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다 번 저/김우열 역
박용후 저
스미노 요루 저/양윤옥 역
한근태 저
김지훈 저
호아킴 데 포사다,레이먼드 조 공저
2014년 12월 05일
출판된지 좀 오래된 책이지만 책 제목처럼 황경신 작가님의 '생각이 나서'가 생각이 나서 책을 구매했습니다. 시집 같기도 하고 일종의 수필 같기도 한 책인데요. 작가님 특유의 뒤틀어진 문체가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책입니다. 우리는 타인이 아니기 때문에 온전히 그 사람의 생각들을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타인의 생각을 이해해보려는 시도는 아름다운 것 같아요.
이게 내 일기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내놓을만한 일기장은 거의 유실되었다. 초등학교 때의 그림일기 이후로 자물쇠가 걸린 수첩에 그날 느꼈던 감정들을 적어왔다. 가끔 엄마나 동생이 자물쇠를 열어보려고 했다는 걸 눈치챘기에 열쇠를 항상 지니고 다녔다. 매년 한 권씩 일기장이 쌓일수록 부담감이 커져갔다. 만일 누군가 판도라의 상자 같은 내 일기장을 열어버리게 된다면 무척 난감할 것이기에 이사할 때 모조리 버렸다.
다시는 들춰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부쩍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나는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다. 멀지 않은 미래에도 마찬가지로 지금 이 순간을 그리워하며, 희미한 기억 속에 파묻혀버린 일들을 꺼내보고 싶을 것 같다. 그래서 여러 방법으로 일기를 쓰곤 한다. 일기라고 쓰긴 하지만 대부분 내 마음을 쓴 것들이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 조용히 털어놓으며 감정을 돌아본다. 어떤 이야기들은 쓰고 난 뒤 없애버리기도 한다. 아쉬움이 남지만 그게 최선일 때도 있다.
한때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열풍이던 시절 나도 그곳에 사진과 글을 남겼다. 내 얼굴과 일상을 담은 사진은 거리낄 것 없이 전체 공개를 해두었지만, 일기나 글은 모두 비공개로 저장했다. 그만큼 내 글을 남들에게 드러낸다는 게 부끄러웠다. 블로그는 얼굴이 공개되지 않으니 그나마 뻔뻔하게 글을 올리고 있지만 말이다. 이 책을 들고 주르륵 넘겨보다가 몇 년 전 다이어리에 썼던 내 일기장이 연상되었다. 특정 나라의 감성 사진이 담긴 다이어리였고, 마음에 드는 사진 옆에 그날의 일기를 적곤 했다.
황경신 작가의 책을 여럿 읽으면서 그의 문장을 좋아하게 되었다. <생각이 나서>라는 제목부터 마음을 끌어당겼다. 입안에 맴돌다가 어느새 귓가에서 맴돈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자주 전화 통화를 하던 이가 생각났다. 그의 첫인사는 늘 '네 생각이 나서'였다. 그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어떤 감정으로 통화를 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언제나처럼 하루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다가 잘 자라는 인사로 끝을 맺을 뿐이었다. 이제는 서로의 연락처나 소식도 모르지만 이 책의 제목을 읽으며 불현듯 그가 떠올랐다.
책의 모든 페이지마다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들은 내 마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좀처럼 흘려보기 어렵도록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듯한 사진들이다. 사진과 글의 제목이 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어떤 글은 내 생각과 너무도 일치해서 나를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좋았던 글귀와 사진들을 남겨본다.
어느 날 문득 불협화음과
형식 없음의 세계가 궁금해진 것은,
이 세상에는 완벽한 화음과
형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누군가와의 불편한 의사소통,
그로 인한 불협화음을
이제 있는 그대로 한 번 받아들여보자,
라는 심정이 되었다는 것일까.
애초에 잘 들어맞게 되어있는 화음보다,
불협화음의 화음이 주는
긴장의 매력을 조금은 알게 된 것이다.
P.17 <불협화음>
어떤 것은 머리가 기억하고
어떤 것은 마음이 기억한다.
어떤 것은 청각이 기억하고
어떤 것은 후각이 기억하며
또 어떤 것은 시각이 기억한다.
기억이라는 것은 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을
수백, 수천 가지로 세분화시킨다면,
그 각각의 부분에 기억을 위한 장치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P.31 <기억>
한 사람을 조금 더 알게 되면,
사랑을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게 된다.
한 사람을 조금 더 알게 되면,
그의 손을 잡고 미래로 걸어갈 수도 없고
혼자 버려두고 뒤돌아갈 수도 없게 된다.
한 사람을 조금 더 알게 되면,
알면서 모른 척하고
모르면서 아는 척하게 된다.
이것이 제1의 딜레마.
나를 잘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다가도
누군가 '너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면,
나는 '이런'사람 말고
'저런'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나를 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다가도,
누군가 나를 제대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휘장을 내리고 달아나고 싶어진다.
이것이 제2의 딜레마.
P.84 <딜레마>
절대로 결혼은 안 할 거라고?
장담하지 마. 이 세상에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단 하나 있다면 언젠가 우리가 죽는다는 것 뿐이야.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맹세하지 마. 맹세만큼 여리고 무의미한 건 없어.
맹세하려면 지금 이 순간은 진실이라고 맹세해. 모든 건 이 순간의 감정일 뿐이야.
세상에 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고?
그런 게 어디 있어? 뭐든 해버려! (106)
한때는 수필집이나 에세이를 읽지 않으려고 했던 적이 있다. 내 감정이 어떠냐에 따라 책을 읽는 감정의 농도가 달라지고, 기분도 달라졌으니까. 세상에 무심한 편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 적도 있다. 하지만 세상이 어디 혼자만 사는 곳일까? 누군가는 상처를 주지만 또 누군가는 나에게 힘이 되기도 한다. 좋은 글이 나에게 그런 역할을 한다. 한 동안 읽지 않았던 에세이나 수필집을 읽게 된 이유 또한 그런 역할들 때문 아니었을까? 마음 안에서 어떤 감정이 똘똘 뭉치고, 엉겨 붙어 어떤 기분인지 조차 모를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글을 만나면 눈물이 난다. 나만 이런 감정이 아니었구나.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파하고 있구나. 이 감정을 추스르고 일어나면 되는 거구나 하는 위로와 위안을 받게 된다.
황경신 작가의 책을 읽으며 황망했던 내 마음을 위로한다. 그리고 살살 달랜다. 괜찮은 거라고, 삶은 누구나 다양한 감정과 매일 싸우고, 선택하는 거라고, 그 선택에 정답은 없으니 무엇이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해준다. 힘들었던 2017년을 보내고 새롭게 2018년을 맞이했지만 이번엔 야심차게(?)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무계획이 계획이라고 아무런 계획 없이 1년을 보내려고 생각중이다. 하루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쯤은 늦잠을 자보고, 하루쯤은 살림이고 뭐고 다 때려치울 생각도 하고 있다. 세상엔 영원한 것도 없고, 장담을 한다고 해서 그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하면 안 되는 것이 없는 것처럼, 세상에 하고 싶지 않은 걸 하지 않는 용기도 필요함을 이젠 알 수 있다.
뭐든 해버릴 수도 있지만 뭐든 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이런 자유를 누리고 싶다. 강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그런 요즈음인가 보다. 이 글을 통해 아무것도 장담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마음먹은 걸 보면. ^^ 올해는 조금 더 설렁설렁 살아보려 한다. ^^ 그래도 괜찮겠지? ^^ 이런 생각이 나서, 에세이를 읽으며 조금 더 나른해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