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약함, 허무주의, 자기 파멸의 극단"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읽고
"인간 실격"
저는 이미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나약함, 허무주의, 자기 파멸의 극단에 이른 한 인간의 모습-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일 수 있는 어떤 자격 요건이 있을까. 이 책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읽으면서 그런 의문이 들었다. 인간 실격이라는 말은 인간으로서 자격 박탈이라는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 책 『인간 실격』은 '나'라는 화자가 어떤 사내의 사진 세 장으로 보면서 시작한다. 기이하고 소름 끼치고 불쾌한 기분을 들게 하는 얼굴을 가진 사내의 어린 시절, 학창 시절, 성인 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그리고 이 세 장의 사진은 이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사진에 대한 설명과 묘사 부분을 읽었는데, 책을 다 읽고 서문을 다시 읽으니 사진 속의 사내의 모습이 왜 그런 모습이었는지 비로소 이해가 갔다. 이 작품은 '나'라는 화자가 세 장의 사진과 세 권의 수기를 통해 그 사진 속 인물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기이하고 불쾌한 느낌을 주는 사내의 이름은 '오바 요조'인데 세 권의 수기는 요조의 삶의 기록이 담겨 있다.
첫 번째 수기에서는 요조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오히려 '광대 노릇'을 하며 다른 사람을 웃겼던 요조, 그렇게 요조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가면 속에 감추면서 다른 사람들을 웃기며, 자신도 웃긴 척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익살을 떠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마지막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인간을 단념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익살이라는 가느다란 선이 인간과 이어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필사적으로,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 성공할까 말까 한 위기일발의 식은땀 나는 곡예였습니다.
-p. 16
요조가 보여주는 광대 노릇의 삶은 요조의 말처럼, 인간에 대한 불안을 감추는 그의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마치 즐거운 척, 아무 문제가 없는 척하는 그의 익살 속에서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요조는 가족들에게조차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감춘 채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두 번째 수기에서는 중학생이 된 요조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요조의 광대 노릇의 진실을 알아차려버린 한 친구 다케이치를 만났다. 그는 요조를 보면서 "너 일부러 그랬지?" 라고 말하며 요조가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요조는 다케이치가 자신의 가면이 벗겨버릴까봐 그에게 잘해주며 그를 친구로 만들어버린다. 다케이치는 요조에게 두 가지의 예언을 해주는 데 그 중 한 가지인 "여자들이 너한테 반하고 말 거야." 예언은 불행하게도 이루어지며 요조의 삶을 불행의 나락으로 빠뜨리는 원인이 된다. 또한 요조는 다케이치와 헤어져 시골에 있는 중학교로 전학을 오면서 자신보다 6살 연상인 '호이치'를 만나게 되는데, 이 사람은 요조의 인생에 있어서 도움이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요조는 퇴폐적이고 향략적인 삶에 빠지고 그때부터 술, 여자에 빠져 폐인의 길을 겪게 된다. 매춘부 츠네코와 동반자살을 하지만, 그녀는 죽고 요조는 살아남는다.
세 번 째 수기에서는 동반자살 후 살아남은 요조의 삶이 나와 있다. 요조는 동반자살 사건으로 인해 심문을 받게 되지만, 기소유예로 풀려난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그는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가족과는 의절하면서 퇴폐적인 삶 속으로 빠지게 된다. 여자의 집에 빌붙여서 무명 만화가가 되어 생계를 이어간다. 그의 슬픔과 고뇌에 찬 삶 속에서 오직 그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술뿐이다. 거의 술에 쩔어서 알코올 중독자같은 삶 속에서 아무런 희망도 목적도 없이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그의 모습은 이미 폐인이며, 인생 낙오자이다. 그렇게 알코올에 의해 그의 몸은 계속 망가져가고 정신도 점점 피폐해져간다. 그러다가 그의 내연녀인 요시코가 성폭행을 당하면서도 그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너무나 무력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자신의 여자가 그렇게 능욕당하는데도 오히려 그는 모른 척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이런 그 자신에 대한 혐오와 나약함으로 인해 그는 더욱더 힘들어하고 자살시도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자살시도는 실패를 하고 그는 그 허무함과 무력함에 알코올 중독과 약물 중독에 시달리고 결국은 정신병원으로 가게 된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요조는 자신은 미치지 않았지만, 이미 자신은 이미 인간이 아니며 '인간 실격' 이라고 말한다.
이 세번째 수기를 끝으로 요조의 이야기는 끝이 나며 다시 시점은 '나'로 돌아온다. '나'는 이 세 장의 사진과 세 권의 수기를 수기 속에 등장하는 선술집 마담으로부터 받게 된다. 그렇게 하여 '요조'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수기 속에서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요조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아마 예상컨데 요조는 자기혐오와 자기파멸로 인해 자살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작품을 읽는 내내 침울하고 우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요조'라는 인물의 불행한 삶은 저자인 다자이 오사무의 삶과도 닮아있다고 한다. 실제로 저자인 다자이 오사무도 이 작품 속 첫 번째 수기와 두 번째 수기까지 쓰고 세 번째 수기는 완성하지 못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세 번째 수기는 그의 유서와도 같다고도 말한다.작품 속 요조의 나이는 29살이었고 다자이 오사무의 나이는 39살이었다고 한다. 39년 생애 동안 그는 총 다섯 차례 자살 기도 끝에 삶을 마감했고, 그가 죽기 한 달 전에 이 작품을 탈고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이 그런 의미에서 그의 유서나 다름없는 자전적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방 유지였던 집안 배경, 엄격한 아버지, 고리대금업을 하며 돈을 버는 집안에 대한 수치스러움, 집안을 실망시켰다는 자괴감, 학업 실패, 여종업원과의 동반 자살, 아내의 불륜, 좌익 활동, 약물 중독, 정신병원 입원 등 작품 속 요조의 삶과 닮아 있다. 그는 요조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이 인간 실격으로 낙인찍힌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런 불행하고 비극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삶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이 작품은 일본이 패전 이후 많은 사람들이 좌절감과 상실감을 안고 살아야 했던 그 시대 상황과 허무주의, 퇴폐주의를 반영한다고는 한다. 그렇게 허무주의와 상실감에 빠져 젊은이들은 힘든 시간을 보냈다. 마치 작품 속 요조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시대 상황과 함께 보면 요조의 삶을 마냥 비판만 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물론 요조가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알코올 중독과 마약에 빠져 살아가는 무기력한 모습은 비판의 대상이 될 지도 모른다.
요조의 불행한 삶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된다. 어쩌면 지금 우리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도 요조와 같지 않을까. 특히 취준생들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느끼는 답답함과 고통이 요조가 세상에 대해 느끼는 불신과도 맞닿아있는 것 같다. 우리 또한 여전히 인간과 세상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오래된 작품일지라도 지금까지 100쇄 출판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자이 오사무의 이 작품 『인간 실격』을 찾아서 읽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곧 개인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면서, 조금 더 제 의지대로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시즈코의 말을 빌리면 저는 조금은 멋대로 행동했고, 겁먹거나 흠칫거리지도 않았습니다. 또 호리키의 말을 빌리면 이상하게 쩨쩨해졌습니다. 또 시게코의 말을 빌리면 시게코를 별로 귀여워하지 않았습니다.” (p.108)
어린 시절 병약한 신체와 엄격한 아버지, 10명의 가족들 사이에서 어떤 결핍이 생긴 것인지, 익살이라고 표현하며 웃음을 주지만 사실은 눈치 보는 수단이 아니었을까. 항상 타인의 눈치를 보고 사람을 힘들어했던 주인공. 유난히 여자의 시선을 끌었던 그는 결핍으로 여자를 자극했으리라 생각된다. 가족을 힘들어했지만 가족에게 버림받고 그는 한 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천성이 순수한 요조가 이질적인 세상에 녹아들려고 발버둥 치는 과정에서 이제 더 이상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 멋대로 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인용문을 발췌했다. 이 후 술, 여자, 마약에 의지하며 인간으로서 실격자가 되지만 어쩌면 이때부터 순수하게 본인의 뜻대로 살았던 게 아닌가 싶다.
저자 다자이 오사무는 나약한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탁월하게 묘사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특히 문체에 허무주의 색채가 짙어 그 분위기를 더한다. 기묘한 사진으로 시작되는 서문, 시점 변화와 깔끔한 구성까지 더해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이 책을 읽으며 세 가지 생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1. 비어 있음 혹은 허무
‘나’라는 존재는 없어. 바람이야. 비어 있어. (p.18)
그래서였을까? 사람들은 ‘나’를 쉽게 농락한다. 집안의 하녀들이 우선 ‘나’에게 몹쓸 짓을 한다. 그리고 친구 ‘호리키’가 ‘나’를 삥 뜯는다.(처음에는 ‘5엔 좀’으로 시작해서 그에게 세상을 알려준답시고 술, 담배, 매춘을 알려 준다. ‘나’의 순수를 철저히 삥 뜯는다.) 속이 비어 있는 사람에게 색을 씌우고 그 안에 무언가를 마구 채워 넣는 일은 참 쉬운 듯하다.
2. 세상에 넘쳐나는 유쾌한 불신
아버지의 개회사도 서툴렀고, 그 유명 인사의 연설도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느니 하며, 아버지의 ‘동지들’이라고 하는 양반들이 성난 투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우리 집 거실에 들어서서는 진짜 기쁜 듯한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오늘 밤 연설회는 대성공이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듯, 참으로 대단하고 그야말로 떳떳하며 밝은 유쾌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 넘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p.27)
‘불신’ 앞에 ‘유쾌한’이라고 붙일 수 있는 대담함. 세상을 향한 조롱이 이 작품에 조용히 넘쳐난다. ‘나’는 어른들의 앞과 뒤를 본다. 서로 맞닿을 수 없는 그 양면의 세계. (이 세계는 어쩌면 ‘눈앞에서 웃고 등 뒤에서 칼을 꽂는’ 현대인들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천성이 유약하고 순수했던 ‘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불신을 일찌감치 깨닫는다. 그러나 ‘나’조차도 세상에 물들어 간다. 그러나 교활하고 영민하게 ‘나’의 이익을 스스로 챙기며 세상에 물들어갔어야 하나, 나를 놓아버리고 나를 잃어버리는 쪽으로 세상에 물들어 간다. 가령 예를 들자면, 약간의 놀이 성격을 띠는 죽음이나 술, 담배, 여자 등등으로 오염 혹은 감염된다.
3. 인간이 가진 쇠꼬리
평소에는 본성을 숨기고 있다가 어느 순간, 예를 들어 소가 풀밭에서 느긋하게 낮잠을 자다가 갑자기 배에 앉은 파리를 꼬리로 탁 쳐서 죽이듯이, 느닷없이 인간의 무서운 정체가 ‘화’라는 형태로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곤두서는 듯한 전율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본성도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조건 중 하나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저 스스로에게 절망했습니다.(p.18)
이 책에서 ‘나’는 종종 이렇게 하느님께 묻는다.
"하느님께 여쭙습니다. 믿음이 죄가 되나요? 저항하지 않는 것이 죄인가요?"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몰라서 묻는 것일까, 대답을 바라지 않고 묻는 것일까. ‘나’는 분명히 믿음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믿어 왔을 것이고 세속에 저항하지 않는 삶이 특별히 ‘죄’로 치부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가진 욕망이나 본성은 ‘쇠꼬리’라는 형식으로 느닷없이 그 ‘믿음’을, 그 ‘무저항성’을 짓밟는다. ‘나’는 인간들이 가진 쇠꼬리에 한 차례, 두 차례 지속적으로 등짝을 맞고 팔다리를 맞고 기어이 심장까지 얻어맞는다. '대체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한심한 소리나 하는 ‘나’로 변모해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인간의 조건’이라 여긴 ‘쇠꼬리’로 인해 ‘스스로에게 절망’했다는 부분이다. ‘나’ 역시 ‘쇠꼬리’를 가진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혹은 탈인간의 세계에 있으면서도(인간의 변두리, 혹은 그 경계에서 인간을 바라보면서도) 언제나 인간과 가까워지고자 하는 ‘나’의 양면을 보여주는 표현이 아닐까? ‘나’는 항상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인간의 세계에 편입되기를 희망하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럼 대충 묵직한 이야기들을 건드려 봤으니
주인공 ‘요조’에 대해서 차근차근 살펴보자.
우선 ‘유년시절’과 ‘청소년 및 청년시절’을 건드려 본다.
유년 시절의 ‘나’는 개구쟁이 가면을 쓰고 ‘익살’을 처세술 삼아 살아가는 슬픈 삐에로 같은 존재다. 속이 비어 있어 바람과 같은 존재이기에 어느 가면을 써도 곧잘 '나'와 어울려 보인다. 어른들은 어린 요조를 천둥벌거숭이 같은 순수함과 천진함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인간의 어두움을 알고 있고, 심지어 ‘이해’하고 있기까지 하다. 또한 엄숙한 가정환경 안에서 제삿밥 먹듯 식사를 하며 살아왔으며, 아버지가 선물을 사 주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의 구미에 맞게 답변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는 아이이기도 하다. ('나'는 아버지 수첩에 아버지가 자신에게 사주길 원하는 선물을 몰래 적어 넣는다. 이 장면은 왠지 섬뜩하다. 혹은 애처롭다.) ‘나’를 둘러싼 1차적 외부 세계인 가족에게 인정받기 위해, 혹은 실망감을 안기지 않기 위해 자신의 욕구쯤은 간단히 날려버릴 수도 있는 무모함. 게다가 자신의 욕망을 타인의 욕망으로 아무렇지 않게 대체해 놓으려는 ‘타인 본위의 종속적 삶.’
이러한 종속적 삶은 어른이 되어서도 이어진다. 여자를 비빌 언덕 삼아 돈을 얻거나 생명을 빼앗는다.(여성과 동반자살 후 자신만 살아남는다.) 혹은 여성에게서 자신이 잃어버렸던 ‘순수’를 되찾고자 결혼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러다 이도 저도 실패하자 어느 다리 아픈 약국 여자에게서 ‘모르핀’을 제공 받으며 점점 미쳐가다 결국 스스로 '인간실격'이라 부르게 된다.
냉철하게 인간의 추악함을 꿰뚫으며 자신의 ‘어른스러움’을 부러 ‘개구쟁이’로 가장하던 어릴 적 ‘나’는 어디 갔을까? 그러한 분별은 싹 사라지고 세상 물결에 휩쓸리는 어른의 ‘나’만 남았다.
나를 속세에 휩쓸리게 만드는 대표적 인물, ‘호리키’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세상이 가만 있지 않을 거야’
‘자네가 세상 아닌가?’
적어도 처음에는 '나'에게 호리키가 ‘세상의 눈’이다. 세상을 보는 통로가 된다. (아니 어쩌면 호리키가 자신이' 세상의 눈', '세상의 기준'인 척하였기 때문에 '나'도 그리 알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된 세상의 눈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나'의 세상은 호리키를 통해서만 보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호리키는 자신을 기준점으로 삼아 ‘나’를 인간실격으로 몰아가려 한다. '세상이 가만 있지 않으니 그래서는 안 된다'고 '나'를 몰아세운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만 되묻는다. '세상이 가만 있지 않는 게 아니라 '자네'가 가만 있지 않겠다는 뜻은 아닌가? 자네가 말하는 세상이 실은 '자네 자신 아닌가?'
호리키는 적일까 내 편일까. 친구일까, 아니면 '나'가 처음에 주장하듯 놀이 상대였을까. 호리키는 처음에 '나'의 놀이 상대이자 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구 역할을 해 주는 이다. 그러나 세상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나'는 결국 호리키에게 의존해 버린다.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이 되어 결국 세상에 더 이상 저항하지 않다가 아내와 호리키 등에 의해 정신병원에 갇히고 만다. 호리키를 보며 생각한다. 내게도 호리키와 같은 친구가 있다면 나는 그를 내 편으로 이해할까, 아니면 조심해야 할 적으로 생각할까? 호리키라는 인물의 면면을 읽으면서 세상이 내 편인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호리키라는 인물을 알았으니,,)
이제 ‘나’는 대체 어떤 존재인지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나’를 통해 말하려는 여섯 개의 어두움
1. '허무'
조금이나마 삶에 대한 '놀이'를 즐겼지만 이내 자살 시도를 해 버린다. 그것도 한 번은 동반한 여자를 죽음으로 몰아갔고, 두 번째는 자신을 죽음 근처의 절벽으로까지 몰아간다. 또한 '나'는 자신을 '바람'과 같이 '비어 있는 존재'로 인식한다. 세상에는 자신이 머물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2. 상실
'나'가 지녔던 어릴 적 순수는 어른들에게 '능욕'당한다. 어른이 되어 자신의 아내에게서 찾으려 했던 '순수'도 세상이 이를 더럽히고 만다. 또한 자신이 태초에 가지고 있었을지 모르는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점점 옅어지고, 자신도 세상 사람과 마찬가지로 인간다운 마음을 상실해 간다. 급기야 스스로 '나'는 '인간실격이로구나'라고 인식하게 된다.
3. 의탁
권위주의적인 가풍 아래에서는 가족의 권위자인 아버지에게 의탁한다. 집과 고향을 빠져나온 이후로는 '호리키'라는 친구에게 의탁하다가 그 뒤로는 주로 여러 여자들에게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며 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면서 '술'에 의탁하고 술에 의탁하는 자신을 끊으려는 마음에서 출발한 '모르핀'은 자신을 더 파멸로 이끈다. 자기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 본 적이 없고 세상 밖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 '나'다. 인간의 적나라한 밑바닥을 어린 나이에 알아차린 '나'이지만 그런 인간들에게서 결국 벗어나거나 독립하지 못하고 그 인간 세계에 '나' 역시 매몰되고 만다.
4. 방황
자기 인생을 남에게 묻는 버릇이 생겨버린 나.
"일을 하는 게 좋을까요?"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는 건 인간 세계를 너무 일찍 깨달아 버려서일까? 아니면 인간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인간이 되기를 지레 포기해 버려서일까.
5. 퇴폐
상실과 방황의 기운에서 더 나아가 퇴폐적인 기운이 느껴진다. 인간이 되는 길을 상실하고 인간실격의 경계에 서 버리고 마는 나. 나는 술이나 담배, 여자 등의 쾌락에 자신을 내맡긴다. 인생의 뚜렷한 구심점을 자기 자신에게서, 혹은 세상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6. 나약
나약하다보며 병약해져간다. 공황장애 같은 증상이 나타나던 '나'가 나약함을 잊고 세상에 적응하기 위한 방법들은 세상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일 수도 있다. 때론 술에, 아니면 여자(매춘)에, 혹은 모르핀에 의탁한다. 어쩌면 '나'가 허무와 상실과 의탁, 방황하는 병이이 생기기 시작한 그 첫 단추가 '나약함'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약한 모든 이가 나약해지기를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해 본다. 물론 '나'에게도 독자가 알지 못하는 사정이 숨어 있었을 테지만.
이 여섯 가지의 어두움을 통해 '나'의 습성을 건드리고, 다시 이를 통해 '인간실격'이 대체 어떤 것인지 내 멋대로 건드려 보고자 한다.
그리고 딱 한 문장만 뽑으라면
“비어 있어.”
이 문장을 읽고 텅 빈 무언가를 느낀다.
하지만 '무언가를 느꼈으므로' 내 안이 완전히 텅 비어 있지는 않다고 말하고 싶다. '비어 있음'을 느끼는 마음은 인간의 마음이다. 그리고 주인공 '요조'도 자신이 비어 있다고는 했지만 결국 완전히 비어 있는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라 믿고 싶다. 무언가를 채우고자 했던, 인간으로서의 마음, 그것이 요조 안에 가득했으리라 믿는다. 비록 마지막까지 채우지 못하고 인간이라는 심사에서 불합격, 곧 '실격' 처리가 되었지만.
읽은 기간: 2017. 8.1.~ 8. 6.
같이 읽으면 좋을 책: 편의점 인간(무라타 사야카), 노랑무늬영원, 그대의 차가운 손(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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