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시대를 외면하는 비겁한 태도란 소릴 들을 수도 있겠으나, 가급적 편안한 것들을 선호하는 마음이 강한 요즘이다. 도처가 심각한데 굳이 애써 묵직해질 필요는 없는 거 아니냐며, 읽는 책을 고름에 있어서도 같다. 가벼운 듯하지만 쉬이 쓰이진 않았을 글, 에세이는 이런 때일수록 제격이다. 비교적 솔직하고도 담백하게 담긴 타인의 일상을 엿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므로 나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다.
책 제목이 <읽는 생활>이다. 유독 책을 아니 읽는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건 수년도 더 전이다. 실제 책을 그토록 읽지 않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세태가 그러하다 하므로 책을 읽는 행위는 곧잘 높은 평을 받고는 한다. 때로는 페이지 한 장 넘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기도 한다. 책 읽는 사람은 정녕 이상한 부류인 걸까. 모난 성격 탓에 홀로 떨어져 나오는 경우가 잦은 나는 일종의 현실 도피 차원에서 책을 읽을 때가 잦다. 다들 나와 같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가끔은 울컥하는데, 역시 저자의 독서는 달랐다. 수식어 ‘부지런히 나를 키우는’은 일종의 의도를 품고 있었다. 성장을 위한 독서, 어른이 되기 위한 독서. 영양 결핍이 신체의 빈약함으로 이어지듯 마음 또한 꾸준히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 안타깝게도 이를 알고 실천하는 이는 드물다. 어쩌면 나도 그런 부류일지도. 끊임없이 읽으려 들지만 딱 거기서 그치는.
오래 전 언니의 속독법을 접했던 날로부터 이야기는 출발했다. 책을 빠르게 속도 내어 읽는 일은 훈련을 통해 얼마든지 습득 가능하지만, 이를 실제 학습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본 바 없다. 아마 저자의 사정도 유사했을 것이요, 속독 교실에서 만난 이들의 정체는 당연 신기했을 것이다. 단지 빠르게 읽는 것만이 아닌, 그보다는 흐름을 놓치지 않고 분위기에 충분히 빠져드는 게 자신의 속독이라고 저자는 말했다. 무언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어진 리코더에 얽힌 이야기를 읽으며 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수업 시간에 다루므로, 대다수가 유년 시절 리코더 연주 방법을 터득했겠지만 어른이 된 후에 자발적으로 리코더를 꺼내 드는 이는 드물다. 시험 문제를 하나라도 더 맞추기 위해 읽는 지문이 영 재미 없듯, 수업의 일환으로 배운 리코더 소리도 그다지 아름답지는 못했을 터. 안타깝지만 그렇게 접한 리코더는 오래도록 서랍장 속에서 먼지만 쌓여가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버림을 받았다. 예전에 들은 것과는 전혀 다른 소리, 무엇보다 손을 뻗어 스스로 연주를 시작하게끔 만들 정도의 매력을 뿜어대는 소리. 꼭 리코더일 필요는 없다. 책읽기든 글쓰기든, 그런 분야가 하나 즈음 나에게도 있었으면 싶은 욕심이 순간 치솟는 듯하였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 삼는 것에 대한 생각, 곁에서 지켜만 보다가 단 이틀이긴 하나 지인의 서점을 도맡게 된 경험, 나를 설레게 한 문장 “평소에도 시를 쓰니?”까지. 무언가를 꾸준히 그리고 써 온 저자의 삶이 글에서 읽혔다.
그렇기에 나는 쓰는 일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쓰는 독자가 된다면, 어제의 책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오늘은 생겨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의 문장을 잃게 되었을 때 그 자리에서 쓸 말이 생각난다. 잃음과 동시에 누리는, 희망찬 상실을 맛보게 된다. -p189
경험이 주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이와 같은 문장도 가능했으리라. 극과 극이 맞닿아 있다는 지혜, 상실이 절망 아닌 희망일 수도 있다는 해석이 나에게도 유효하기를. 바람이 처음부터 컸던 건 아니었다. 읽다 보니 왠지 지금 난 내 눈에 보이지 않는 키를 키우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어쨌건 꾸준히 읽었다. 지금도 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내 생활도 ‘읽는 생활’이길 바라는 마음이 새삼 크다는 걸 실감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얼마나 멋진 삶인지.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고 책을 곧잘 읽곤 했다. 꾸준히 오래오래 읽었다기보다 좋아하는 책을 조금씩 읽어가다보니 지금의 내가 되어있었다. 책을 많이 읽었다고해서 대단한 사람이 되어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흔들리고 한치앞도 모르겠고 부족한 것 투성인 사람이라는 사실이 씁쓸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놓지 못하는 것은 책이 나를 살리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있으면 이 곳이 현실이 아니게 된다. 어쩌면 책으로 도망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물으면 늘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책에서 본 좋은 구절들을 쓰고 보여주며 내 마음이 이렇다고 조심스레 그러나 어저면 대놓고 알렸던 거 같다.
이제는 사람들이 읽지 않는 시대라고 했다. 하지만 읽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 책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오롯이 즐거움이 아니더라고 괴로움과 슬픔이 있더라도 읽는 생활을 놓고 싶지 않다. 나를 부지런히 키우지는 못해서 천천히 조금은 키우고 있다고 믿고 싶다.
책을 읽으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한 걸음씩 내딛고 있는걸까? 나를 알아가고 나를 표현하고 나를 다독이는 그런 쓰기를 하고 싶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선뜩 답하지 못한다면, 어떤 책을 닮고 싶으냐고 조금 고쳐보자. 어쩌면 그리고 싶은 내 모습이 책으로는 금방 떠오를지도 모른다. 나는 서점의 작은 코너에서, 누구나의 생활을 응원하는 한 권의 책으로 언제까지나 꽂혀 있고 싶다. 그런 책을 닮은 나를 꿈꾼다.
「책을 닮은 사람」중에서
책을 알아가는 건 재미있는데, 아무래도 나를 알아가는 데에는 큰 재미를 느끼기가 어렵다. 나를 이렇게 보면 어떨까. 책을 대하듯이 나를 대하면 어떨까. 나는 왜 책 앞에서만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내가 되는 걸까. 나 스스로를 앞에 두고도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선은 매일 아침 새로이 만나는 나를 느리고 낯설게 읽어나가면 어떨까.
「오늘의 단어」중에서
다양한 종류의 쓰기가 있고, 대부분의 쓰기는 읽기를 바탕으로 한다. 여기서 읽기란 굳이 책이라는 형태적 정의에 국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읽을 것의 종류와 형태는 생각보다 다양하고 세분화되어 있다.
작문은 읽기 보다 어려울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머리속에서 부유하는 이미지를 문자로 구조화 하는 것도 쓰기이고, 분석적 사고를 바탕으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인과에 따라 어떤 논리와 구조를 제시하고 이를 증명하느라 글을 활용하는 것도 쓰기이다.
이 두가지 외에도 쓰기의 방법은 다양하겠고, 각각의 쓰기가 가지는 특성이 있을 뿐이지 우열이 있다고 볼 것은 아닐 것이다.
읽기는 필연적으로 사유와 연결되는데, 읽음을 통해 얻은 정보나 이미지 외에도 개인이 개인 밖에 있는 상황이나 사정에 대하여 주관적으로 느끼고 판단하는 것은 인식에 관한 것으로서 입력과 입력된 내용에 대한 사고를 포함하므로 자연스럽게 개인의 내밀한 자의식에 바탕을 둔 철학을 바탕으로 하게된다.
사실 이 둘을 엄밀하게 구분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읽은 것을 통해 개인의 가치관이 형성되고 기존의 내밀한 자의식과 상호작용하면서 읽은 것들을 소화 또는 내재화하고 그 결과 사유와 사유에 바탕한 산출(쓰기와 같은)이 발생시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책을 좋이하는 사람으로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니는 일은 즐겁고 신기한 경험이다. 그런 좋은 마음이 책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더 나아기 글을 쓰는 사람으로까지 진전시킨 작가의 노력과 애정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책을 좋아하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거짓말 같은 끌림도 있고, 논리의 영역을 벗어난 취향도 있을 수 있다.
그 가운데 나는 책이 주는 혹은 책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책에 대한 믿음이 크다.
책의 내용을 기억하는 것보다 책에서 얻은 교훈이니 지혜가 자연스럽게 스스로 구축하고 일궈나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에 긍정적으로 기능하고 또 그런 길 가운데 고난과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책이나 읽음에 대한 따듯한 사랑은 고백하기 부끄럽고 또 쉬이 용인되지 않기도 해서 누구에게나 밝히지는 않지만 저자와 독자 관계에서 그런 마음을 책을 통해서나마 공유하고 니눌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