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늦은 감이 있습니다만 <무서운 그림; https://blog.yes24.com/document/7903777>으로 만났던 나가노 교코 교수가 쓴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의 역사>를 읽었습니다. 연초에 국립박물관에서 열렸던 ;합스부르크 600년 전시회‘를 관람하기 전에 읽었더라면 좋았겠다 싶었습니다. 독일문학을 전공한 교코 교수는 독문학과 서양문화사를 강의하면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합스부르크 왕조는 중세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느낌을 받는 한편 혼인으로 엮인 관계가 너무 복잡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중세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650년에 걸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독점하는 한편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롬바르디아-베네치아, 달마티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왕국의 왕을 배출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의 황금기에 합스부르크왕조가 왕위를 이었기 때문에 카를5세는 유럽 역사상 가장 많은 70개 이상의 나라를 지배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와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광은 복잡한 혼맥으로 일구어낸 것입니다. 이런 결과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합스부르크 가문의 가훈은 “전쟁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였다고 합니다.
교코 교수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인물들이 여러 나라에서 왕을 지냈기 때문에 수많은 예술작품의 대상이 되었던 것에 착안하여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역사를 다루어보는 기획을 했다고 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7세기 무렵 알자스 일대에 자리 잡았던 대귀족 에티호넨 가문의 방계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브라이스가우 백작 가문의 라트보트가 1020년 오늘날 스위스 아르가우 지방에 있는 하비히츠부르크에 성을 쌓고 백작령을 세우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시작되었습니다. 라트보트는 클레트가우 백작이었지만 그의 손자인 오투가 합스부르크 백작을 칭했던 것입니다. 합스부르크의 5대 백작 루돌프4세가 우여곡절 끝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루돌프1세가 되면서 가문의 영광이 시작되었습니다.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의 역사>에서는 15세기 말 독일 왕 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막시밀리안 1세의 초상을 그린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을 시작으로 19세기 말에 나폴레옹3세의 사주로 멕시코 황제가 되었다가 프랑스의 간섭에 반기를 들었던 베니토 후아레스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한 막시밀리아노 1세의 처형장면을 그린 에두아르 마네의 <막시밀리안의 처형>에 이르기까지 12명의 합스부르크 왕조의 인물을 대상으로 11명의 화가가 그린 12작품을 중심으로 한 인물사로 정리했습니다. 교코 교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인물사에 머물지 않고 작품을 그린 화가에 관련된 이야기는 물론 작품의 주인공과 관련된 다른 예술작품도 함께 소개하였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 사람들이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탓인지, 아니면 합스부르크 왕가가 소장한 작품에 사람들의 관심이 많은 까닭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람들을 그린 미술작품 12개 가운데 알브레히트 뒤러의 <막시밀리안 1세>를 비롯하여 프란시스코 프라디야의 <광녀 후아나>, 베첼리오티치아노의 <황제 카를5세의 기마상>과 <군복 모습의 펠리페 황태자>, 엘 그레코의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프란츠 사버 빈츠할터의 <엘리자베트 황후> 등 7작품은 이미 만나 본 듯합니다. 아돌프 폰 멘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플루트 연주회>는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그림의 무대가 된 상수시 궁전은 한번 가보았기 때문에 익숙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역사를 정리하는 새로운 접근법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만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를 해석하는데 일본 자료를 인용한 점은 일본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저로서는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몇 개월 전 큰 기대를 품은 채 방문했던 합스부르크 왕실 관련 전시 생각이 물씬 나는 독서의 시간이었다. 서구 사회 위주의 시선을 간직해 왔다고는 하나 그마저도 영미권에 집중된 터라 합스부르크의 역사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접할 기회조차 드물었던 터다. 대부분의 사정이 비슷해서인지 전시장 내부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모두가 우선적으로 매혹됐던 건 화려함이었으나, 이내 나는 이유 모를 숙연함에 빠져들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는 건 위대하면서도 공허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천하다고까지 하긴 뭐하나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한 집안이 유럽 대륙의 역사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거대한 흐름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여문 달이 급격히 비어가듯 이들의 세력 확장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유럽이 겪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그 중 첫 번째 전쟁의 직격탄을 맞았다. 물론 그보다 앞서 예전과 같은 기세등등함을 상실하였지만, 차라리 평범하게 살다 떠났더라면 덜 불행했을 거 같단 생각이 자꾸 드는 것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역사는 과거에 고착된 무언가처럼 여겨질 때가 잦다.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에는 그림이 따랐다. 글자가 빼곡하게 들어찼을 경우 지레 겁을 먹고 시작조차 않는다거나, 큰맘 먹고 책을 읽어 나갔더라도 눈의 피로 등을 호소하며 뒷걸음질 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림, 그것도 이미 만인에게 널리 알려진 명화를 바라보며 나는 저자가 설명하는 인물의 성향 등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당시의 그림은 오늘날로 치면 사진과도 같았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고스란히 옮기는 모사와 그림은 확연히 달랐다. 더구나 모델이 왕실 사람이다? 궁정의 부름을 받은 화가의 입장에서는 상대가 원하는 바를 확실히 간파하고, 때론 실제의 모습보다 더 아름다거나 화려하게 인물을 표현해야만 할 의무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화가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부역하기 위해 이의 이행에 나선 경우도 있을 것이다. 사실과 상상, 두 영역에 오묘하게 걸쳐 있는 것이 바로 명화일 셈인데, 그럼에도 당시로서는 그림만큼 해당 인물의 모습을 세심하게 드러내는 무언가는 없었으므로 인물을 파악하기 위한 도구로 그림을 활용해도 무방하다 하겠다. 열 손가락을 모조리 사용해도 헤아림이 불가능할 정도의 시간이 쌓였지만 그림의 생동감은 뛰어났다. 인물 주변의 배경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었다. 이 가문이 누린 명예, 부 등이 허구에 불과했는지 등을 유추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650년에 걸친 가문의 역사가 항상 위대했던 건 아니다. 어쩌면 가장 유명세를 지녔지 싶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민중의 실질적 삶과 유리된 삶을 살 탓에 기요틴의 이슬이 되고야 말았다. 만일 이 인물이 가문의 정략적 전술에 의해 희생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자신의 그릇에 맞는 상대를 만나 행복한 삶을 꾸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유망한 가문이 그러했듯 합스부르크왕조 또한 혈통을 무척이나 중시했다. 소위 피를 더럽히지 않기 위한 노력은 기이한 족내혼의 연속됨을 낳았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몇몇 그림에서 도드라져 보이는 인물들의 주걱턱은 유전적 결함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단순히 턱 모양만 안 아름다운 거였으면 좋았겠지만, 적잖은 이들이 충분히 영글지도 못할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야 말았다. 막대한 부를 활용해 아름다운 그림 따위의 수집에 열을 올리는 등 나름 인생을 즐긴 경우도 있긴 했다. 허나 그 스스로도 정치를 등한시 여겼다는 점에서, 완벽한 군주가 아니었기에 오히려 행복할 수 있었지 않았나라는 역설적 생각이 들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노심초사했을 마리아 테레지아의 모습이 순간 오버랩 되는 듯도 하였다.
지키고자 안간힘을 쓰면 지켜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술술 손아귀 밖으로 빠져 나가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노력을 어떻게 기울였느냐에 따라 이와 같은 차이가 빚어지기도 하겠으나, 개개인의 능력 여하보다는 왠지 운명을 조정하는 ‘적절한 때’라는 게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최초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위에 오른 루돌프 백작은 가문을 일으킬 그야말로 적절한 시점에 존재했던 것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왕족이라면 누구든’의 한 사람으로 지목 받아 살해당한 엘리자베트, 사라예보에서 암살됨으로써 제1 차 세계대전을 당긴 방아쇠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등도 나름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아내려 들었겠지만 때가 좋지 못했을 뿐이다. 지금의 나는 내 삶의 날개를 펼치기에 적절한 시점을 살아가고 있는지...
고맙게도 ‘명화로 읽는’ 시리즈가 꽤 여러 권 이미 출간됐거나 출간될 예정이었다. 예술은 어렵다, 인문학은 따분하다는 사고에 일격을 가할 독서가 앞으로도 여러 차례 가능할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