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은 고대 카르타고의 유명한 장군이다. 그는 선대의 유지를 이어 로마를 굴복시키는 것을 일생의 사명으로 여겼고, 마침내 오늘날의 스페인에서 기른 병사들을 이끌고 육로로 이동해 그 유명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간 인물이다. 단지 들어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후 무려 15년 동안 이탈리아 곳곳을 누비며 로마인들을 두려움에 떨도록 만들었던 독보적인 장군이었다.
이 책은 그 한니발의 일대기다. 어린 시절 바알 신전에서 아버지에 의해 로마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던 유명한 이야기부터, 코끼리까지 동원한 채로 알프스 산맥을 넘고, 그 유명한 칸나에 전투에서 수만 명의 로마군을 몰살시키고 로마 성벽 바로 앞까지 갔던 이야기... 하지만 결국 로마를 굴복시키지 못한 채 본국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패하는 이야기까지...(내용은 그의 죽음까지 나온다)
말 그대로 한니발의 일생을 차분하게 정리했다는 느낌을 준다. 그에 관해 얻을 수 있는 정보야 새로운 뭔가가 발견되지 않는 한 대개 한정적이고, 그걸 어떻게 정리하느냐의 문제인데 나름 성실하게 정리해 놓은 듯. 다만 비슷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2권 쪽이 재미도, 그리고 오히려 전문성도 좀 더 높아 보인다는 게 아니러니하달까.
물론 학자와 작가의 글쓰기 방식에 차이가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이 책의 저자가 한니발 전문 연구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글을 맛깔나게 쓰는 좋은 작가도 아니라는 점이전반적인 평점을 떨어뜨린다. 예컨대 책의 영문제목은 “Rome's Greatest Enemy", 즉 로마의 가장 위대한 적수(한니발)인데, 한니발이 어째서 로마의 ‘위대한 적’이었는지는 단순히 설명으로 서술할 게 아니라, 보여주는 방식을 쓰는 쪽이 훨씬 흥미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시오노 나나미의 책이 훨씬 더 낫다.
그렇다고 책 전체에 걸쳐서 당시 상황에 대한 탁월한 통찰이 자주 발견되는 것도 아닌지라 굳이 읽어야 할 필요성을 찾기가 어려웠다. 물론 몇 가지 사소한 정보들을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은 있다. 예를 들면 저자는 한니발 전쟁 당시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도시들이 로마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한니발에 편에 섰다고 말하는데, 이건 로마빠인 시노오 나나미의 책에서 보이는 일사불란한 로마연합의 이미지를 깨준다. 또, 한니발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북아프리카 출신의 황제인 셉티미우스가 한니발을 자신의 선조로 보고 그의 무덤을 복원했다는 내용은 새로웠고.
다만 저자는 한니발이 로마를 굴복시키지 못했던 것은, 로마가 당시의 일반적인 전쟁 관례와 달리 엄청난 피해를 입고도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 즉 로마가 당시의 전쟁 규칙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이건 좀 빈약한 설명 같다. “한니발이 이기지 못했던 것은 로마가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게 어떤 새로운 의미가 있는 건지..
책 표지가 멋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 주는 점수에서 1점은 표지 디자이너의 공이다. 영문판 원서 표지도 동일한 이미지(검은 코끼리 위에 올라탄 고대 장수, 아마도 한니발?)를 사용하지만, 한글판 쪽이 영문 폰트라든지 배색이 훨씬 감각적이다. 영문판 쪽은 그냥 외국 나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페이퍼백 느낌의(실제로 페이버백이긴 하다) 허전한 표지랄까.
고대 로마사를 좋아한다면 나쁘지 않게 읽을 수 있긴 하겠지만, 본격적인 전사(戰史) 연구서도, 그렇다고 고대 문명사에 대한 전문적인 안내서도, 실감난 묘사가 들어간 소설도 아닌 좀 어정쩡한 포지션이라는 게 아쉬운 점.
한니발이라는 이름은 롤랑처럼 어린 시절에 읽던 어린이 대상 잡지에서 처음 만났다. 그 옛날, 나폴레옹에 앞서 코끼리까지 동반한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로 쳐들어갔던 카르타고 사람이라는 내용으로 기억에 남았다. 그때에는 한니발이 왕 정도 되는 줄 알았다.
그 뒤로 한니발이란 이름을 몇 차례 더 만나게 되었다. 학교의 세계사 시간에도 만났고 사회에서 리더십 공부할 때에도 만났다. 특히 리더십 공부할 때 사용했던 자료들에 나오던 한니발에게서는 어린 시절의 짧은 기억을 훌쩍 뛰어넘는 거인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삶의 궤적을 전체적,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이 나온다는 정보를 접했을 때 기뻤다. 드디어 한니발의 여러 면모를 종합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책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므로.
한니발 바르카(B.C.247~B.C.184)는 카르타고의 장군이었다. 그는 로마가 유럽과 지중해의 패권국가-책에서는 로마를 제국, 제국주의라는 용어로 표현하는데 이때의 로마는 공화정이었으므로 제국이라 하기 어렵고 제국주의도 근대 이후에 등장한 개념이므로 차라리 패권국가라는 표현이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로 자리매김하던 시기에 그런 로마에 맞서 주도권을 가지고 전투를 벌이면서 로마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최후의 승자가 되지는 못했다.
필립 프리먼은 책의 처음에서 고대 세계 강대한 제국의 압도적 힘에 저항했던 한 지도자의 실제 모습을 그려내는 데 중점을 두었다(P.12)고 책을 쓴 의도를 밝힌다. 즉 로마인인 리비우스나 폴리비오스가 남긴 초창기의 기록에 근거해 로마 중심의 관점에서 한니발을 폄하하여 평가하던 시각을 벗어나 새롭게 한니발을 바라보려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카르타고는 로마에 의해 멸망하였고 승자인 로마의 입장에서 남긴 기록만 남은 한계를 넘어보려 한 셈이다.
그런데 이런 프리먼의 글쓰기 방향을 보면서 약간의 의문이 생겼다. 수 천년 동안 한니발에 대한 평가는 한 방향으로만 고착되어있었던 건가? 단편적이지만 이전에 보았던 자료들이나 도서 등에서 로마 중심의 평가만을 본 것은 아니라서 든 의문이었다. 글의 전개 방향이 궁금해졌다.
프리먼은 논픽션의 기반 위에 픽션을 가미한 글쓰기를 통해 기록 중심의 건조한 전달을 넘어선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러 전투의 전개 과정은 논픽션의 모습을 띠지만 한니발의 인간성과 리더십 등 개인의 모습을 그릴 때에는 픽션을 가미한 글쓰기가 보인다. 그럼으로써 이야기가 풍부한 소설을 읽는 듯한 즐거움이 가미된다. 책은 카르타고의 탄생 설화에서 시작하여 1차 포에니 전쟁을 포함하는 한니발 탄생 이전의 카르타고와 로마의 관계에서부터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포에니 전쟁은 총 3차에 걸쳐 일어났다. 포에니는 페니키아를 로마식으로 읽은 것으로 로마 입장에서 페니키아의 한 부류인 카르타고와 치른 전쟁을 표현하는 말이다. 한니발은 1차 포에니 전쟁 후에 태어나 2차 포에니 전쟁을 온전히 감당했다. 3차 포에니 전쟁은 그의 사후에 발생했다. 그런 한니발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인들에게 깊은 적개심을 품고 자랐(P.10)다. 1차 포에니 전쟁의 패배로 카르타고는 로마에 많은 영토를 빼앗겼고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야 했으며 영향력을 크게 상실하면서 고통을 겪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카르타고에는 로마에 반감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다. 한니발의 아버지인 하밀카르 같은 이들이었다. 카르타고의 유력 가문 출신인 하밀카르는 한니발을 포함한 세 아들들을 데리고 스페인 정벌에 나섰다. 상업국가였던 카르타고의 부를 확충하고 갈리아를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넘어오려는 로마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한니발은 9살이었다.
로마는 팽창하고 있었고 적어도 군사력으로 이들과 맞설 수 있는 세력은, 적어도 당시의 유럽 지역에서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로마는 그 힘으로 주변의 국가들을 굴복시키고 동맹이라는 이름 아래로 끌어들여 훗날의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그들을 수탈했다. 로마의 관점에서 보면 카르타고 역시 그런 주변 국가들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가진 게 훨씬 많은.
하밀카르는 스페인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충했지만 로마 역시 스페인 쪽으로 발을 뻗고 있었다. 두 세력의 충돌은 이미 오래 전에 예견된 사태였다. 이 와중에 한니발이 18살이 되던 해에 하밀카르가 스페인에서 전사하고 그 자리를 이은 한니발의 자형 하스드루발 역시 7년 뒤에 동맹국들에 의해 살해 당하자 한니발은 드디어 지휘관이 된다.
한니발은 로마를 약화시키지 않으면 카르타고의 미래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는 로마를 공격하기 위한 전력을 확보한 후 로마군이 주둔 중인 스페인 지역의 사군툼을 공격하여 점령한다. 사군툼 전투의 의미가 적지 않은데 책에서 분명히 언급하지 않는 사안 중 하나는 한니발이 공성전으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상당히 고전했다는 점이다. 나중에 그가 로마를 공략하지 않은 점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많은 비판과 아쉬움이 따랐는데 그 배경에는 로마인들과 공성전을 펼치면 엄청난 희생이 따른다는 점을 고려한 바도 있었다고 추측하게 된다.
한니발이 사군툼 전투 이후 알프스를 넘고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가 트라시메노 전투나 역사에 그 이름이 크게 남은 칸나이 전투 등의 대첩을 이루면서 로마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과정은 여기에서 언급하지는 않겠다. 로마에게는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웠지만 한니발에게는 길고도 찬란했을 그 과정은 책을 통해 모두 직접 만나야 할 모습이라고 보는 까닭이다. 전투의 장면뿐 아니라 전투를 기획하고 전쟁의 큰 틀을 움직이는 전략가, 리더의 모습까지 보게 되리라.
그러나 한니발은 결국 로마를 직접 공략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12년 동안 누볐던 이탈리아 반도에서 물러나 카르타고로 돌아가는 결과를 맞이한다. 결국 이 후퇴는 수십 년 후 카르타고의 멸망으로까지 연결되고.
한니발은 용장勇將이었고 지장智將이었으며 덕장德將이었다. 전투에 나서서는 용감히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에 앞서서는 어떻게 승리를 쟁취할지 계획하고 승리의 조건을 철저히 준비했다. 아울러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의 마음을 헤아려 그들의 필요를 미리 충족시켜주고 그들과의 약속을 철저히 이행함으로써 충성을 이끌어냈다.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군사 지휘관으로서 한판 승부만이 아니라 남의 본거지에서의 긴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리더였다.
게다가 한니발은 위대한 장군 이상의 존재였다. 그는 노련한 정치인이자 능숙한 외교관이었고, 자기 가족과 나라에 진심으로 헌신한 애국자였다.(P.11) 자신의 군사력이 로마의 그것에 비해 뒤쳐짐을 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군사 전술을 개발하고 궁극의 승리를 위한 전략을 수립하여 실행했다. 로마라는 강력한 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해 먼저 그들의 동맹 구조를 파훼하고자 했고 상당 수준 그 목표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는 운장運將은 아니었다. 로마는 너무 강력했고 그의 조국은 멍청했다.
카르타고에 남아있던 세력들은 한니발을 적극 지원하는 것과 같은, 로마에 대해 그들이 진정으로 취했어야 할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미 1차 포에니 전쟁을 통해 로마의 성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들의 정세 판단은 서툴렀다. 이들은 한니발을 시기하고 견제하려는 욕심이 앞서 필요한 때에 지원하지 않음으로써 그가 어쩔 수 없이 카르타고로 귀환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전장은 이탈리아 반도 내였다. 병참 라인이 확보되지 않는 적지에서 전투를 계속함과 동시에 군대의 양식을 조달하고 거주할 곳을 찾으며 기존의 동맹을 유지하면서 로마의 동맹을 깨트리기도 해야 했다. 거기에 스페인에서 한니발을 지원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진군했어야 할 동생들이 알프스에 도달하기도 전에 스키피오에게 패배하면서 로마를 최종적으로 패퇴시킬 동력을 상실하기도 했다. 전투가 계속 되면서 로마가 그의 전술을 잘 파악하고 대응함으로써 전투의 효율은 떨어졌다. 하늘은 그를 마지막 순간에 선택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놓고 보면 한니발이 로마를 멸망의 문턱에까지 몰고 갔다는 사실이 기적일지도 모른다.
한니발의 마지막은 슬프다. 잃어버린 힘을 다시는 되찾지 못하고 로마에 쫓겨 다녔다. 로마는 여전히 그를 두려워했지만 그와 손을 잡으려는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비유하자면 이제 한니발은 50살 먹은 메시가 된 셈이었다. 아직 뛰어나지만 크게 활용되기는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로마의 지독한 추격을 벗어났다.
카르타고가 로마에 패한 가장 큰 원인은 국가 정체성에 있었다고 본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전사가 아닌 상인이고 국가 방위를 용병에 의존(P.33)했기 때문에 카르타고를 직접 정복하거나 그들이 구축한 해외의 경제 거점 중 일부라도 차지하게 되면 상당한 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자신들의 이런 위치를 잘 파악해서 로마가 패권국가로서 보이던 모습을 조금이라도 벤치마크하여 방위력을 증강했다면 로마와의 경쟁에서 어떤 결과를 빚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의 상황을 카르타고의 상황에 대입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당장 중국이나 일본처럼 경제 총량과 국방 총량, 인구 수 등에서 앞선 주변 국가와 전쟁을 벌이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때 우리에게 한니발과 같은 불세출의 전사가 있다면 그를 믿고 전쟁에 뛰어들어도 될까? 시대가 다르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가 승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전쟁은 총력전이고 개략 그려보아도 우리가 그들보다 힘의 총량에서 떨어짐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전투가 아니라 전쟁은 국가 시스템으로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기록 상으로 한니발 자신이 패배한 큰 전투는 마지막의 자마 전투뿐이었다. 하지만 2차 포에니 전쟁이라는 큰 틀은 로마의 승리, 카르타고의 패배로 결말이 났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에도 한니발의 실패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끊임없이 살피고 지속적으로 힘을 키워 누구라도 우리를 쉽게 건드리지 못하도록 자리매김하기가 우리가 취해야 할 기본 자세라고 혼자 생각해본다.
책을 통해 한니발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오래 전의 이야기지만 지금 돌아봐도 가질 수 있는 시사점도 있고. 프리먼의 방향이 내게 통했다.
P.S.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내용이 온통 텍스트로만 되어있다는 데 있다. 책의 첫 부분에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이 이동한 경로를 나타내는 지도 하나가 나오지만 많이 부족하다. 특히 전투를 위해 한니발이 이동하는 경우나 개별 전투에서 진법을 운용한 경우 모두 글만으로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남는다.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도 그 모습이 그려지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픽 자료가 추가되었다면 그런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