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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이 도시를 바꾼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도시를 지키는 방법 도시를 새로이 보는 눈, 도시 인문학 “어떤 도시가 좋은 도시입니까?” 도시설계 전문가인 저자에게 시민들이 강연의 말미에 어김없이 하는 질문이다. 저자의 답은 간단하다. 좋은 도시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시민이 사는 곳, 튀는 시민이 만드는 곳이라고. 자신이 원하는 도시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이야말로 좋은 시민이자 그 도시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언뜻 나와 무관하게, 어렵게 느껴지는 도시설계에 관한 편견을 깬다. 도시에서 사는 이라면 누구나 체득할 수 있는 것이 도시학이자 도시설계다. 이 책은 도시의 주인인 시민에게 건네는, 시민에게 필요한 도시학개론이다. 저자가 동네 아저씨로, 시민으로 살아온 일상에서부터 20여 년간 도시 연구를 통해 쌓아온 도시 DIY의 노하우와 도시 철학을 담았다. |
대학교 3학년 때였을 것이다. 우리나라 도시 계획이 잘 된 곳 하나와 잘 못 된 곳 하나를 찾아 비교 분석하기. 그리고 어떤 식으로 고쳐나가면 좋을지 방법 찾아보기. 이게 당시 도시 계획론 리포트 과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 나에게 이런 숙제를 낸다면 나는 어떤 답을 찾아 리포트를 쓰게 될까? 시간이 지났고, 그때 보다 도시는 성숙했고, 원숙미를 자랑하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우리가 행복한지는 잘 모르겠다. 도시를, 아니 마을을 아니 집을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게 변하지 않는다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 모두 우울하지 않을까?
행복한 삶을 위한 도시 인문학이라는 부재를 달고 있는 ‘도시의 발견’이란 책을 읽으며 도시가 가진 상징성과 도시의 주인이 누구인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달라지지 않는 정치를 보며 이젠 국민이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광장으로 나갔고 촛불을 켰으며 그래서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이런 일련의 모습을 보며 변해야 하는 건 그들이기도 하지만, 변하고 행동해야 하는 건 결국 이 나라의 주인, 국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도시의 주인. 여태까지 도시의 주인은 시장이고, 자본과 권력이라 생각했다. 그들에 의해 변하고 달라지는 게 도시의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래 살고 있던 사람들은 자본에 의해 밀려나가게 되었다. 진짜 주인은 없어진 사람들의 삶의 터전. 이 도시를, 이 마을 지켜야 하는 건 결국 도시의 진짜 주인인 그 동네의 주민 아닐까
건축을 전공하면서 도시 계획 관련한 과목을 공부했다.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어렴풋이 도시 설계의 중요성을 알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외국처럼 도시 설계를 하는 사람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했다. 힘 있는 누군가의 입김에 의해 펼쳐졌다 오그라들었다, 만들어졌다 사라지는 오랜 시간 고민하고 주민들과 소통하는 도시 계획을 한 적이 없었다. 그때와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아름다운 도시, 소통하는 도시를 상상한다면 짧고 굵게 계획하고 추진하기보다 오랜 시간 대화하며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재개발의 진짜 의미와, 그 안에 산재하고 있는 연결과 단절의 의미 (이걸 해결하기 위해선 홀로서기 보다는 늘어서기 방식의 건물이 도시를 더 쾌적하게 만든다), 도시 안에 있는 노점의 문제, 도시를 둘러 싼 산의 아름다움, 과거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는 대신 남겨야 하는 포인트, 청계천 복원을 둘러 싼 정치적 견해, 젠트리피케이션의 해법 등.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도시 문제를 잘 설명한다.
전문가만 할 수 있는 게 도시학이라고 생각했는데 작가는 말한다. 도시학은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거라고. 내가 사는 도시. 그곳을 천천히 걸으며 도시가 가진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그럼 도시는 아니 내가 사는 동네는 나에게 말을 할 것이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풀어야 할 숙제인가를.. 때문에 도시의 주인은 자본이나 권력가의 것이 아니고 주민 바로 우리라고. 우리 동네에서 내가 좋아하는 곳과 좋아하지 않는 곳이 있다. 좋아하지 않는 곳은 바로 우리가 고쳐나가야 할 숙제와 같은 것이다. 무관심으로 방치하지 말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선 결국 주민이 나서야 한다는 것. 다시 한 번 우리 동네를 천천히 걸어보고 싶다. 그곳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사람 역시 우리라는 걸 잊지 않고.
모더니즘의 도시계획은 시민들간의 접촉을 줄이고 자동차 위주의 도시계획의 결과를 낳았다. 1960년대에 제인 제이콥스는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이란 책을 통해서 보행공간의 중요성, 도시의 다양성 확보를 위한 용도복합, 작은 블록, 오래된 건물의 존치, 어느 정도의 집중을 주장하였고 재개발을 비판함으로써 미래 도시계획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였다.
결국은 도시의 주인은 시민이다. 개발업자는 사업의 시급성, 필요성보다는 사업성 위주로 개발을 하기 때문에 도시의 주인인 시민이 정치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도시의 혁신은 브라질 쿠리치바의 행정가의 마인드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 속에서 나오는 참신한 아이디어에서 탄생한다.
나는 한때 도시는 깨끗하게 단장된 백화점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느추하고 지저분한 옛날 건물은 고쳐쓰기에는 노력이 많이 소요되고 건물주가 알아서 리모델링하지 않는다면 철거하고 다시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가 고향, 내가 살던 마을에 대한 향수와 장소성을 지워버리고 말았다. 또한 집은 단순히 소득수준에 따라 당연히 옮겨다니는 것이라는 생각이 아파트 공화국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단독주택과 저층아파트, 고층아파트가 조화롭게 배치된 도시계획이 점점 시장논리로 고층아파트 일변도로 변화되고 있다. 도시의 다양성 측면에서 우려스럽다. 이 책에서는 피할 수 없는 아파트 건립에 대해서도 주민들의 커뮤니티 활성화 사례를 소개하며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도시의 주인은 쭉쭉 뻗은 가로, 높은 빌딩이 아니라 시민이다. 도시계획 입안 과정에서도 그 지역을 가장 잘 알고 매일 몸으로 겪고 있는 주민들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게 하는 책이었다.
몇 해 전만 해도 듣도 보도 못한 일들이 서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재건축 소식을 쌍수를 들어 환영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뉴타운 해제를 요구하며 나서기도 한다. 변화를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사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예전과는 다른 태도를 보이게 만들었는지를 묻게 된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출세를 꿈꾸며 수도 서울로 상경한 대다수는 일에 그리고 사람에 치이며 이제껏 버티어 왔다. 그들에게 집은 지친 몸을 뉘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잘 시간도 부족하다 보니 옆집에 누가 사는지, 더 나아가 우리 동네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파악할 짬은 없었다. 파편화된 개개인은 당연히 외로웠다. 그랬던 것이 2010년 지방선거와 함께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행정이 나서서 인위적으로 마을공동체를 복원하는 게 옳은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잇기를 막대한 예산을 투자해 이루려 하는 걸 부정적으로 보는 눈들도 많음을 잘 안다. 그러나 분명한 건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마을에서 자신이 지닌 욕구를 해결하고, 제 거주 공간을 자신이, 우리 가족이, 지역 주민 모두가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많은 주민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오로지 세련되기만 했던 도시에 인간미를 더해가며 사람들은 스스로 제 삶터를 보다 살기 좋은 공간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은 서울 혹은 우리나라만의 것이 아니었다. 사실 협동조합의 천국이라는 스페인의 몬드라곤이나 꿈의 생태도시로 불리곤 하는 브라질 쿠리치바 등에 대해선 익히 들어봤다. 극도로 발달한 자본주의가 ‘사람 소외’라는 끔찍한 결과를 낳았는데, 이들 도시는 현명한 방법을 통해 위기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 시애틀의 사례는 이번에 처음 접했다. 미국이라 하면 그저 자본주의에 충실한 국가로만 이해해왔다. 그곳에도 사람이 살긴 하지만, 공동체를 부르짖기엔 개인주의가 너무도 강렬하다는 인상을 이제껏 지녀왔던 터였다. 시애틀에서 행해지고 있는 많은 시도들, 이를 테면 마을계획이라든가 마을기금 등은 우리나라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을을 전담하는 부서가 신설된 점 역시 우리나라와 판박이었다. 어쩜 이렇게 유사할 수가 있을까.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한 모양이라면서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나에게 저자의 말 한 마디가 와 닿았다.
“도시는 결국 정치다”
많은 이들이 정치를 썩었다며 외면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청계천 복원을 결정하고 추진한 것도, 도시재생을 시도하다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불러일으킨 것도 정치였다. 지금은 뜸하지만 과거 모두를 흥분시켰던 재건축, 재개발도 마찬가지다. 정치가 어떠한 결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도시의 모양새는 달라졌다. 정치가 택한 지역은 높디높은 고층 빌딩 천국이 된 반면 정치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지역은 저개발, 낙후의 오명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다. 실로 막강한 힘을 지닌 정치라 하겠다. 안타깝게도 정치의 선택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 탓에 집을 잃고 외곽으로 밀려나고, 정치로 인해 화려하되 행복하진 않은 삶을 살기도 한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정치가 정치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개개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국가 차원에서만 생각할 게 아니라 개개인으로 시선을 집중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킬 정치를 행할 수 있다. 여러 해가 흘렀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을 미소 짓게 만드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포스트잇 소식이 떠오른다. 새로 이사 왔음을 알리는 꼬마 아이의 쪽지에 모두가 반갑게 화답했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의 정치는 어떤가. 일자리를 찾아 마을을 떠나는 게 아니라, 역으로 마을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기로 결정한 청년들의 정치는 또 어떠한지. 자신은 정치를 한 게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그들의 선택 또한 희망을 써 내려가는 정치임이 분명하다. 개개인의 정치가 마을을 향하고, 집단의 정치 또한 마을을 주목하는 요즘, 마을은 변화하고 있다. 행복을 꿈꾸는 이들이 마을에 머물면서 마을은 삭막함으로부터 탈피하기 시작했다.
좋은 도시는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발견하는 것이다. 좋은 시민들이 살고 있는 곳이 좋은 도시라면, 그걸 내가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좋은 시민이 되어야 하고, 나처럼 좋은 시민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사람들, 좋은 시민들이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좋은 도시다. 좋은 시민이 좋은 도시를 만든다.
행복한 도시를 바란다면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 자신에게, 당신에게. 더불어 사는 삶으로부터 기쁨을 느끼길 바라기에, 오늘도 난 어제보다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