』에는 오은 시인의 두 편의 산문이 수록된다. 시편에서 사람 그 자체에 관해 이야기했다면, ‘너’와의 이야기 「않는다」에서는 사람과의 ‘관계’와 화자가 느끼는 ‘감정’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시인이 제시하는 BGM을 재생하고, 그 리듬까지 독서인 양 읽어 내려가다 보면, 화자의 감정에 동화되고 나아가 그 감정에 눅진하게 녹아드는 경험에 이르기도 한다. 시인은 『나는 이름이 있었다』를 통해 사회 속의 사람,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 ‘나’로서의 사람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람’, 그리고 그 내면까지 다각도로 이야기하고 있다.

“나도 모르게 나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들을 기록하고자 했다.”

시인의 앞선 시집들에서 언급되던 요소가 언어유희와 말놀이, 그리고 그 이면에 드리워진 사회 비판과 블랙유머였다면 이 시집에서는 ‘삶’ 그 자체에 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시인은 『나는 이름이 있었다』를 사람 연작으로 꾸린 이유를 ‘나도 모르게 나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들을 기록’하고자 했기 때문이라 밝혔다. 그가 말한 ‘사람’은 기인이나 달인과 같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그저 주위에 있는 사람, 스쳐 지나간 사람 등, 이어지거나 이어지지 않은, 부딪치거나 부딪힌 사람이며, 마침내 그의 삶을 뒤튼 사람들의 나열이다. 사람을 기록하겠다는 애초의 목적은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고 시인은 고백한다. 시인의 고백으로 말미암아, 독자들도 편편의 시를 통해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익히 알고 있던 나, 여태 몰랐던 나, 알지만 외면했던 나…… 결국은 ‘사람’인 나를.

물방울 한 점이 바다를 들썩이게 만든다. 물방울은 그저 몸을 한 번 뒤틀었을 뿐이다. 자신의 몸을 신나게 미끄러뜨렸을 뿐이다. 바다 위에서 물방울의 뒤척임은 나비의 날갯짓만큼이나 위태롭고 강력하다. 예의 그 예민한 섬들이 몸을 떨고 있다. 무시무시한 물방울 효과.
―105쪽, 산문 「물방울 효과」 중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시는 마지막 산문 「물방울 효과」에 이르러 ‘잘 여문 물방울이’ 되어 ‘굴러간다.’(104쪽) ‘물방울 한 점이 바다를 들썩이게 만든다’(105쪽)는 것은 시인이 앞서 언급한 ‘나도 모르게 나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인식하지 못할 만큼 작은 물방울 한 점이 바다에 닿아 들썩이게 하는 그 모양은, 「물방울 효과」에서 말하듯 ‘위태롭고 강력하다.’(105쪽) 사람은, 그 어떤 재능 때문이 아니라 그저 사람이라는 이유로 ‘무시무시한’(105쪽) 영향력을 지닌다. 하나, 혹은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을 모든 독자가 『나는 이름이 있었다』를 통해 그 영향력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이름이 있었다』가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나의 존재’를, ‘나의 이름’을 몇 번이고 더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시집이기를.

종이책 회원 리뷰 (3건)

구매 [104] 나는 이름이 있었다..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스타블로거 : 골드스타 소**기 | 2022.07.24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을 오해했습니다

사람이라 이해하고 사람이라 오해했습니다

사람을, 마침내 사람됨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시인의 말 中 

 

[ 손을 놓치다 ]


분침이 따라잡지 못한 시침

마음과 따로 노는 몸

체형을 기억하는 데 실패한 티셔츠

 

매듭이 버린 신발 끈

단어가 놓친 시

추신이 잊은 안부

 

그림자가 두고 온 사람

아무도 더듬치 않는 자취

 

한 명의 우리

 

[ 서른 ]

 

뜬구름을 잡다

어느 날 소낙비를 맞았다

생각 없이 걷다가 길을 잃기도 했다

생각이 없을 때에도 길은 늘 있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그런데 머리는 왜 안 돌아갈까?

 

너무 슬픈데 눈물이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다음 날, 몸 전체가 통째로 쏟아졌다

 

어른은 다 자란 사람이란 뜻이다

한참 더 자라야 할 것이다

나이를 먹어도 먹어도

소화가 안되는 병에 걸렸다

 

[ 한발 ]

 

이 사람아, 지금 오면 어떡해!

이 사람아, 벌써 가면 어떡해!

 

시침과 분침과 초침

정확히 두번 만나는 동안

 

늦거나 일렀다

 

아무리 간발에 다가가도

감정을 에누리할 수는 없었다

 

[ 사람 ]             
 

이 사람아 이게 대체 얼마 만이야!

우리는 길에서 만났다

처음으로 교복을 벗고 만났다

 

서로의 이름을 잊은 채

 

어딘가 낯이 익고

익숙한 냄새가 나고

사람임은 분명해서

 

너는 쫙 편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바닥에는 이름 대신

손금이 구불구불했다

 

어떤 길을 따라가도 순탄 할 것 같았다

 

눈이 있는 사람

사람 보는 눈이 있던 사람

 

재물선이 선명해서

나는 네가 큰사람이 될 줄 알았지

 

너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손금이 목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사람을 좋아하던 사람

사람 좋은 사람

 

잘못을 해도 쉽게 인정해서

나는 네가 새사람이 될 줄 알았지

 

손금 하나를 무작정 따라가다

갈림길에 섰다

 

등을 댈 것이냐 돌릴 것이냐

 

내가 뱉었던

네가 들었던

모진 말이

등줄기로 흘렀다

 

어딘가 귀에 익고

친근한 말맛이 나고

 

억양마저 확실해서

나는 쫙 편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양 볼이 뜨거워서

손금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손바닥을 맞추곤 하던 사람이

가차 없이 손바닥을 뒤집어버리듯

 

등을 돌리고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이 사람아 벌써 가면 어떡해!

 

사람이 사람을 불렀다

 

방금 전까지는

사람이었던 사람을

이 사람을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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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파워문화리뷰 《나는 이름이 있었다》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시집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YES마니아 : 골드 스타블로거 : 수퍼스타 키* | 2019.04.29



<왼손은 마음이 아파>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오은 시인의 시집. 같은 시인이 썼고 비슷한 시기에 나온 시집이건만, 왠지 나는 두 시집이 서로 많이 다르다고 느꼈다. <왼손은 마음이 아파>에 실린 시들이 간결하고 담백한 느낌이라면, <나는 이름에 있었다>에 실린 시들은 왠지 모르게 묵직하고 진한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니 순백의 표지와 진녹색의 표지가 각 시집의 느낌을 미리 알려주는 듯도 하다.


<나는 이름에 있었다>에는 33편의 시와 2편의 글이 실려 있다. 이중 제목이 '~사람'인 시만 21편이다. '도시인', '애인', '무인공장', '주황 소년'처럼 사람을 뜻하는 한자 '인(人)'과 사람의 하위 분류에 속하는 '소년'이 제목에 들어있는 시를 더하면 총 25편이 사람에 관한 시다('58년 개띠'도 사람의 특성을 나타내는 단어가 포함된 제목이지만 여기에는 포함하지 않았다). 그만큼 시인이 사람을 만나 사람을 겪고 사람을 생각하고 관찰하여 쓴 시가 많이 담겨 있다.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답게 사람을 궁리하'여 쓴 시들이랄까.


이중 가장 마음에 남는 시는 '유예하는 사람'이라는 시다. 시 속 화자는 새벽에 고등학교 동창의 죽음을 알리는 부음을 받는다. 장례식장에 도착한 화자는 그제야 친구와 '친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둘은 한때 같은 축구부에서 공을 찼고, 부활동이 끝난 후 옷을 갈아 입으며 장래에 뭘 하고 싶은지에 관해 이야기하곤 했다. 졸업 후 화자와 친구는 오랫동안 소원했다. 화자는 그 시절 그 추억은 그대로인데 친구는 더 이상 지금 여기에 없다는 사실이 야속하다고 느낀다. 멀리 있다고 느꼈던 죽음이 이만치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 허기가 진다.


이 시가 유독 마음에 남는 건 시 속 화자와 거의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에 고등학교 때 친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였고, 서로의 사정으로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기에 장례식장에서 영정 사진을 본 순간 슬픔과 미안함과 원망과 죄책감의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장례식장에서 친구와 이별한 후 오늘까지 단 하루도 친구 생각을 안 한 날이 없다. 친구와의 추억은 그대로인데 정작 친구는 지금 여기에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읽는 사람'이라는 시도 좋았는데, 이 또한 시 속 화자가 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취미가 뭐냐고 묻는 질문 앞에 작아지기 일쑤였던 화자는 독서가 가장 무난한 취미라는 말을 듣고 읽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 날부터 화자는 언제 어디서나 읽었다. 벤치에서든 식당에서든 지하철에서든 화장실에서든 계속 읽었다. 책이나 잡지나 신문이나 벽보나 전단이나 우윳갑 뒷면에 적힌 영양 성분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원에서 자주 마주치던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근데 읽지 않을 땐 대체 무얼 하세요?' 그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읽었지만 그는 정작 제 마음만은 읽지 못했다'


처음엔 이 시를 낄낄거리며 읽었다. 언제 어디서나 닥치는 대로 읽는 화자의 모습이 너무 나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을 읽고서는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읽는 것 말고는 다른 취미가 없어서, 이제까지 수천 권에 달하는 책을 읽었지만 정작 내 마음만은 읽지 못해서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어쩌면 이제 나에게 '읽는 사람' 말고 다른 별칭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쓰는 사람', '만드는 사람', '하는 사람' 등등.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 될까. 나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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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나는 이름이 있었다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 k****6 | 2018.11.25
- 궁리하는 사람 : ...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 /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지/ 숨기고 싶고

/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고/ 그래도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하는 이야기...

- 도시인 : #지하철 - 훗날을 기약하는 마음으로 갈아탄다/ 막히지 않기를/ 이따금 숨 고를 수 있기를/ 땅 아래로 들어가/ 강 위를 달리기도 한다...

- 손을 놓치다 : 분침이 따라잡지 못한 시침/ 마음과 따로 노는 몸... 매듭이 버린 신발 끈/ 단어가 놓친 시/ 추신이 잊은 안부/ 그림자가 들고 온 사람/ 아무도 더듭지 않는 자취/ 한 명의 우리.

- 주황 소년 : ... 소년이 주황 소년에서 성장하려고 할 때마다/ 노을은 밤새 볼을 붉혔어/ 길을 가다 난데없이 오렌지가 후두둑 떨어졌어/ 능소화는 겨울에도 피어났어/ 꿈속에서도/ 체리 껍질과 바나나 껍질을 밟고 미끄러졌어...

- 58년 개띠 : 앞만 보며 달려 왔어요/ 뒤를 볼 겨를도 없었어요...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서 멈췄어요/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속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그림자가 꿈틀거렸어요/ 뒤를 돌아보니 거울이 있었어요/ 내가 있었어요/ 잊고 있었던 얼굴에는 물굽이가 가득했어요/ 어디로 흘러도 이상할 게 없는 표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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