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노 저
임솔아 저
애나 렘키 저/김두완 역
로랑스 드빌레르 저/이주영 역
천선란 저
백온유 저
법륜 스님의 지금 여기 깨어있기입니다. 출간된지 오래됐고, 실제 읽은 지도 꽤 됐지만, 그땐 도서관에서 대여를 해서 읽었습니다. 최근 출간된 스님의 야단법석 2를 읽고 보니 지금 깨어읽기가 다시 생각나 구매했습니다. 읽다보면 공감되지만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말씀들이 수드룩하죠. 한데 수년전에 읽을 때와 이번에 다시 읽으니 그 느낌이 다릅니다. 그때는 웬걸 했던 게 지금은 그럴 수도 있겟구나 이해를 한달까요. 10년 후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이 들지 기대가 되는 책입니다.
아내가 읽어보라고 한 책이 이 책이었다. 물론 잘못 알아듣고 '엄마 수업'부터 읽었지만... 어쨌든 법륜스님의 다른 책들이 그러하듯, 책을 읽으며 조용히 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던 책이다. 그래서 아내가 나에게 추천한 것일 수도...
이 책은 나는 누구이며 삶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들에 대해 언급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이 세상의 진리를 글로 표현하려는 것일까? 법륜스님이 생각하는 이 세상의 진리를? 그건 아닌 것 같다. 책 속에서 법륜스님이 진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부터 살펴보자.
그러나 진리는 이런 것으로 검증될 수 없습니다. 불립문자입니다. 문자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즉 문자를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바깥의 것들을 다 놓아버린 경지에서 바로 자기 마음에 계합해야 합니다. 자기가 바로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 p.24
자신이 체험해서 마음속에 일치된 것.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단순히 책으로 진리를 전할 수 없다. 스님의 말처럼 화두를 던지고 스스로 고민하여 진리를 찾는 것. 불교의 가르침이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세상에 일어난 모든 일은 단지 하나의 사건입니다. 일어난 일이 애초부터 재앙이나 복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재앙으로 만드느냐 복으로 만드느냐는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일체가 유심소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을 다 재앙으로 만들어요. "아이고, 내 팔자야.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럴까?"라고 아우성치지만 사실은 전부 자기가 만든 재앙이에요. 그런데 이것을 탁 뒤집으면 모든 것이 복이 됩니다.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복되고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것이 불법이에요. 불교는 사주팔자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주팔자를 고치는 것입니다. 운명을 바꾸는 것이지요. 육도윤회하는 중생의 운명, 그 얽매임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부처의 세계로 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러니까 수행해야 합니다.
- p.40
스님은 책 속에서 이 '일체유심조'를 자주 언급하신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따른 것.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온 사건들을 보며 좋고 나쁨을 이야기하지만 그 사건 자체에는 큰 의미가 없으며 거기에 좋고 나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나'라는 것. 그로 인한 결과는 고스란히 의미를 부여한 '나'에게 뒤따른다.
책 속에서는 깨달음으로 이어지게 도와주는 '화두'를 다룬 이야기가 많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중에 한 가지 이야기가 바로 '목불에 무슨 사리가 있는가?'라는 화두였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때 새로운 세계가 확 열린 거예요. 왜 부처를 불에 때는가? 그것이 부처라면 사리가 나와야지, 나무토막에서 어떻게 사리가 나오겠나? 그럼 그것은 부처가 아니고 나무토막이지 않느냐? 이것이 '목불에 무슨 사리가 있는가?'라고 하는 유명한 화두입니다. 스승님들이 깨달음에 이른 한 대목이지요.
-p.50
이런 이야기들로 자신의 사고방식을 뒤흔드는 방법이 참 매력적이다. 그리고 법륜스님은 잘못된 질문의 문제점도 예시로 보여주고 있다.
세상을 누가 창조했느냐는 질문도 그와 같습니다.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 '누구'에 대해 대답을 하려 듭니다. 그런데 이 질문 속에는 이 세상은 창조되었다는 게 전제되어 있습니다. 모래로 밥을 하면 몇 시간 만에 되겠냐는 질문 속에도 모래로 밥을 지을 수 있다는 게 전제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전제는 잘못된 전제입니다. 누가 창조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누구'에 빠지는 것은 창조되었다는 전제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미 전제가 잘못된 질문인 것을 꿰뚫어보지 못하기 때문에 답을 찾느라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모래로 밥을 하면 몇 시간 만에 되느냐는 질문을 받고 온갖 백과사전을 뒤지면서 몇 시간 만에 될까 연구하는 것과 같아요. 처음부터 연구할 필요가 없어요. 질문 자체가 잘못된 전제 위에 있기 때문이니까요.
- p.58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 의미를 여러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세상을 누가 창조했느냐?'라는 질문. 사람들은 그 질문을 받으면 고민한다. 특정 종교인이라면 쉽게 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질문은 옳은 것일까? 그냥 있었을 수는 없을까?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한 질문은 다시 생각해보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책을 읽다 보니 내가 들어본 스님 이야기도 나온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원효대사. 흔히 해골바가지의 물로 깨달음을 얻어 불교를 민간에 널리 알린 인물로만 알아왔다. 내 종교 지식은 짧기에. 그런데 이번에 읽으면서 원효대사가 그렇게 쉽게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무려 4단계에 거쳐 깨달음을 얻은 원효. 그랬기에 그의 이름과 영향력이 지금까지 내려져오는 것이 아닐까? 그중에서도 마지막 깨달음의 세계가 인상 깊었다.
네 번째 세계는 걸레가 되어 더러움을 닦아내버립니다.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럽혀 상대를 깨끗이 해버리지요.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연꽃이 아니라 그 한 송이 연꽃을 피우는 진흙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도둑질하는 사람, 거짓말하는 사람하고 어울려서 같이 도둑질도 하고 거짓말도 하며 다니는데 조금 있으면 그 친구들이 먼저 "야, 이제 도둑질 그만하자", "야, 이제 거짓말 그만하자." 이렇게 되어버립니다. 실제로 원효는 도둑떼에 잡혀서 강제로 그들을 따라다닌 적이 있는데 한참 있다 보니 수백 명이나 되는 도둑들이 다 출가해서 스님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사사무애법계입니다.
-p.179
나만의 세계로 다른 이들이 따라오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 그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어울려 교화를 할 수 있는 수준. '만약 내 학급에서 아이들 속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아이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진정한 교육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좋은 마음을 냈다고 반드시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나쁜 마음을 먹어서만 결과가 나쁜 게 아니라 좋은 마음을 먹어도 결과가 나빠질 때가 있지요. 때로는 좋은 마음을 먹기 때문에 그 결과가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이렇게 좋은 마음을 먹었는데 너는 왜 이렇게밖에 안 되느냐'라고 화를 내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내 기대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 속에는 늘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수도 없이 있습니다.
-p.190
학급의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 발전을 주고 싶어 이것저것 준비할 때가 있다. 그것을 준비할 때에는 아이들을 위한 마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준비한다. 그런데 준비한 내용을 실행으로 옮기면 꼭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면 화가 나기 시작한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왜 아이들은 그걸 몰라주지? 아, 이 야이들에게는 소용없는 것인가?
저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이것저것 준비하기 싫어진다.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그냥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차피 나의 삶 속에는 큰 변화가 없을 테니... 그런데 이 부분을 읽고 나서 이런 내 생각이 나의 기대 때문에 생긴 일임을 알 수 있었다. 결국은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나쁜 결과를 가져온 것. 그래서 마음 수양이 필요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스님의 생각을 잘 담고 있는 문장을 소개하며 마무리하려 한다.
그러니 공부라는 것은 어디서든지 배울 것이 있습니다. 길 가다가 넘어져도 배울 것이 있고, 시비가 붙어 싸우는 가운데에도 배울 것이 있고, 실수한 가운데에도 배울 것이 있고, 실패한 가운데에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물에 빠지면 빠진 김에 진주조개를 주워오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p.206
넘어진 것만을 생각하며 화내기 전에 그 순간 배울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