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 저
알베르 카뮈 저/서상원 역
루시 쿡 저/조은영 역
앨버트 라슬로 바라바시 저/홍지수 역
알베르 까뮈 저/최윤주 역
루시아 벌린 저/공진호 역
2020년 11월 27일
[책이 뭐길래] 서문이 재밌는 책을 골라요 - 이원준 편
2020년 02월 20일
2019년 07월 11일
2014년 06월 26일
2014년 06월 24일
2017.09.22. 트레바리에 올렸던 내가 쓴 독후감
자기계발서 만을 탐독하며 남들에게 잘 보이기만을 바라며 시작한 회사생활. 그리고 10년 후 번아웃을 경험하며 퇴사를 했다. 하루하루를 공허함과 왠지모를 우울함 속에 같혀 지내다 인문학이라는 한줄기 빛을 찾았고, 종교와 철학 그리고 심리학 서적에 빠져 지냈다. 그런데 이들 분야는 읽으면 읽을수록 지난 10년의 반추는 커녕 더 높은 이상을 향해서 가라는 강요아닌 강요를 느꼈다. 내가 추구하던 행복 또한 이상향 속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동양철학은 군자가 되었을 때 느끼는 행복이 최고의 선이라는...물론 그나마 나 자신에 대해서 돌아보며 분석하고 개선점을 찾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것은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책들 덕분이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내가 살아 숨쉬는 이유는 너무 뻔한 대사이니 패스, 그렇지만 아직도 내가 행복을 왜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언제나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답을 찾으려 했을 뿐..
"행복의 기원"이란 책의 서문을 읽으면서 한 눈에 이 책이다!!!를 알아보았다. How가 아닌 Why를 그리고 진화론에서 그 이유를 찾아준다니! 얼마전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며 알게된 사실 하나, 크로마뇽인과 호모사피엔스 간의 전쟁에서 호모사피엔스가 승리함으로써 지금의 현생 인류가 존재할 수 있었으며, 크로마뇽인과 대비되는 호모사피엔스의 특징이 바로 소심한 성격 그리고 집단주의이다.(다른 말로는 사회성이 크로마뇽인보다 우월하다는 것. 최근의 나는 사회성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이고EGO의 집단화된 결과로만 보인다.) 본 책의 후반부에도 호모사피엔스의 이동에 대해서 잠깐 언급되는데, 왜 크로마뇽인과 호모사피엔스 얘기를 하느냐면 그들의 행동 특성에 따라 행복을 느끼는 정도가 달랐다고 한다. 크로마뇽인은 끊임없이 옮겨다니며 맹수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때 행복을 느끼는 반면, 호모사피엔스는 정착하고 집단을 구성하고 그 구성원과의 끈끈한 결속력을 얻었을 때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이 역시 이론에 불과하지만 어떻게 보면 호모사피엔스의 출현은 곧 이고EGO의 출현과 일치하는 것인가... "행복의 기원"의 저자 서은국 교수는 수많은 연구 결과와 실험 사례를 바탕으로 인간의 본능과 행복을 구체적으로 연결시켰고, 그 덕분에 나는 더이상 어렵고 복잡하게만 표현하는 정신세계와 존재하지 않는 이상이라는 우물 속에 같혀있지 않고 본능이 지배하는 현실세계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의 결말까지 읽은 독자라면, 한번쯤은 생각해 볼만한 것이 바로 에피쿠로스 학파 또는 쾌락주의이다. 저자도 잠깐 언급한 쾌락이라는 개념이 사실 우리들에겐 매우 거북하고 음흉한 개념이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사실 성욕에 관련된 쾌락은 쾌락주의의 일부분에 불과한데...나는 오히려 에피쿠로스의 저서를 다시금 읽고싶어졌다. 기원전 하고도 몇 백년 이전에 그는 이미 인간의 본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에 놀라울 뿐이다. 이 책의 결론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생존과 번식 그리고 사회적 결속을 통해 느끼는 쾌락이 곧 행복이라는 것이고, 지금 내 머리 속의 커다란 화두인 '강박, 눈치, 미래'에 대해서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행복은 추구한다고 얻어지는 결과물이 아니고, 내 삶의 이유 또한 찾는다고 찾아지는 정답이 아니기에 나는 지금 이순간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지금 내가 속한 네트워크, 원하던 원치않던 상관없이, 이 네트워크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상처받을까 두려워하지도 않겠다.. 어차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생겨나는 상처니까. 맞다! 게보린이 있으니까. (참고로 마음이 상처받아 괴로울 때 진통제가 효과 있다고 함. 팩트임. 궁금하면 구글링.)
2021.02.25. Revised
이 책을 읽은 이후 3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사실 그동안 위에서 내린 결론 "지금 내가 속한 네트워크에 원하던 원치않던 상관없이 최선을 다할 뿐이다"를 실천했지만 오히려 내 속에 강력하게 자리잡은 EGO의 도전과 설득을 끊임없이 당했다.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도 EGO는 틈만나면 나를 설득시키려 했고, 그 결과 나를 둘러싼 장벽(나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EGO가 만들어낸 내 자아를 가두는 우물같은 개념)만 더 두꺼워졌다. EGO는 언제나 나에게 미래의 시나리오를 상기시키며 나를 조종하려 했다. 새로운 인연을 무시하던 그리고 나만의 우물 속에서 내 상황을 합리화시키는 나를 꽤 자주 목격하곤 했다. 그래서 나는 앞서서 내린 결론을 수정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어떤 일이나 임무나 행위에 대한 것일 뿐, EGO에게 휘둘린 최선은 진정한 최선이 아니다. 인간의 본능 역시 EGO가 애용하는 강력한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지금의 결론은 "지금 내가 속한 네트워크에 그리고 언젠가 새롭게 생겨날 네트워크에 원하던 원치않던 EGO에 휘둘리지 않고 나를 내맡기자" 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인데, '호모사피엔스가 과연 크로마뇽인보다 더 진화된 인류가 맞는가'라는 의심이 든다. 현생인류 역시 호모사피엔스의 후손이며, 현재 돌아가는 인류 사회를 보면 호모사피엔스의 특징이자 차별화 포인트인 그 사회성이 진화(?)한 결과 집단 이기주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대다수가 본인이 확증편향의 본능에 휘둘리는 것 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각자의 극단에 서서 상대 집단을 부정하고 욕하고 폄훼시키고 있다. 과연 이것이 그 사회성이란 특징이 진화해서 이렇게 된 것일까? 솔직히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윤리와 도덕성을 들이대도 확증편향에 빠져버린 이상 본인의 양심과 윤리사상에서 올라오는 목소리는 결코 본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게다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치닫는 상황으로 가는 것이 사회성을 지닌 인류가 진화하는 아주 자연스러운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크로마뇽인이 지구를 정복했더라면 어땠을지가 너무나도 궁금하다. 아니 오히려 집단 이기주의나 확증편향 같은 부작용은 없었다고 긍정 아닌 긍정적 기대를 해본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가 호모사피엔스라는 인류의 최초의 조상이 아닐까... 아무튼 현생인류는 호모사피엔스니까 그토록 원하는 행복은 지금 내가 속한 사회 속에서 찾자. 그 사회가 편향적일수록 행복은 점점 멀어질 뿐이다.
저자는 심리학과 교수이자 대표적인 행복 심리학자이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행복에 대해 학자로서 이론적인 정의를 내리고 설명을 해준다. 행복의 정의하기에 앞서 다윈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보면, 행복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와 진화론의 다윈은 많은 차이를 보여준다.
즉, 모든 인생사가 향하는 최종 종착지가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적 관점의 아리스토텔레스와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생존을 위해 행복이 필요한 도구라고 주장하는 다윈을 보았을때, 이 책은 후자에 더 가깝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동물이며, 생존을 위해 행복이라는 도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
행복은 나한테 항상 어려우면서도 늘 가까이에서 이야기하는 단어이고, 존재이다.
내가 처음으로 '남'과 행복에 대해 갑론을박했던 것은 20대 초반 대학생 시절이었다. 당시에 나랑 정말 안맞는 친구랑 카페에서 너의 행복은 정말 행복이 아닐 수 있어라며, 그 어린 나이에도 꽤 심오한 대화를 했었다. 나는 소소한 것들에 대한 행복이 진짜 행복이라고 생각했고, 그 친구는 원대한 꿈을 이루는 것을 진짜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본인의 주관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당신의 감정이 진짜다, 가짜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최근 같이 일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된 팀장이 설문조사 회의 중에 '행복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더 우울하고 불행해진다. 상대에게 행복하냐고 묻는 것은 또다른 방식의 폭력이다'라고 말했는데 그때 많은 충격을 받았다. 난 항상 아무한테나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행복한 상태인지 물어봤는데 이게 폭력이라니.
그 후 인터넷을 하다가 우연히 알게된 이 책은 지금까지의 일련의 사건들과, 동시에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바뀌는 나에게 정말 유혹적인 단어의 조합이었다. 행복의 기원.
다행히도(?) 행복의 기원에는 그에 대한 답을 알려주는 구절들이 많았다. 인간은 결국 찰스 다윈의 위대한 이론, 진화론을 따라 발전하고 있고, 지금까지도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택한 수단 중 하나가 '행복'이라는 것이다. 쾌락이나 즐거움, 본인의 과시욕마저도.
회사에서 만난 불행하다는 사람들은 보통, '돈이 없음', '집이 없음', '차가 없음' 등을 읊으며 본인의 불행요소들을 설명한다. 본인의 빈틈을 보며 이게 없으니 슬프다고 하기보단, 그래도 이정도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음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하는 책이다.
책의 결론은 결국 20대 초반의 내가 하던 생각이 좀 더 원초적인 행복을 가져갈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줬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내 쾌락과 내 즐거움을 누군가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고, 장황하게 보여줄 필요도 없다. 행복을 생각하면 난 왜 행복하지 않은지 불행해지고 우울해진다면, 본인이 가진 것에 대한 만족감과 그것을 좋아하고 누리는 정도가 얼마인지 다시 돌아볼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내용이 길지않아서 술술 잘 읽었습니다. 항상 행복이란 뭘까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그 궁금증이 조금은 풀린 것 같습니다. 행복도 쾌락의 한 종류라는 견해가 인상깊었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을 추상적인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쾌락이라고 하니 이해가 쉽게 되었습니다. 거창한 것이 아닌, 사소하지만 경험을 통해 얻었던 기쁨과 즐거움이 쾌락이고 곧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