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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페이지에 불과한 이 책을 다 읽는데 무려 2주 넘게 걸렸다.
물론 지금 내가 여유롭게 책이나 읽고 있을 형편이 안 되는 것도 있다.
작년 8월 복직해서 6개월동안 한 일보다 더 많은 일을 3월 한달에 했으니 말 다했지.
하지만 학술서나 논문도 아니고,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적어 내려간 에세이인데도 이렇게나 오래 걸려서 읽었다는건, 역시 이 책에서 별다른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별로라고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책을 읽는 독자의 상태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좀 더 여유롭고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환경에서 이 책을 접했다면 아마 매 페이지마다 맞장구를 치면서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즘 나는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는 커녕 매일 파김치가 되어 퇴근하는 실정이다.
그런 마당에 '중년을 맞이하는 여자의 자세'는 조금도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당장 내일 할 일로 머리가 꽉 차 있는 상태에서 뭔가가, 특히 이렇게 말랑말랑하고 약간은 권태로운 주제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인생은 타이밍' 이라지만 독서 역시 타이밍이 맞아야 한다.
이 책의 전체적인 주제는 '중년이 되어서 하는 첫 경험'.
우리는 보통 첫 경험은 어린이나 젊은이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나이가 들면서 처음 하게 되는 경험도 상당히 많다.
차이점이 있다면 전자는 꽃이 피는 과정이고, 후자는 꽃이 지는 과정이라 첫 경험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느낌이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하는 첫 경험은 싱그럽다.
친구와의 우정, 연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중에 겪는 모든 것이 주변의 축복을 받는다.
반면 중년들의 첫 경험은 이렇다.
흰머리와 주름이 생긴다거나, 노안이나 오십견이 온다거나, 여자의 경우엔 갱년기나 폐경을 겪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자리를 양보받는 경험도 해본다.
이런 경험들로 축복을 받아본 사람, 손 들어 보시길?
아마 축복은 커녕 '이 사람이 누굴 놀리나?' 싶어 화가 불끈 치밀어 오를 것이다.
같은 첫 경험이지만 그 사이의 갭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중년의 첫 경험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인 사카이 준코는 그런 생각을 살짝 비틀어 '아, 이것도 내가 인생에서 겪는 첫 경험이구나' 라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저자가 이 책을 쓰고 있을 무렵, 일본에서는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났다.
그래서인지 유독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이 많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는 것으로도 모자라 방사능 피폭에 대한 두려움까지 안고 살아가야 하는 후쿠시마 주변 사람들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책 곳곳에 묻어난다.
하긴 아무 상관없는 내가 봐도 처참하고 마음이 아팠는데 같은 일본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이 사건은 정말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저자의 전작인 《저도 중년은 처음입니다》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평을 하자면 전작이 훨씬 좋다.
책을 읽을 동안의 내 상태는 차치하더라도 전작에 비해 이 책이 주는 울림은 확실히 약했다.
'중년의 첫 경험'이라는 주제 자체는 무척 신박했으나 뭔가 책이 주는 전체적인 느낌이 이쪽으로 확실하게 방향을 잡지 않은 것 같다.
이 이야기 했다가 저 이야기 했다가 하는 식이랄까.
물론 에세이의 특징도 있겠지만 조금 산만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중년을 맞이하는 마음의 자세를 달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들어가는 입장에서 '어머, 이거 나 인생에서 처음 경험해 보는 거얏' 라며 호들갑을 떨지는 않더라도 뭔가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1년의 사계절을 지내다 보면 꽃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꽃이 지고 나서 볼 수 있는 푸르른 녹음도 멋지고, 가을에 물드는 단풍의 정취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나는 지금 인생에서 어느 순간을 지나고 있일까.
녹음은 이미 지난 것 같고, 이제 막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시점일까.
나이 먹는 것에 대해 너무 두려움과 패배감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마 이 책의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 같다.
새해가 되면 내 나이를 체감하게 된다. 사실 평상시엔 나이에 대한 자각을 많이 하지 않지만, 새해엔 한 살 또 더해진 새로운 나이에 어색하기도 하고 내가 살아온 시간들을 느낄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중년이라는 나이가 항상 내게는 멀게만 느껴졌었는데, 내게도 이제 중년이라는 나이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깨닫게 되는 새해엔 그래서 조금은 서글프고 우울해 지기도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봐도 그 숫자에 연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람 마음. 그래서 나이 앞자리 숫자가 바뀌어 심란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만한 책들이 새해엔 많이 생각나는 것 아닐까. 나는 아직 여유가 조금 있지만, 중년의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는 만큼 시들지 않고 더욱 활짝 피어나는 중년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호들갑을 떨며 크게 기뻐한다.
조금 더 일찍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나도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 책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온 저자의 40대와 50대의 무르익은 삶을 담고 있다. 사실 중년이라는 말 자체가 품고 있는 통상적인 이미지는 원숙하게 나이 든 시기라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중년의 삶은 젊은 시절 많은 것을 처음 경험하며 빠르게 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롭고 즐거운 일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려준다. 거들을 처음으로 입게 되고, 어른들의 세계라 여겨졌던 디너쇼와 오페라를 처음 관람하고,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해외로 여행을 가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새로운 요리에 도전해 보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첫 경험들은 왠지 서럽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솔직하게 모든 걸 인정하고 또 받아들인다. 모든 것이 낯설고 중년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만큼 서툴지만, 그래도 그녀의 당당함은 그 어떤 나이대보다 아름답다.
가끔 멋을 부리고 외출하고 싶은 욕구는
실로 중년 여성의 욕구 자체가 아닐까?
크리스마스 이브를 앞두고
더 이상 가슴 설레지 않은 우리지만,
멋지게 중년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면서 12월의 밤은 깊어갔다.
하지만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동일본지진에 대한 이야기다. 그 재해로 인해 그녀 역시 큰 충격과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진짜 전쟁이 난 것처럼 슈퍼마켓의 진열대가 텅텅 비고 기나긴 줄을 서서 물건을 사는 경험, 전기를 만들기 위해 세워진 원전으로 인해 후쿠시마 주민들이 겪게 되는 피해를 자신을 탓하며 절전 생활에 돌입하기도 하고, 사고 후 후쿠시마를 찾아 사람들의 삶 속에 들어가 보기도 하는 등. 일본 전 국민들이 모두 함께 겪어야 했던 고통이겠지만 특히나 그녀에겐 중년의 시기에 겪은 가장 큰 사건이 아닐까 싶다. 그로인해 타인을 생각하는 더 큰 마음을 가진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나이가 드는 것을 거스를 수 없음에도 끊임없이 젊음을 바라고 집착하다 보면 그 나이에만 할 수 있는 일들을 의미없이 그냥 지나쳐 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을 받아 들이고 좀 더 당당해 질 것을 이야기 한다. 나이들어 살이 처지면 어떻고 흰머리가 좀 나면 어떤가. 자연스러운 하나의 과정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에 의미를 두지 말고, 새롭게 찾아오는 중년의 첫 경험들을 즐겁게 즐기다 보면 행복한 하루 하루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도 나이에 연연하지 말자고 새해마다 다짐하곤 하지만 20대 때와는 달리 30대가 되고는 사실 좀 예민해 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삶이 더 원숙하고 진지하고 지루해질 것이란 편견과 달리 또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새로운 경험들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되니 40대가 된다는 것에 대한 강박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그녀가 직접 겪어온 중년의 삶을 돌아보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 그러니 받아들이고 당당해지라는 것. 겪어 본 사람만이 해줄 수 있는 이야기이지 않을까. 어쨋든 가장 좋은 것은 나이에 상관없이 그저 지금 주어진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더이상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화창한 중년을 기다릴 수 있는 30대를 보내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발전도 하지만 퇴화도 하는 것,
이게 중년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