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상상력을 넘어서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경계선에 날렵하게 멈춰선 그녀는, 낯선 세계로부터 우연히 이곳에 도착한 문제적 인물 같다.
- 김소연, 발문 「유계영에 대한 짧은 별말씀」에서
유계영의 시는 우리를 자주 멈추게 만든다. 멈추어 서서 낯선 풍경과 조우하도록 만든다. 언어가 관습을 벗어나 낯설게 활용되고 적확한 표현을 찾으려는 사이, 독자의 눈길도 그 행간에 잠시 멈춘다. 이를 통해 선명하게 떠오른 낯선 이미지들은 그러나 무엇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언가를 설명하지 않겠다는 태도만을 견지하려는 듯이 보인다.
시인 김소연은 발문을 통해 “유계영의 시에는 속단이 없다.”라고 말한다. 쉬운 서정과 슬픔, 퇴폐와 관능, 명랑과 우아, 깊이와 선의 등에 쉽게 발을 들여놓지 않으려는 이유에서다. 어쩌면 “쉽지 않은 경로로 접근하려 애쓰는 태도에 시의 행로가 따로이 있다”고 믿어보는 것 같다고, 김소연은 말한다. 일반적으로 시가 서정과 관능, 우아와 깊이, 그리고 선악을 주요하게 다루는 예술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말은 또 다른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져준다. 그렇다면 쉽지 않은 길을 가야만 하는 시의 행로란 어떤 것이며, 왜 그래야 하는가. 혹은 유계영은 왜 그러한 길을 가려 하는 것일까?
눈동자 한 숟갈만 퍼먹어도 되겠니 매우 달콤할 테니까
고약한 네가 아름다운 시를 써와서 영혼이 하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 「좋거나 싫은 것으로 가득한 생활」 부분
시집을 펼치면 보이는 첫 시부터 독자들은 위반의 언어와 마주한다. 고약한 네가 아름다운 시를 써와서 영혼이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던 ‘나’는, 아침에 새치기하는 너의 부드러운 몸짓을 보고 미소 지으며 영혼이 하는 일을 조금 이해하게 된다.
또 다른 시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나는 내가 슈퍼마켓 매대에서 사과 한 알을 훔쳐 주머니에 집어넣는 것을 본 적이 있거든 (…) 다음 날에는 한입 베어 문 사과를 사과 더미 속에 깊숙이 찔러 넣고 돌아서는 것도 목격하고 말았거든 / 이것은 사라지는 즐거움 내가 나를 어기는 즐거움”(「에너지」).
이런 올바른 인간상에 위반되는 상상들은 시집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는데, 이런 상상력은 많은 생각을 가능하게 한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이런 생각이 뒤따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나를 어기는 일은 나를 관찰하는 데 적합하다. 둘째. 지상 위에 인간이 유일하게 옳은 생물은 아니다. 셋째. 인간은 옳음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옳음은 필연적으로 옳지 않음을 경유하며 드러난다.
그렇기에 내면으로라도 고약함을 알지 못하는 인간은 옳음에 관해서도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떤 것이 옳은 것이며 옳지 않은 것인가, 하는 판단의 문제도 뒤따른다. 때문에 인간은 단일하고 통일된 존재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복합적이고 모순적이며, 어쩌면 그 점이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점인지도 모른다. “부모를 닮아서”(「하우스」) 이목구비는 마음에 들지만 말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처럼. “나의 내부에는 자신의 출신지를 외계라 믿는 커다란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나는 화장실에서 오줌을 눌 때마다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이 빠져나간다는 건/ 확실하고 즐겁다”(「썩지 않는 빵」)라고 유계영은 말한다. 우리가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무엇도 아닌 내 안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몸 밖으로 시원하게 빠져나간다는 것. 자기 안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만이 쓸 수 있을 진술. 여기엔 경쾌하기까지 한 명징함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체온은 대기 중으로 사라지겠지
우주가 되는 일의 즐거움이겠지
- 「에너지」 부분
멀리 던지고
대답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어요.
얼굴에 생긴 구멍은
언젠가 당신의 폐 속에 공기가 있던 흔적,
돌멩이 말구요, 새가 아니라요.
- 「Firework」 부분
한편 유계영의 시에는 “내부를 떠돌다 입 밖으로 흘러내”리는 죽은 사람의 말처럼 죽음 이미지가 가득하다. 그러나 그 죽음 이미지들은 슬프거나 끔찍하거나 두려운 정서들을 몰고 다니는 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나의 소멸인 그것은 오히려 그저 자연이거나, 즐거움이기까지 하다. 죽음 이후의 시선을 갖게 되는 일도 종종 목격된다.
이러한 생각들은 결론적으로 ‘올바르게 하나인, 살아 있는 나 되기’에 대한 부정의 행로처럼 보인다. 이것이 ‘시의 행로’일까. 그렇다면 유계영에 한해서는 왜일까? 고통과 외로움에 관해 말하는 일이 나의 고유성으로, 나의 소유로 귀결되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나 되기’가, 나에 대한 나의 독점이 나 아닌 존재들을 소외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유계영은 “독점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으로 밝히고 있는 듯하다.
유계영의 시는 죽음 이후의 시선까지 다루고 있지만, 그럼에도 섣불리 미래를 부르고 예견하지는 않는다. 이는 한번도 마주친 적 없는, “흔적토끼” 같은 미래를 아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호명하면 그 힘을 잃고 도래하지 않는 것이 미래이기에 유계영은 시에 여백을 마련하고, “미래의 시가 마저 쓰게 할 것”이라고 적어둔다. 그의 입장이 지속되는 한, 독자는 계속해서 미래의 그가 쓸 시를 고대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