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머물다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다고 합니다. 저자는 우리가 어떤 장소, 사람 또는 세상을 떠날 때 우리가 무엇을 남기는지 탐색해 봅니다. 그리고 이 탐색으로 우리 존재의 핵심이 무엇인지 묻고 있는 책 <존재의 박물관>입니다.
나이가 점점 들어갈수록 머물다간 장소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 보려고 노력을 해봅니다. 평범하지만 왠지 뜻깊은 추억의 장소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은 앞으로의 미래보다 과거에 집착하는 성격탓이기도 합니다. 책에서는 평범함이란 없다고 말합니다. 어떤 것도 항상 있지 않으면 영원히 남지 않고 우리도 이것, 저것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은 생명의 표지를 담고 있어서 장소와 인간과 세상에서 이런 표시를 읽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 삶은 더 풍요로워진다고 했습니다. 물론 물질보다 정신적인 풍요를 이야기 하는 것일 겁니다. 인생의 중반 무엇을 남기고 갈것인지 사유해 볼 수 있는 책입니다.
장소는 세상의 풍파를 이겨내고 살아남는다. 변화하는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것, 이것이 장소와 우리의 차이점이다. 우리는 왔다가 사라진다. 장소가 남는다. 그리고 장소는 우리가 누구였는지, 우리가 그때 그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붙잡아둔다. 우리가 좋아했던 그대로 장소에 남는다. 추어 속의 모습으로 남아주기를 우리가 원한 그대로, 장소는 몇천 년의 세월을 두고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의 습관과 풍습을 기호와 상징으로 저장해 둔다. ---p.73
존재는 흔적을 남긴다. 우리가 머물다 떠나는 장소에, 만남과 헤어짐의 끝에, 그리고 삶의 자국.
그렇다는 걸 누구나 다 안다. 나의 생물학적 자국, 내 존재의 상징물, 사랑했던 이의 마음 속에 남은 잔상, 그리고 내가 죽으면 당분간 남을 나에 대한 기억.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기회는 적다. 아니 특별한 기회가 아니면 거의 없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급급한 우리는 늘, 어떻게든 자취를 남기지만 그 자취의 질과 양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에서 미래로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어느 지점을 잘라, 어느 장소를 택해, 혹은 어떤 이의 마음 속을 헤집고 단면을 살펴보는 일은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다.
스벤 슈틸리히가 이 책에서 한 일이 그런 일이다. 우리가 떠난 자리, 우리가 누군가를 떠날 때,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남기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철학적이고, 감상적이지만,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현실적이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 자체에 대한 다중성 때문일 것이다.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철학자들의 일인 것 같지만, 결국은 과거를 살아왔고, 현재를 살아가는 굉장히 현실적인 일인 것이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 아마 그럴 것이다, 라는 말로 퉁!쳐 버리기에는 아득하고, 또 너무나 중요한 미래가 있기에 때로는 철학적으로, 때로는 현실적으로, 감성적이 되었다가 다시 이성적인 사고를 하게 되는 것이다.
존재는 자국을 남기지만, 이 책은 종종 그런 자국을 남기길 원치 않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건 또 뭘까? 과거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 현실에 대한 도피? 미래에 대한 불안감? 그러나 결국은 그러한 자국을 남기길 원치 않는 이들의 시도 역시 어떻게든 자취를 남기게 마련이다. 그건 지독한 감옥과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인간으로 태어난 운명, 내지는 숙명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읽는 속도가 종종 느려졌다. 나라는 존재가 남긴 자취를 되새겨볼 수 밖에 없었다. 어릴 적 시골 학교 창문에 남겨두었던 내 지문은 사라졌을 것이지만(그 학교 교사가 옮겨 갔으므로), 그 자리에 생긴 주차장 한켠의 돌멩이는 내 눈길이 머물렀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 시절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주점의 한 구석방에서 토해내던 어설픈 주의, 주장들도 생각났고, 책마다 안쪽에 써넣었던 네 줄짜리 글귀도 떠올랐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장면을 떠올리려 했으나 그건 잘 되지 않았다. 책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은 잘 의식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어떤 위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에도)에 몸서리를 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땐 왜 그랬을까?... 우습게도 내가 죽은 후에 남겨질 사람보다 책들이 먼저 떠올랐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허나 나의 책들은 생명력을 잃고 말 것이다. 나의 육신이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하듯 나의 정신을 만들어간 책들 역시. 공포스럽진 않지만, 육신과 함께 사그러들 정신이 책들로 상징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 내 사무실을 뒤덮어가는 책들이 안쓰러웠다.
인터넷이라는 공간 때문에 자취가 더 선명하고, 더 어지럽게 남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면서 존재가 남기는 자취에 대해 깊게 사고할 기회는 줄어들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내가 살아오면서 남긴 자취, 앞으로 남길 수 밖에 없는 자국에 대해 생각하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존재의 박물관
스벤 슈틸리히 / 청미 출판사
흔적, 탐색, 마치 셜록 홈스와 왓슨이 범행 장소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할 때나 쓰이던 말들이 책의 서두부터 등장한다. 작가의 말처럼 인간이기에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휴가를 떠났던 장소나 머릿속, 낡은 사진첩이나 컴퓨터 하드웨어나 sns 귀퉁이 어딘가에 우리의 흔적을 남겨둔 채로 살아간다. 그 손때 묻은 흔적들은 유형의 존재로도 남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 무형의 존재로 의지해 흐릿하게 남아있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열망하고 그 아름다운 순간에 시간이 멈춰지기를 희망하기도 한다. 호랑이가 죽어 가죽을 남기듯 사람은 이름을 남기지만 이름만으로 아쉬워 자신을 기억하게 할 무언가를 더 남겨 남아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기를 원하기도 한다.
이 책은 아주 살뜰하게도 그것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며 인간이 무엇을 남기는지 생물적, 정신적 문화적 흔적들을 구체적으로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라고 한다. 구석구석 샅샅이 찾아다니다 보면 작은 메시지 하나는 분명 남겨줄 것인데 바로 자신의 일상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자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인생의 작은 순간이지만 현재의 삶에 조금만 더 충실하자는 것이다.
출근길 항상 보이던 스카이 뷰가 사라진 것을 새삼 바라보게 된다. 매일 오가며 바라보던 하늘인데 빽빽한 아파트로 둘러싸여 날씬한 여인의 옆태 같아 보이던 매혹적인 산의 능선이 어느새 가려져버렸다. 이러한 일들이 하루아침에 뚝딱하고 일어난 것도 아닌데 쉴 새 없이 바쁜 업무에 쫓겨 살며 일상에서 바라보던 것들이 나의 좁은 시야에서 조금씩 사라지는 것도 몰랐다. 일상에서는 아이들이 그렇다. 엄마 없이는 하루도 못 살 것처럼 그렇게 엄마를 불러대던 아이들은 이제 각자의 길로 발걸음을 내디뎠고 고사리 같던 손을 좍 펴고 자신의 일에 매진하고 있다. 부모는 자녀들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자녀들은 부모의 존재를 그리워한다는 글을 이 책 어느 모퉁이에서 읽었는데 줄을 긋지 않아 찾을 수가 없다. 이래서 책을 자꾸 소유하려고 하나보다.
책을 읽으면서 초점을 어디에 맞출 것인지 생각해 봐야 했다. 우리가 떠날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지, 우리가 누군가를 떠날 땐 무엇이 남을지,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무엇이 남을지 말이다. 내가 늘 고민했던 것은 예고되지 않은 내 삶의 끝에 남겨둔 기록의 흔적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때 청미 출판사 대표님은 댓글로 이 책을 추천해 주셨고 책을 펼치면서도 온통 나의 생각은 거기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호박 속에 갇힌 파리처럼 어느 순간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화석처럼 굳어갈 나의 이야기를 누가 펼쳐 볼 것인가. 책은 깔끔하게 대답해 준다.
과거는 온라인상에 계속 살아 있으며, 이 과거를 지워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과거는 과거대로 평안히 흐르게 하자.
"나 여기 왔었다.
자신을 영원히 남기고픈 열망 "
우리는 우리가 영원히 세상에 존재할 수 없음을 안다. 우리가 없어도 세상은 계속 돌아간다는 것 역시 어렴풋이 짐작은 한다. 우리가 사라져 잠깐 삐거덕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해는 다시 떠오른다. 그리고 우리는 잊힌다. 우리는 매우 덧없는 존재다.
page81
나는 나 자신에게 내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언제 무슨 일을 겪었고, 그때마다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돌이켜보면서 인생을 살며 품는 많은 의문의 답을 찾아보고 싶다.
page271
생각해 보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물건들은 추억을 송환하며 미소 짓게 한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책을 펼치며 그때 아버지는 이 책을 읽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메모라도 한 장 발견할라치면 마치 유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감탄을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떠나버리고 남아있을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물건이나 추억 처리에 대해 굳이 고민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나 자신이 살아가면서 버려야 할 것들을 정리하고 이후에 남은 것은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남길 것은 남기고 버릴 것은 버리면 된다. 나의 부모가 숨 쉬고 내뱉었던 공기를 내가 마셨듯 나의 자녀들도 내가 마시고 내뱉었던 공기를 마시며 살아갈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나를 돌아보게 되고 누구에게나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게 했다. 그러면서 내 머릿속 복잡한 생각들을 가뿐히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