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언 플린 저/강선재 역
리안 모리아티 저/김소정 역 저
클레어 맥킨토시 저/서정아 역 저
아키요시 리카코 저/김현화 역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다 작가 이름에 눈길이 멎었다.
내가 아는 그 작가가 맞는지 잠깐 헷갈려서다.
셀레스트 응?
셀레스트 잉이 아니라?
역자에 따른 번역 차이겠지만 그래도 작가의 이름인데 앞으론 통일시켜 주었주면 좋겠다.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 '응' 보다는 '잉'이 났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처음에 접한 정보가 이렇게나 중요하다.
나는 이 작가의 두번째 작품인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를 먼저 읽었다.
그때 접한 작가의 이름이 셀레스트 잉이었으니 나에게는 그냥 잉씨인걸로^^
먼저 읽었던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내가 작년 서평에도 썼지만 정말 대단한 작품이다.
이 작품 때문에 난 특이한 성을 가진 이 작가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순서가 좀 바뀌었지만 이번에 읽은 이 책은 작가의 첫 장편이면서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다고 한다.
아마존 선정 '2014년 올해의 책 1위'를 차지했다는 것부터 믿음이 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에 대한 기대가 컸다.
소설은 단순히 재미있게 쓰는 것도 어렵다.
이 세상에 없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냐.
물론 실화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는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나에게 있어 소설가란 직업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과 비슷한 경외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재미있으면서도 가볍지 않고,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을 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 않을까.
이 책은 그 어렵다는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처음 시작할 때 인물들간의 구도를 잡느라 약간 헤맸던 것만 빼면 마지막까지 숨돌릴 틈도 없이 읽었다.
개인적인 서평이긴 하지만 늘 책의 별점을 줄 때 약간 고민하는 편인데 이 책은 두말할 것도 없이 별 다섯개 쾅쾅이다.
중국에서 이민 온 가난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제임스는 하버드대에서 조교수로 강의를 하다 똑똑하고 매력적인 여학생 메릴린을 만난다.
메릴린은 가정 교사인 홀어머니 밑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의사의 꿈을 키우던 중, 제임스와 연인 관계로 발전하고 임신을 하게 되면서 잠시 자신의 꿈을 접게 된다.
약 20년 뒤, 제임스와 메릴린은 작은 도시에서 세 아이와 함께 살아간다.
제임스는 근처의 작은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수로, 메릴린은 세 아이를 보살피며 집안 살림을 하는 주부로.
첫째 아들인 네스, 둘째 딸인 리디아, 그리고 막내 딸 한나까지 겉으로 보기엔 평화롭고 아무 문제도 없을 것 같은 이 가정에 어느 날, 끔찍한 사고가 터진다.
둘째 딸인 리디아가 사라진 것이다!
중국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검은색 머리와 갈색 눈동자, 동양인 특유의 얼굴을 물려 받은 네스, 한나와는 달리 리디아는 엄마를 닮아 파란 눈을 지녔고, 부모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집안의 중심 인물이다.
그랬던 리디아가 실종되고 나서 얼마 뒤, 그녀는 집 근처 호숫가의 배 위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다.
나는 이 부분까지 읽고 이 책이 리디아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는 일종의 추리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얄팍하고 시야가 좁은 내 짐작이었을 뿐, 리디아의 죽음 이후 이 가정에 드리워진 여러 문제점들이 드러나면서 이 책은 인종, 교육, 양성 평등까지 정말 폭넓은 주제들로 가지를 뻗어 나간다.
만약 내가 이 책을 부모가 되기 전에 읽었다면 전적으로 아이들의 입장에 섰을 것이다.
부모의 사랑을 동생에게 빼앗긴 네스나 어렵게 결심한 엄마의 꿈을 향한 열망을 존재 자체만으로 붕괴시켜버린 뒤 집에서 마치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한나에게 빙의되어 화가 치밀어 올랐을 것이다.
단지 '엄마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하겠다' 라는 생각으로 알지도 못하는 물리학 문제를 풀고, 생물학 강의를 억지로 듣는 리디아가 마냥 불쌍했을 것이다.
아이들의 의견은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자기들이 살아오는 동안 머리속에 박혀버린 생각을 강요하는 제임스와 메릴린이 한심하고 꽉 막힌 부모라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나는 두 아이를 둔 엄마다.
의사의 꿈을 포기하고, 중간에 정말 살을 깎는 고통을 견디면서 다시 꿈에 도전하지만 한나의 임신으로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메릴린의 입장이 이해되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나 부모가 되면 책임감과 부담이 막중해지겠지만 아무래도 여자가 희생해야 될 부분이 훨씬 크다.
임신중의 신체 변화, 고통속에 맞는 출산, 출산 후 아이 양육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10년 동안은 아이에게 묶여 꼼짝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남자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밖에 나가 멀쩡히 사회 생활을 한다.
물론 요즘은 아이를 낳고도 다시 직장에 복귀하는 여자들이 많다.
그렇지만 그녀들은 일, 가사, 육아까지 어느 하나를 제대로 하기도 힘든 세 가지 영역에서 동분서주하면서 슈퍼 우먼이 되어야 한다.
나는 현재 직장에 다니고는 있지만 두 아이를 키우면서 여러 번 휴복직을 반복하여 나이는 많은데 경력은 적은,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포지션이 되어 버렸다.
나도 직장에서 일 잘한다고 인정받고 싶다.
하지만 아직 어리고 엄마 손길이 필요한 나이대의 아이가 2명이나 있는 마당에 직장에 내 에너지를 다 쏟아 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음에 감사하기도 하지만 만약 내가 아이를 낳지 않고 쭉 직장에 다녔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능력있고, 일도 잘 하는 커리어 우먼이 되어 있지 않을까 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두 가지를 다 가질 수는 없는 법.
어느 하나를 포기하든가, 아니면 두 가지를 병행하되 적절한 수준에서 조정해야 한다.
나는 후자를 택했지만 메릴린은 한때 전자를 택했고, 메릴린의 선택은 자신을 위한 최선이었으나 그로 인해 리디아는 끝도 없는 자기 기만의 굴레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같은 여자, 엄마로써 메릴린에게 깊이 공감하다 보니 메릴린이 제임스에게 느끼는 감정이 내게도 전이되었다.
의사의 꿈을 포기하고 결혼을 선택한 건 메릴린 자신이니 누구를 원망하기는 좀 그렇다.
비논리적이고 자기 생각만 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걸 어쩌겠나.
제임스의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 나는 메릴린의 입장에서만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막상 제임스의 스토리가 펼쳐지니 이번엔 그도 이해가 간다.
자식들 중 둘째 딸인 리디아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은 부모가 비슷했지만, 메릴린이 리디아에게 다른 사람보다 특별해야 하고, 더 뛰어나기를 바란 반면, 제임스는 다른 이들과 리디아가 별 차이없이 어울리기를 바란다.
이는 제임스의 국적, 생김새와 관련이 깊다.
학교에서 유일한 중국인(이 책의 시대적 배경은 1900년대 중반이다)이었던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일단 외모에서 너무 튀었고, 어려운 가정 형편과 내성적인 성격은 그를 더욱 위축되게 만들었다.
친구 하나 없이 외롭게 지내던 제임스는 자신의 아이들만큼은 자기와는 다른 학창 시절을 보내길 바랬을 것이다.
그래, 그래, 알겠다.
나도 아이들에게 내가 못 이룬 것을 기대하고, 내가 못 해본 것을 아이들은 해봤으면 좋겠으니까.
그런데 방법이 아주 틀려 먹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양방향의 의사 소통이 이루어져야 건강하다.
하지만 이 집에서는 늘 제임스나 메릴린에서 아이들에게로 향하는 일방통행만 존재했다.
어쩌면 이렇게 모를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이들의 상태에 무지했던 것이다.
아이가 바라는 선물이 아닌 자신이 아이에게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만드는 선물을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나는 늘 내가 방치된 상태로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어찌 보면 차라리 방치가 낫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든다.
최소한 나는 언제 엄마가 또 떠날지 몰라 눈치를 보면서 엄마가 원하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행동한 리디아보다는 내 주장과 가치관대로 살아왔으니까.
그래서 누가 잘못했냐고?
누가 리디아를 죽였냐고?
표면적으로만 보면 가장 책임이 큰 사람은 메릴린이다.
하지만 메릴린이 그렇게까지 된 원인중의 하나는 제임스다.
그런데 제임스도 알고 보면 여러가지 사정이 복잡한 사람이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의 관심이 동생에게 집중되자 리디아를 호수에 빠뜨려 죽일 뻔한 네스는 곧바로 동생에게 구조의 손길을 내민다.
그뒤로 쭉 네스는 부모 밑에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리디아에게 항상 비슷한 도움을 주었다.
그것이 네스의 대학 진학 문제로 끊어진 것도 리디아를 구석으로 몰아넣은 이유중의 하나다.
'누구 탓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마치 벤젠의 분자 구조처럼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모양새라 쉽게 답할 수 없다.
그러니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리디아의 죽음과 관련된 잘잘못을 밝히자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 가족도 리디아의 죽음과 관련하여 답을 찾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스스로 자책감에 빠지기도 한다.
결국 명확한 답은 없는 것인데.
파국으로 치닫던 이들은 메릴린이 리디아의 숨겨진 진심을 알게 되고, 제임스가 다시 가정으로 돌아오며, 스토리 내내 주목받는 인물들 사이를 부유하며 공기처럼 존재감이 없던 한나가 가족들에게 의식되면서 안정을 찾는다.
과거는 아무리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다.
우리가 후회하는 과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앞으로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자' 정도인 것이다.
비탄에 빠졌던 이 가족은 정말 오래오래 헤매던 끝에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안타깝고, 화가 나면서도, 화가 나는 그 대상을 마냥 미워하지도 못하고 일견 공감도 되는 신기한 책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어떤 부모인지를 돌아보게 해준다.
제임스나 메릴린처럼 아이의 입장에서 보지 못하고 내 입장에서만 일방통행격 소통을 하는 것은 아닌지.
살면서 후회할 일을 아예 만들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빈도를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
특히 아이의 어린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그 영향력이 길게는 인생 전반에 미치게 되니 정말 중요한 시기다.
지금 그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두 아이를 기르는 엄마로써 , 같은 처지의 엄마들에게 이 책을 강력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