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저
톰 보틀러 보든 저/이시은 역
지하늘 저
니콜라스 필립슨 저/배지혜 역/김광수 감수
다니엘 대닛의 책은 쉽지가 않다. 게다가 이번에는 언제나 논쟁적인 자유의지다. 읽다가 포기할 것을 각오하고 시작했는데 마치 웬만한 소설보다 흥미로워서 거의 단숨에 읽게 되었다. 자유의지의 문제는 항상 논쟁적이였는데 사실 왜 그렇게 큰 문제거리가 되는 것인지 이 책을 읽고서야 비로서 이해가 되었다. 죄의 응분, 처벌, 즉 사회에서 죄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의 밑바탕에 결국에는 자유의지의 논쟁이 있어왔던 것이다. 여전히 쉽게 이해될 수는 없고 다루는 주제가 상당한 무게감이 있지만 두 뛰어난 철학자의 설명, 핵심 논쟁들이 요약, 적절한 예시등으로 거의 모든것을 이해했다는 착각까지 들게한다. 작지만 위대한 책이 또하나 탄생했다.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진정 존재하는가?
자유의지 vs 운명론
기독교 세계관이 익숙한 나에게 자유의지는 진정으로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낳는다.
신은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순종하며 신을 사랑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지만 하나님은 미래를 다 알고 계신다 한다.
알고 계신다는 것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고, 운명이 결정지어진 것과 자유의지는 성립이 가능할 것인가? 에 대한 의문이었다.
철학에서는 이를 어떻게 설명할까?
그에 대한 흥미로운 대답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이 책 『철학 논쟁』이다.
이 책에서는 운명론(이 책에서는 결정론으로 표현)과 관계하여 자유의지에 대한 대표적인 주장을 제시한다.
양립가능론 :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양립할 수 있음 (자유의지는 참)
양립불가능론 :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양립할 수 없음 (결정론이 참이라면, 자유의지는 거짓)
자유의지론 : 양립불가론은 참이며 결정론은 거짓 (자유의지는 참)
자유의지회의론 :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니지 않음
강한 결정론 : 양립불가능론과 결정론은 참 (자유의지 거짓)
철학 논쟁의 전체적 구성은 철학자인 데닛과 카루소의 논쟁식으로 글을 주고받는 구조다.
여기서 데닛은 양립가능론자로 자유의지와 운명론의 참을, 카루소는 양립불가능론자로 운명론의 참과 자유의지의 거짓을 주장한다.
정말 간단히 맛보기로 이야기하자면 카루소는 모든 일이 행동을 하기까지의 앞선 무언가가 영향을 끼치고 결정을 최선으로 만들었음으로, 자유의지가 아닌 인과관계의 필연적인 행동으로써 본다. 그에 반해 데닛은 행동을 하기까지 그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들은 너무 많고, 그걸 추적할 수 없기에 (사람에 따라 행동에 영향끼치는 요소들의 순위를 자유의지에 따라 여긴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 자유의지는 참이라고 한다.
행위자의 내적 심리 상태가 통제할 수 없는 요인에 의해 인과적으로 결정'되는지는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죠. (145p.)
책의 구성과 Point.
단순하게 하나의 이론을 따라가는 것보다 반박에 반박이 오가는 과정 속에서 탄탄해지는 입장을 살펴보는 것이 굉장히 흥미로우면서도 (마치 교수님이 다른 교수님한테 반박당하는 상황..) 반대 의견을 어떻게 보완하면서 견고해지는 입장이 감탄스러웠다.
그 과정에서 두 학자들의 태도 또한 배울 점이 많았다.
우선 내가 자유의지와 책임을 설명하는 방식을 따랐을 때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염려하는 군요. 옳은 지적이지만, 이건 하나의 특성이지 오류가 아니에요. (167p.)
당신의 이런 주장에는 무릎을 쳤습니다. (169p.)
고맙습니다, 댄. 여러모로 유익한 예시들이로군요. (113p.)
자신의 의견에 반기를 드는 반대편의 사람에게 이렇게 우아하게 반응할 수 있다니.
당신은 당연히 동의하지 않겠죠, 그런데 어떤 근거로요?(166p.)
천만에요, 당신이 지금 강조한 문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 (135p.)
한편, 아주 예리한 말들도 오간다. 이 온도차이를 넘나드는 것도 재밌는 point...
N의 상상력 끝판왕 : 여러가지 예시들
나는 '만약에' 게임을 너무 좋아한다.
만약으로 가정하는 상황 속에서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현실사회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재밌다. 이 책에서는 너무나 흥미로운 가설들이 등장한다. 예컨대 두뇌를 조작당한 사람이 살인을 저지른다면? 철학적 좀비에 대한 가설 또한 너무 웃긴다 ㅋㅋ
책을 읽고...
자유의지의 유무는 양쪽 모두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자유의지가 거짓인 카루소의 의견은 구조와 태생적인 운의 불평등을 고발하는 것같은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시스템 속 사람들을 얼마나 손가락질해왔나 하는 반성이 들었다. 참인 데닛의 의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주체성과 우리가 어떠한 옵션에 처해있더라도 옳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했다.
사실, 내 의견은 읽는 컨디션에 따라 계속 달라졌다. 세상을 희망적으로 보고 주체적인 확신이 필요했던 때에는 데닛의 의견에 공감했고, 하루가 힘들어 내 일을 후회하게 되었을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외치는 카루소의 말이 큰 힘이 되었다.
어차피 적어도 죽을때까지 인간의 자유의지 여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필요하고 알아가야 하는 이유는 다각도의 차원에서 삶을 바라볼 수 있다는 측면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고정된 상황에서도 옳은 일이 무엇인지를 계속 묻는 필요를 느끼게 하기에, 동시에 자유의지라는 이름으로 선택권 없이 지금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에 그렇다.
『철학 논쟁』은 과거부터 뜨거운 논쟁거리였던 '자유의지론이냐 결정론이냐'에 대해 두 명의 철학자가 토론한 것을 실은 책이다. 대니얼 데닛은 자유의지론과 결정론이 양립할 수 있다는 양립가능론자로, 인간은 주체적인 행위자로서 성장하면서 통제력을 가지므로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본다. 반면 양립불가능론자이자 자유의지회의론자인 그레그 카루소는 운이 강하게 작용하는 이상 인간에게 응분에 따른 도덕적 책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가지의 개념을 가지고?특히 법적 처벌의 근거로써 응분의 몫에 대하여 치열하게 토론한다.
이 책의 쟁점은 인간의 의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에 대한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인식하는 작용 자체가 온전히 우리의 자유의지로 이뤄지는지 아니면 통제할 수 없는 요소에 의해 인과적으로 결정되는지를 따지는 문제 말이다. 만일 의식이 행위자의 자율에 의한 것이라면 데닛의 말대로 인간은 응분의 몫을 질 필요가 있겠고,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다른 근거?예방 차원의 구금 등?를 들어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이 맞다. 그러므로 인식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어떤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올지도 정해지겠다.
영국의 저명한 행동과학자 닉 채터에 따르면 의식이란 현재 지각한 것을 예전에 축적해 놓은 경험과 연결하고 재구성한 다음 우리가 새로운 것을 산출해내는 과정이다. 여기서 지각과 경험이라는 두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지각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전자로 구성된 감각기관을 이용해서 하는 것이니 카루소의 말마따나 구성적 운에 의해 정해진다고 볼 수 있다. 경험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느 나라에서 태어날지 어떤 집안에서 자라게 될지와 같은 현재적 운에 맞닥뜨리므로, 마찬가지로 이미 결정된 것이다. 그래서 의식은 '운에 의해 정해진 것 두 개를 조합해서 새로운 것을 산출해내는 과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므로, 의식이 우리의 자유의지가 아닌 운에 의해 정해진 결과물로 여겨진다.
이 관점에서 토론을 바라보면 데닛의 손을 들어 주기 어렵다. 그는 과거는 행위자가 아니므로 나를 통제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과거의 경험은 앞서 언급했듯 현재 지각한 것만큼이나 의식에 큰 영향을 주는 요소이므로 인간에게 족쇄로써 통제 기능을 한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그래서인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들 중 일부(어쩌면 대다수)는 어린 시절을 겪은 고생과 부당한 상황으로 인해 남들보다 일찍 자기 통제력과 책임감을 갖춘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라는 대목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오히려 부조리한 운을 인과적인 요소로 설명하고 불평등을 초래할 수 있다고 규정하는 카루소의 의견이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통제로부터 전혀 구애받지 않는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없지만, 각자 어느 정도의 주체성은 분명 가질 수 있다. 데닛이 인간은 교육 등을 통하여 변화하고 성장하면서 주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어 간다고 주장한 것에는 동의한다. 세상과 사회를 이해하면서 자기 자신이 통제되고 있음을 깨닫고 이에 순응하거나 저항하기를 선택할 수 있어서이다. 다만 그마저도 적정 수준의 두뇌나 좋은 학군과 같은 교육환경 등을 요한다는 점에서 운의 영향 아래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즉 주체자로서 실존하는 우리는 정말 큰 행운을 갖고 살아가는 셈이다. 그러므로 미국 공화당처럼 ‘(전부) 우리가 일구었다!’라는 당찬 말보다는 겸손한 태도를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