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1월 31일
단순히 제목만 보고 고른 책이었습니다. 삶은 왜 짐이 되었냐니... 짐이 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짐이었습니다만? 그런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습니다. 평소에 철학은 그다지 좋아하지도, 관심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다소 낯설기도 했으나 저자의 설명 덕분에 술술 읽혔습니다. 특히 '새로운 세계이해를 갖는다는 것은 인간이 전적으로 새로운 인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라는 문장에서는 많은 공감을 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공유하는 일은 내 세계의 몸집을 키우고 동시에 다른 이의 세계에 초대된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그런 점에서 지금 하고 있는 독서모임 활동과도 잘 어울렸던 것 같습니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그 존재 자체에 경이로움 또한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많은 것들의 가성비를 따지고, 가치를 따지는 스스로의 모습이 떠올랐으면서도 동시에 그렇게 살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변했다고 느꼈습니다.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존재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고, 놀라움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 존재를 매순간 느끼며 살 수 있다면... 그러나 그것은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습니다. 제게 철학이 철학으로만 머무르게 되는 건 그 이유인 것 같습니다.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눈앞에 보이는 쾌락과 물질적인 가치의 추구는 오늘날 우리의 삶을 공허하게 만들었다.
공허하지 않은 삶을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할까?
책에는 그런 구절이 있다. 장미는 이유없이 존재한다. 아무런 이유없이 호젓하게 피어있는 장미처럼, 우리의 존재도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로 기쁨을 느끼며 살 수 있을까?
의미를 찾는 과정은 너무나도 험난하다. 세상의 기준에서 가치를 찾으려고 자기 계발을 할 수록 남들과 비교하게 되고 결국 의미는 커녕 자기만족을 이루기에도 쉽지 않다. 오늘날의 가치추구는 너무나도 세속적이고, 경쟁적이고, 평생을 걸쳐도 달성해내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기 보다는 장미가 이유없이 존재하는데 충만함을 느끼는 것 처럼, 자연이 단지 자연으로써 경외감을 주는 것처럼, 그 자체로 존재한한다는 것에 집중해야한다.
삶의 이유를 찾는 인간이야 말로 사유할 줄 아는 존재이고 때문에 감사할 줄 아는 존재이다. 세상의 것들의 경외를 느끼고 존재만으로 감사한다면, 허무라는 감정을 존재의 감사의 마음으로 극복할 수 있다. 극복이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다. 삶의 이유도 너무 거창하다. 그냥 산다. 그냥 존재한다. 이것이 삶을 사는데 작은 위로 정도는 될 수 있겠다.
우리는 고향을 상실했다. 권태를 피하기 위해 자극적인 것들만을 짧게, 많이 소비한다. 너무 많은 것들이 그냥 스쳐지나간다. 모든걸 잡아 꼭꼭 씹어먹을 수는 없겠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밍밍하더라도 체화하고 느끼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한 시간이 내게 충만이라는 감정을 줄 것이다.
나 자신의 존재 자체에 감사하고, 자연과 주위에 충만한 감동을 받겠다. 스쳐지나가는 것들을 조금은 내려놓고 꼭꼭 씹어 체화할 수 있는 세속의 자극에서 벗어난 취미를 온전히 즐기는 시간을 갖겠다. 이 두가지가 책을 읽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한 결과이다.
페이지수에 비해 많은 챕터로 구성되어있는데, 복잡한 주제를 다루다보니 이렇게 조금씩 끊어서 이해를 돕는 점이 효과적이라고 봅니다. 철학에 대해 관심은 있지만 철학자마다 말하는 방식이 가지각색이라 쉬운 말로 풀어내는 게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책은 하이데거의 주장을 이해하기 쉬운 말로 잘 풀어 설명해줘서 좋았습니다. 하이데거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에게 추천드리는 책이에요.
이는 보고서 쓰기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현대기술문명에서는 모든 사물과 존재를 변환 가능한 에너지원으로 본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시대의 존재자들은 존재를 상실하였다. 심지어 위기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궁핍의 시대’, ‘위기상실의 위기’의 시대를 노동과 그 대가인 대용물로 버티고 있다. 이 상실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가? 박찬국 교수의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는 하이데거의 사상을 쉽게 풀어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사상은 어렵기로 유명하다. 대학생 시절, 의지 충만 도전했다 좌절한 기억이 생생하다. 저자는 쉽게라고 말했지만 내가 너무 힘을 주고 읽으려 해서인지 쉽사리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첫 도전 때 가벼운 마음으로 읽다가 중도에 포기했었기에, 이번에는 노트를 꺼내들고 정리를 시도했다. 내가 올바르게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거칠게 요약을 해보자면, 현대기술문명사회에서 존재자들은 존재(성스러움)을 잃어버렸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적 이성을 회복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다. 이 시대의 궁핍(현대과학기술문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인으로서 지상에 거주하는 것”이 하이데거의 답이다. 늘 그렇지만 철학은 우리 곁에 있다고들 한다. 이를 주장하는 책들 역시 꽤 보았지만 역시나 체감이 잘 가지 않는다. 다만, 성스러움을 회복하는 일에 근본기분 경이, 불안, 경악이 필요하다는 부분은 얕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삶을 짐으로 느끼는 것을 넘어서 그 짐을 어떻게 하면 가볍게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삶을 즐겁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p.154)” 하는 존재인데,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주체라는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다. 현대인들은 노동과 향락에 젖어 의지 내지는 탐욕의 노예로 ‘존재’를 망각한 채 고통 받고 있다. 고독감, 무력감, 허무감은 그렇게 우리를 찾아온다. “우리네 인생은 고독감과 무력감 그리고 허무감에서 벗어나려는 노력(p.173)”이라 본다면, 현대사회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대용물과 향락은 고독감, 무력감, 허무감을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근본욕망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 이누이트 족이 늑대를 잡을 때, 늑대는 자기의 피에 도취되어 죽음에 이른다. 우리의 모습이 바로 딱 그 모습이다.
여기서 ‘시’의 의미가 중요하다. 시는 “시어를 통해 존재의 소리를 구체화(p.207)”한다. 즉, 시를 통해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자신 안에 깃들게 하는(p.208)”일을 통해, 존재를 회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게 하는 근본기분이 있는데, 경이, 불안, 경악이다. 개인적으로 근본기분의 힘은 ‘낯설게 보기’라고 느겼다. 평범한 꽃이라 평소에는 보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 그 꽃이 찬란하게 눈비시며 눈에 띄는 경우가 있다. 아니면 늘 똑같은 일상에서 주변사람이 죽어갈 때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며 불안에 떠는 때가 있다. 일상을 다르게 보거나, 강한 충격에 의해서 달리 보이는 경우다. 그 순간 우리는 ‘존재’를 낯설게 본다. 다른 방면으로 바라보고, 존재에 대해서 고민한다. “깊은 겨울 밤 사나운 눈보라가 오두막 주위에 휘몰아치고 모든 것을 뒤덮을 때야말로 철학을 할 시간이다.(p.248)” 위기의 순간 우리 모두 철학자가 되고, 시를 읽고, 정체성을 고민하며, 더 나은 삶을 찾는다. 이 순간, 우리가 지상에서 시인으로 존재하는 순간이 아닐까. 사역을 있는 그대로 실현하는 순간이 바로 이 위기의 순간이다. 그래서 하이데거가 ‘위기상실의 위기’를 걱정한 것이 아닐까 싶다.
늘 그렇듯 철학은 어렵다. 하지만 실천이 더 어렵다. 존재자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 나를, 자연을, 주변사람들을 존재 그대로 감사한다는 것이. 자연을 벗 삼고, 그대로의 나를 찾아 세상과 조화한다는 일이. 오늘도 노동의 굴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료를 수단으로 대하고, 나를 찾는 사람을 처리해야 할 일로 보고, 사람들의 선의를 내 자신의 에너지로 소모하는 자신을 돌아본다. 누군가의 딱한 처지가 해체 되어 보고서의 작은 숫자 하나로 소멸되는 것을 바라본다. 자연 속에서, 고요한 정적 속에서 살기에는 향락에 너무 중독된 것일까. 너무 멀리까지 와 버린 것이 아닌가. 거대한 의지와 욕구 앞에서 내가 어떻게 존재를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찾더라도 유지는 가능한가. 두렵다. 그렇다. 오늘도 이런저런 글들을 호기심 삼아 읽고, 잡담으로 소일하며, 고요한 정적에서 한 걸을 멀어진다. 희미한 내 존재에 대해 고민해본다. 나는 지상에서 시인으로 사는가, 경영인으로, 기술자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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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와 중세시대에 이룩된 기술적 진보, 즉 마차와 풍차 등은 삶을 편리하게 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있어 과학기술은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삶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의존해야 할 우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과학과 기술은 일종의 신적인 존재가 되었고, 현대는 종교와(p.52) 가장 무관한 시대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가장 종교적인 시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53
근대과학은 세계를 '양화 가능한 에너지들의 연관체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이러한 과학적인 세계이해는 결국에는 인간마저도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한갓 '계산 가능하고 기술적으로 처리되어야 할 에너지'로 간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p.54
근대의 과학은 '사물을 정복하고 만물을 보편적으로 지배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따라서 현대과학의 응용은 더 이상 과학에 대해서 외적인 것, 즉 과학에 부가된 것이 아닌 과학 자체의 본질이 되었다' p.56
현대인들이 거대한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 ... 인간은 기술 문명의 어떠한 주체도 아니면서 자신이 주체라고 생각하는 착각... 현대기술문명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세계를 기술적으로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의지’ 내지는 ‘탐욕’ p.57
현대인들이 기꺼이 탐욕의 노예로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의 심신을 혹사하는 대가로 받는 물자들에 도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p.58
노동과 향락은 현대인들이 삶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노동과 향락으로만 이루어진 삶은 어떠한 무게와 존엄도(p.61) 갖지 않는 공허한 무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p.62
이 시대의 위기를 사람들이 깨닫지도 느끼지도 못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오늘날의 위기가 갖는 근본적인 심각성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하이데거는 ‘위기상실의 위기’라고 부르며. p.62
비교의식이 일상을 지배함에 따라 타인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자신의 권태를 메우는 수단이 되거나 다른 사람의 흠을 들추어 그들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호기심이 되기 쉽습니다. 또한 타인에 대(p.75)해 우리가 하는 말 역시, 그 사람에 대한 아무런 애정이나 진실성이 깃들어 있지 않은 잡담이 되곤 합니다. p.76
우리는 항상 기분 속에서 존재합니다. p.88
“장미는 이유 없이 존재한다. 그것은 피기 때문에 필 뿐이다. 장미는 그 자신에도 관심이 없고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지도 묻지 않는다.” -안겔루스 질레지우스 p.107
타인의 시선이 불편한 이유는 ‘나’라는 존재가 그들의 평가하는 대상으로 완전히 전락해버리기 때문입니다. p.117
죽음은 이런 의미에서 일상적인 삶의 자명성을 파괴해버립니다. 그리고 그 어떤 세상의 가치로도 환원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우리의 유일무이한 존재에 직면하게 합니다. p.134
삶을 짐으로 여길 수 있는 존재는 우리 인간뿐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p.153
(셸링) “모든 동물은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 p.154
동물과 달리 인간은 삶을 짐으로 느끼는 것을 넘어서 그 짐을 어떻게 하면 가볍게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삶을 즐겁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우린느 간혹 삶을 경쾌한 유희로 느끼며 웃곤 합니다. ‘인간만이 웃을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p.154
동물의 세계는 본능적인 조절장치에 의해 제한되어 있는 닫힌 세계인 반면, 인간의 세계는 본능이 약화되고 이른바 ‘생각하는 능력’인 이성이 깨어남으로써 열린 세계가 되었습니다. ... 이와 동시에 인간은 동물이라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파스칼은 끝없이 펼쳐진 우주를 보면서 “이 무한한 우주공간의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p.159
(쇼펜하우어)개는 인간적인 허위를 갖지 않는 지적인 존재다. p.161
인간의 삶이 가지는 비극과 영광은 인간이 동물과 100퍼센트 동일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동물과 100퍼센트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동물에게는 사치로 밖에 보이지 않을 고독감과 무력감과 허무감을 느낍니다. p.166
우리네 인생은 고독감과 무력감 그리고 허무감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욕망은 식욕이나 성욕보다는 고독감과 무력감 그리고 허무감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입니다. 이 욕망은 심지어 생존욕에 해당하는 식용은 물론 번식욕에 해당하는 성욕까지 규정합니다. p.173
하이데거는 현대를 두고 ‘과거의 신들은 떠났지만 새로운 신들은 아직 오지 않은 시대’라고 말합니다. p.188
시인은 시어를 억지로 지어낼 수 없습니다. 그는 침묵 속에서 존재가 정적의 소리로서 울리는 것을 듣고, 그 존재로부터 증여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시인의 말은 사물에 대해 시인이 주관적으로 느낀 것을 표현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시인은 침묵 속에서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시어를 통해 존재의 소리를 구체화 합니다. 시가 존재의 소리를 구체화하는 것인 한, 시는 항상 자신 속에 꿰뚫을 수 없는 깊이와 신비를 간직합니다. p.207
‘언어는 존재의 집’ ...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자신 안에 깃들게 하는 시어’ p.208
경이라는 기분은 모든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가 열리는 존재의 소리와 인간의 말 사이에 일어나는 화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근본기분을 존재의 소리가 인간에게 전해지는 통로라고 생각합니다. ...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시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배하는 근본기분에 사로잡히면서 그 시에서 발해지는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p.210
신들은 우리의 경건한 사유와 삶 속에서야 비로소 세계에 임재할 수 있다. p.215
세계에 대한 과학적 파악과 기술적인 지배를 통해 행복을 실현하려 할 때 우리는 오히려 불안과 초조를 느낀다. 이러한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물질적인 대용제를 생산하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p.243
“깊은 겨울 밤 사나운 눈보라가 오두막 주위에 휘몰아치고 모든 것을 뒤덮을 때야말로 철학을 할 시간이다.” p.248
소로는 사람들이 자연을 파괴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p.265
(소로)사물에 대한 ‘사랑’이나 ‘공감’에 기초를 두지 않는 한 그것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사랑은 사물과 인간이 서로 의존해 있다는 사실,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의 정신과 사물이 서로 완벽하게 호응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입니다. p.266
(소로)지나친 전문화는 자연과 사물의 정기에 대한 통일적인 감각을 상실한 채 죽어 있는 세부지식만 양산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p.268
가치가 계산될 수 없다는 점이야말로 그것들이 모든 비교를 뛰어넘는 존엄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시사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p.275
(하이데거는) 그는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주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려고 했습니다. p.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