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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역사

발터 샤이델 저/조미현 | 에코리브르 | 2018년 7월 4일 한줄평 총점 10.0 (6건)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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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정치 > 사회학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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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불평등에 관해 사실 지금까지 우리는 상당히 암울한 상황에 봉착했다. 『불평등의 역사』는 빈부 격차의 실질적 축소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었음을 알려준다. 다시 말해 평준화의 규모는 대부분 폭력의 규모가 좌지우지한다는 것이다. 무력을 더욱 많이 투입할수록 평준화는 더 많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을까? 폭력은 언제나 평준화의 원천이었을까? 비슷한 성과를 배출한 적이 있는 평화로운 대안이 있었는가?

물론 잠재적인 후보들이 존재했고 또한 인간들의 노력이 있었다. 특히 토지 개혁, 경제 위기, 민주화 및 경제 발전 들 말이다. 토지 개혁은 일반적으로 농경지가 사유 재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마땅히 평준화 노력의 첫 번째 자리에 등극할 만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토지 분배는 폭력과 연관되지 않지만 항상 그러한 노력은 폭력이 개입되었고, 성공했다 하더라도 얼마 지속되지 못했다. 그리고 냉전의 종식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경제 위기도 결론적으로 말하면 평준화의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금융 위기는 역효과를 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 제도의 팽창은 평화적인 수단으로서 그럴싸한 후보일 수 있다. 하지만 고대 아테네식 민주주의의 진화가 대중 동원 전쟁과 얽혀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서구 국가들이 20세기 상반기의 특정 시점에서 선거권을 확대한 것은 중요하게도 양차 대전의 충격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만으로 민주화가 그런 국가에서 물질 자원 분배에 평준화 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비춰질 수 있겠지만, 이것이 어떤 과정이든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전쟁의 압력에 의해 촉발됐을 것이다. 20세기 후반 이후 지금까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킨 변화의 배후에 있는 추진 동력은 대압착 이후의 국가 간 관계 및 세계 안보의 진화를 반영한다. 요컨대 폭력적 충격이 글로벌 무역망을 파괴하고 사회적 결속과 정치적 화합을 북돋우고 공격적인 재정 정책을 지속시킨 반면, 폭력적 충격의 완화는 소득 분산과 부의 집중에 대한 견제를 약화시켰고, 다시 불평등은 급격한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목차

그림과 표 목록
감사의 글
서문: 불평등이라는 도전 과제
1부 불평등의 역사
01 불평등의 탄생
02 불평등의 제국
03 불평등의 기복
2부 전쟁
04 총력전
05 대압착
06 산업화 이전의 전쟁과 내전
3부 혁명
07 공산주의
08 레닌 이전
4부 붕괴
09 국가 실패와 체제 붕괴
5부 전염병
10 흑사병
11 대유행병, 기근 그리고 전쟁
6부 대안
12 개혁, 불황 그리고 대의권
13 경제 발전과 교육
14 만일 이랬다면? 역사로부터 반사실로
7부 돌아온 불평등과 평준화의 미래
15 우리의 시대
16 우리의 미래는?
부록: 불평등의 한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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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2명)

저 : 발터 샤이델 (Walter Scheidel)
오스트리아 출신의 역사학자이다. 1984~1993년 비엔나 대학교에서 고대사와 화폐학을 공부했으며, 1993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스탠퍼드 대학교에 자리를 잡기 전까지 비엔나 대학교, 미시간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등에서 근무했다. 현재 스탠퍼드 대학교 인문학부 딕커슨 교수이며, 고전 및 역사학 교수이자 인간생물학부의 케네디 그로스먼 선임연구원이기도 하다. 그동안 전근대 사회·경제사, 인구통계학, 비교역사학 등 폭넓은 분야에 걸쳐 관심을 갖고 연구해왔다. 주요 저술 및 편집한 책으로는 『나일강의 죽음: 로마령 이집트의 질병과 인구통계학(Death on the N... 오스트리아 출신의 역사학자이다. 1984~1993년 비엔나 대학교에서 고대사와 화폐학을 공부했으며, 1993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스탠퍼드 대학교에 자리를 잡기 전까지 비엔나 대학교, 미시간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등에서 근무했다. 현재 스탠퍼드 대학교 인문학부 딕커슨 교수이며, 고전 및 역사학 교수이자 인간생물학부의 케네디 그로스먼 선임연구원이기도 하다. 그동안 전근대 사회·경제사, 인구통계학, 비교역사학 등 폭넓은 분야에
걸쳐 관심을 갖고 연구해왔다. 주요 저술 및 편집한 책으로는 『나일강의 죽음: 로마령 이집트의 질병과 인구통계학(Death on the Nile: Disease and the Demography of Roman Egypt)』 『로마와 중국: 고대 세계 제국에 대한 비교 견해(Rome and China: Comparative Perspectives on Ancient World Empires)』 『고대 중국과 로마의 국가 권력(State Power in Ancient China and Rome)』 『전근대 국가의 재정 체제 및 정치경제학(Fiscal Regimes and the Political Economy of Premodern States)』 『인간 속박에 대하여: 노예제와 사회적 사망 이후(On
Human Bondage: After Slavery and Social Death)』 등이 있다. 현재 캘리포니아주 팰로앨토에서 살고 있다.
역 : 조미현
서울대학교 신문학과를 졸업하고, 영화 잡지 [월간 키노]에서 기자로 일했다. 그 밖에 장편영화 연출부, 독립영화 프로듀서, 실험극단 기획자 등으로 활동했다. 옮긴 책으로 『테크놀로지의 덫』, 『물 위를 걷고 벽을 기어오르는 법』, 『무신론자와 교수』, 『자본 없는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황금기는 다시 오지 않는다』, 『불평등의 역사』, 『에드먼드 버크와 토머스 페인의 위대한 논쟁』, 『십대의 재능은 어떻게 발달하고 어떻게 감소하는가』, 『마음의 혼란』, 『꿀벌의 숲속살이』 등이 있다. 서울대학교 신문학과를 졸업하고, 영화 잡지 [월간 키노]에서 기자로 일했다. 그 밖에 장편영화 연출부, 독립영화 프로듀서, 실험극단 기획자 등으로 활동했다. 옮긴 책으로 『테크놀로지의 덫』, 『물 위를 걷고 벽을 기어오르는 법』, 『무신론자와 교수』, 『자본 없는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황금기는 다시 오지 않는다』, 『불평등의 역사』, 『에드먼드 버크와 토머스 페인의 위대한 논쟁』, 『십대의 재능은 어떻게 발달하고 어떻게 감소하는가』, 『마음의 혼란』, 『꿀벌의 숲속살이』 등이 있다.

출판사 리뷰

우리 인간이 영원히 풀 수 없는 딜레마, 불평등 그 폭력의 역사

1.
억만장자가 몇 명 있어야 세계 인구 절반의 순자산과 맞먹을까? 2015년에는 지구상 최고 부자 62명이 인류의 절반인 하위 35억 명의 개인 순자산을 합친 것만큼 소유했다. 전년도(2014년)에는 그 문턱을 통과하는 데 억만장자 85명이 필요했고, 아울러 그리 오래 전도 아닌 2010년에는 지구상 나머지 절반의 자산을 상쇄하려면 388명이 자기의 재원을 그러모아야 했다.

서두에 이런 내용을 언급하는 것은 평화가 오래 지속될수록 빈부의 격차는 커지며, 부와 소득이 더 집중된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이다. 물론 빈부 격차는 국가 간 차이도 있을 수 있고, 한 국가 내에서도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렇더라도 평화스러운 시간이 오래 지속될수록 빈부의 격차가 커진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런데 물질적 불평등은 우리 모두를 살아 있게 하는 데 소용되는 최소한도 이상의 자원에 대한 접근성을 필요로 한다. 잉여란 수만 년 전에도 이미 존재했으며, 그것을 불균등하게 나눌 채비가 된 인간들 역시 항상 있었다. 옛날 마지막 빙하기의 수렵·채집인은 시간과 재물을 할애해 어떤 개인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호화롭게 매장했다. 그러나 전적으로 새로운 차원에서 부를 창출한 것은 바로 식량 생산―농경과 목축―이었다.

불평등의 증가와 지속은 충적세(沖積世)를 규정하는 특징이 됐다. 작물 재배와 가축 사육으로 생산 자원을 축적하고 보존하는 일이 가능했다. 이런 자산에 대한 권리를 규정하기 위해 사회 규범이 발전했고, 여기에는 후손에게 그것을 전해주는 능력도 포함됐다. 이러한 조건 아래 소득과 부의 분배가 다양한 경험에 의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건강, 결혼 전략과 번식 성공, 선택적 소비와 투자, 대풍년, 메뚜기 떼와 우역(rinderpest, 牛疫: 소나 그 비슷한 동물에게 발생하는 전염병―옮긴이) 등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질 재산을 결정했다. 운과 노력의 산물은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장기적으로 불균등한 결과를 초래했다.

물론 이론상으로는 체제가 물질 자원의 배분과 노동 결실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고안한 개입을 통해 막 고개를 쳐들던 격차를 고르게 다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일부 전근대 사회가 실제로 시행했다고 알려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회적 진화는 일반적으로 현실에서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식량의 가축화는 또한 길들여진 인간을 만들었다. 고도로 경쟁적 조직 형태인 국가의 형성은 소득과 부에 대한 접근 기회를 편중시키는 가파른 권력 위계와 강제력을 구축했다. 정치적 불평등은 경제적 불평등을 강화하고 증폭시켰다.

대부분의 농경 시대에 국가는 다수를 희생시켜 소수의 배를 불렸다. 급료와 공공 서비스 혜택에서 오는 이익은 부패, 갈취, 약탈로 얻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많은 전근대 사회는 성장과 더불어 최대한 불평등해졌고, 낮은 1인당 생산량과 최소 성장이라는 조건 아래서 소수 엘리트들이 잉여를 전용하는 한계를 시험했다. 그리고 좀더 온건한 체제가 더 왕성하게 경제 발전을 촉진할 때―이는 부상 중이던 서구에서 가장 두드러졌다―높은 상태의 불평등은 끊임없이 지속됐다. 도시화, 상업화, 금융 부문의 혁신, 갈수록 세계적 규모를 갖추어 가는 무역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업화는 자본 소유자들에게 풍성한 수익을 안겨줬다. 노골적 권력 행사에서 비롯된 지대(rent, 地代)가 줄어들어 엘리트를 살찌우던 전통적 원천이 차단되자 좀더 안전한 재산권과 국가 공약이 세습적인 개인 자산의 보호를 강화했다. 경제 구조, 사회 규범 및 정치 제도가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소득과 부의 불평등은 여전히 높거나 아니면 새로운 성장 활로를 찾았다.

수천 년 동안 문명은 평화적인 평등화에 적합하지 않았다. 안정은 다양한 사회와 각기 다른 발전 수준을 망라해 경제적 불평등을 편애했다. 이는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처럼 파라오의 이집트에서도 그랬고,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에서도 그러했다. 기존 질서를 붕괴시키고 소득과 부의 분배를 압박해 빈부 격차를 좁히는 데는 격렬한 충격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평준화는 예외 없이 가장 강력한 충격으로 인해 발생했다. 네 가지 다른 종류의 격렬한 분출이 불평등의 벽을 허물어왔다. 요컨대 대중 동원 전쟁, 변혁적 혁명, 국가 실패 그리고 치명적 대유행병이 그것이다.

저자는 이것들을 ‘평준화의 네 기사(騎士)’라고 부른다. 이것들은 성경의 4인방처럼 “땅에서 평화를 거두”고 “칼과 굶주림과 흑사병과 들짐승으로 사람들을 죽”였다. 이것들은 때로는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때로는 서로 협력하며 현대인에게 흔히 묵시록이나 다름없어 보이는 결과물을 양산했다. 수억 명이 이것들의 뒤를 따라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사태가 잠잠해질 때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간극이 줄어들었다. 가끔은 극적일 정도였다.

2.

일본은 한때 지구상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 중 하나였다. 1938년 이 나라의 ‘1퍼센트’는 총 신고 소득의 19.9퍼센트를 벌어들였다. 그다음 7년 안에 그들의 점유율은 3분의 2가량 떨어져 6.4퍼센트까지 곤두박질쳤다. 이런 손실의 절반 이상은 최상층 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0.1퍼센트가 유발했다. 그들의 소득 점유율이 같은 시기 9.2퍼센트에서 5분의 4가량 떨어져 1.9퍼센트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런 소득 분배의 변동이 아무리 급작스럽고 심각했다 해도 엘리트의 부가 훨씬 더 극적으로 무너진 데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일본에서 가장 큰 1퍼센트 재산의 실질 신고 가격은 1936~1945년 90퍼센트, 1936~1949년 거의 97퍼센트 떨어졌다. 전체 재산 중 상위 0.1퍼센트는 훨씬 손해를 많이 봤다(각각 93퍼센트와 98퍼센트 이상). 이런 사실들은 국민소득 지니계수(0에 가까울수록 평등하고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가 1930년대 후반 0.45~0.65 어디쯤이었다가 1950년대 중반 0.3 근처로 떨어졌음을 통해서도 상류층의 소득 및 부 점유율의 위축이 심대했을 뿐 아니라 어마어마한 평준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듯 소득 및 부의 불평등이 완화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엄청난 살육과 파괴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경험은 정말 전형적인 경우였을까? 다른 대답이 필요 없다. 무조건 ‘그렇다’이다. “드라마 같은 30년간의 전쟁”이라고 샤를 드골이 말했듯이 1914~1945년은 모든 선진국에 의미 있고 가끔은 극적인 소득과 부의 분산을 낳았다. 즉 근대 대중 전쟁과 그 전쟁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재정적 요소 및 결과가 유례없이 강력한 평준화 수단으로 작용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프랑스는 양차 대전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데, 첫 번째 전쟁으로 자본금의 3분의 1이 파괴되고 국민 가계 소득의 자본 소득 비중은 3분의 1로 떨어졌으며 GDP 또한 동일한 비율로 추락했다. 그리고 1920년대 중반 무렵 최대 0.01퍼센트 재산의 평균 가치는 전쟁 이전 수준에 비해 4분의 3 이상 떨어졌다. 엘리트의 재산 붕괴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자본금의 3분의 2가 소멸했는데, 첫 번째 전쟁 때 수축률의 2배에 달했다. 프랑스 최대 재산의 4분의 1을 차지하던 국외 자산이 증발했으며, 상위 소득 점유율은 이 시기에 급격하게 떨어졌고, 이어진 전후 인플레이션은 단 몇 년 만에 공채의 가치와 전쟁 채무를 무너뜨렸다. 상위 0.01퍼센트의 재산 가치는 결과적으로 1914~1945년 90퍼센트 훨씬 넘게 떨어졌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중 국부의 14.9퍼센트를 잃고, 제2차 세계대전 때 다시 18.6퍼센트를 잃었다. 소득 상위 0.1퍼센트의 문턱은 제1차 세계대전 때는 평균 소득의 40배에서 20배로, 제2차 세계대전 때는 30배에서 20배로 떨어졌다. 세금 공제 후 상위 소득 점유율의 하락세는 한층 더 두드러졌다. 요컨대 1937~1949년 상위 1퍼센트는 거의 절반, 상위 0.01퍼센트는 3분의 2가 떨어졌다. 전체 사유 재산 중 가장 큰 1퍼센트의 비중은 70퍼센트에서 50퍼센트로 줄었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양차 대전과 그 사이 대공황을 거치며 소득 점유율은 세 차례에 걸쳐 하락했다. 전체적으로 1916~1945년 상위 1퍼센트는 총소득에서 그들이 차지한 비중의 40퍼센트를 잃었으며, 상위 0.01퍼센트의 소득 점유율은 같은 기간 동안 80퍼센트 하락했다. 또한 미국에서 대공황은 다른 주요 교전국에서보다 소득과 부의 격차를 평준화하는 데 전쟁 자체와 비교해 더 큰 역할을 했다.

따라서 우리는 피케티가 “20세기에 불평등을 줄인 것은 단연코 전쟁이라는 혼돈이었고, 그에 수반된 경제적·정치적 충격이었다. 더 큰 평등을 지향하는 점진적이면서도 합의에 기반을 둔 갈등 없는 발전이란 없었다. 20세기에 과거를 지우고 사회를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게끔 한 것은 바로 전쟁이지, 조화로운 민주주의나 경제적 합리성이 아니었다”고 한 주장은 타당하다. 그렇다면 교전국에서 상이한 결과를 경험한 나라는 없는가, 또 전쟁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나라들이 겪은 결과는 어떠한가? 결론은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국가는 그 정도가 훨씬 작지만, 마찬가지로 불평등이 완화됐음은 분명한다(211~277쪽 참조)

지금까지 양차 대전이 불평등을 어떻게, 어느 정도 완화시켰는지 살펴보았다. 물론 군사적 충돌은 오랫동안 인류 역사에 만연한 특징이었지만, 오직 특정 유형의 전쟁만이 그만큼 보편적인 또 다른 현상―소득과 부의 불평등한 분배―을 약화시켰다. 승자든 패자든 매한가지로 근대의 대중 동원 전쟁은 평준화의 잠재적 수단이었음이 드러났다. 전쟁과 관련한 시책이 전 사회에 스며들고, 자본 자산이 가치를 상실하고, 부자들로 하여금 공정한 몫을 지불하도록 할 때마다 전쟁은 비단 “인간을 죽이고 사물을 박살내기”만 했던 게 아니라 빈부 격차를 좁혔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이런 영향이 전쟁 중은 물론 그 이후에도 전시 정책의 지속으로 유지되면서 제대로 작동했다. 선진국 시민이 한 세대 혹은 그 이상 불평등 하락을 누린 것은 이런 전례 없는 전 지구적 충돌의 폭력성 덕분이었다. 유사한 물질적 격차의 압착은 제1차 세계대전 도중과 그 이후에도 일어났다. 그보다 과거에는 이 특별한 스타일의 전쟁 사례가 드문 데다 보통은 평준화와 연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범위가 좀더 국한된 전쟁은 역사를 통틀어 보편적 현상이었지만, 일관된 성과를 내놓지는 못했다. 약탈과 정복이라는 전통적인 전쟁은 보통 이긴 쪽 엘리트에게 혜택을 주고 불평등을 신장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나라 간 충돌이 불평등을 감소시킬 때가 있다면, 국가 내부의 충돌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우리는 최근 역사에서 내전이 확실한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며, 영향을 끼쳤다 하더라도 기존의 격차를 악화하는 쪽이었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권력을 쟁취하고 소득과 부의 분배를 고르게 하는 데 성공한 더욱 야심찬 운동은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일어났다. 큰 전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행동의 강도가 결정적 변수였다. 대부분의 전쟁이 평준화 성과를 내지 못한 데 반해, 대중적 군사 운동은 기존 질서를 뒤엎을 수 있었다. 반란 중에서 모든 개별 중소 도시와 개별 마을의 자원을 비슷한 정도로 속속들이 동원한 경우만이 급진적 평준화로 귀결됐다.

거듭 말하지만 관건은 폭력의 양 자체였다. 양차 대전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유혈 낭자한 전쟁이었듯 세상을 가장 평등하게 만든 혁명 역시 기록으로 남겨진 국내의 격변 중에서 가장 피비린내 사는 사건이었다. 평준화의 수단으로서 대규모 폭력이야말로 핵심 골자라는 것을 반란과 혁명에 관한 비교에서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가장 유의미한 증거는 역시 공산주의 혁명이 소득과 부의 극적 분산을 초래한 20세기에 일어났다. 또 프랑스 혁명과 기타 농민 봉기처럼 무력으로 국내 상황을 타개하려 한 전근대적 시도들을 고찰하는데(305~335쪽), 대개는 최근의 혁명만이 대다수 인구의 부와 소득 분배에 영향을 미칠 만큼 충분히 강력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극적인 불평등 감소가 뒤따른 곳은 러시아였다. 하지만 다른 사례들과 대조적으로 평준화는 전시의 개입과 전이 혹은 전후의 재정 붕괴가 아닌, 오히려 전쟁의 잔해로부터 탄생한 급진적 혁명의 대격변으로부터 초래됐다. 1917년의 대대적인 경기 침체는 이미 대토지 장악으로 귀결된 농민 봉기를 촉발했고, 파업 노동자들은 많은 공장의 통제권을 확립한 뒤 11월 6일과 7일 볼셰비키에 의한 수도 무장 탈환에서 극에 달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을 기습한 바로 다음 날인 11월 6일, 신설된 인민위원회는 레닌이 손수 작성한 ‘토지령’을 통과시켰다. 무엇보다 강제 재분배가 초대 의제였다. 뒤이은 법령은 모든 은행을 국유화하고, 공장을 노동자평의회 통제 아래 두고, 개인의 은행 계좌를 압수했다.

여러 급진적인 법령을 거친 끝에 모든 것을 국유화하고 징발했다. 그렇게 강압은 승리했다. 요컨대 1937년 소비에트 농업의 93퍼센트가 강제로 집단화하고, 개인 농장은 완전히 붕괴했으며, 민간 부문은 소규모 정원으로 줄어들었다. 이렇게 변신하기까지는 막대한 희생이 뒤따랐다. 전체 자본의 7분의 1이 증발했듯 가축의 값어치가 절반 넘게 사라졌다. 인명의 희생은 한층 더 충격적이었다. 1930년 2월 며칠 만에 ‘첫 번째 범주’의 쿨라크(부농) 6만 명이 체포된 뒤, 그해 말에는 70만 명, 그다음 해 말에는 180만 명에 이르렀다.

러시아에 대해서는 소비에트 시대의 자료 질이 고르지 못한 탓에 소득 불균형의 진화를 정밀하게 측정하기 어렵지만 제정 러시아 시대 말엽의 지니계수는 0.362로 추산되고, 소비에트 시대의 지니계수는 1967년에 0.229로 알려져 있듯이 제정 러시아 말기에 불평등이 훨씬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르기적 전제의 논리적 확장을 강제로 옹호하지 않게 된 순간, 모든 게 갑자기 무너져내렸다. 시장 소득 지니계수가 거의 1980년대 내내 0.26~0.27 근처를 맴돌던 러시아 연방에서는 소련이 몰락한 뒤 불평등이 폭등했다. 시장 소득 지니계수는 1990년에 0.28에서 5년 뒤 0.51로 거의 2배가 됐고, 그 후로는 0.44~0.52 사이를 오갔다.

이러한 강제적 평준화의 다른 끔직한 예는 마오의 중국과 캄보디아다(294~303쪽 참조). 물론 다른 예들도 포함하면 그 스펙트럼은 대단히 넓다. 하지만 그 근저의 기본 계획은 동일했다. 즉 사유 재산과 시장의 힘을 억압하고 그 과정에서 계급의 격차를 평준화함으로써 사회를 재구성하려 한 것이다. 본질적으로 이런 개입은 정치적이었고, 앞에서 논의한 근대의 세계대전이 유발한 것에 비결할 만한 충격을 드러냈다. 그러므로 변혁적 공산주의 혁명은 그 비극적 잔인성이란 측면에서 대중 동원 전쟁과 같은 반열에 놓일 수 있다.

전쟁과 혁명은 더 많은 폭력을 불러일으킬수록, 사회에 더 깊숙이 침투할수록 불평등을 더 많이 낮출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이런 전이가 체제 전체와 기존의 사회적·경제적 질서를 파괴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제까지 나온 증거를 바탕으로 삼을 경우 여느 때보다 훨씬 더 큰 대격변은 여느 때보다 강한 평준화로 귀결된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국가 실패와 체제 붕괴는 위계 서열을 뒤집고, 어떤 때는 극적인 규모로 물리적 불평등을 압착하기도 했는데, 대개 전근대 시기에 발생했다.

우선 용어 정의부터 시작하면,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는 주로 정치권력 행사와 관련한 과정, 즉 전통적으로 국가 실패라고 알려진 것이 자리하고 있다. 현대의 시각에서는 국가가 그 구성원에게 공공재를 공급할 수 없을 때 실패했다고 간주한다. 부정부패, 안보 결핍, 공공 서비스와 하부 구조의 와해 및 정통성 상실이 국가 실패의 표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더 먼 과거에는 적용됐을 리 없는 기준을 국가에다 갖다 붙인다. 전 근대의 시각에서는 전근대 정치 조직은 우선 나라 안팎의 도전자를 감시하고, 통치자의 핵심 협력자와 동료를 보호하며, 이런 과업을 수행하고 파워 엘리트를 부유하게 하는 데 필요한 세수를 빼내는 데 초점을 맞췄던 만큼 국가 실패는 이런 기본 목표를 성취할 능력마저 상실한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낫다. 피지배자와 영토에 대한 통치권 약화 및 군벌 같은 비정부 활동 세력의 국가 관료 대체가 전형적 결과이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정치권력이 지역 사회 차원으로까지 이양되는 경우도 있었다.

스펙트럼의 반대쪽 끝은 좀더 확장된 개념인 체제 붕괴가 있다. 체제 붕괴란 훨씬 포괄적이며 때로는 모든 것을 총망라하기도 하는 해체 과정으로서 “기존 사회의 복합성 수준이 상당 부분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으로 정의된다. 이는 경제부터 지적 분야에 이르기까지 인간 활동의 다양한 영역에 걸쳐 확대되면서 전형적으로 계층화, 사회 분화 및 노동 분업의 축소, 정보와 물자의 흐름 경감, 그리고 기념비적 건축·미술·문학·문해력(literacy)같은 문명의 특징에 대한 투자 하락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전개 과정은 중앙 집권적 통치 기능을 약화시키든지 송두리째 제거하는 정치적 분산을 동반하거나, 그런 분산과 상호 작용한다. 심한 경우 전체 인구는 수축하고, 정착지가 줄어들거나 버려지며, 경제 활동이 좀더 단순한 수준으로 퇴보한다.

국가 또는 문명 전체의 와해는 우리가 소득과 부의 격차를 평준화할 수 있는 동력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국가 실패는 소수에게 새로운 번영의 기회를 창출할 수 있지만 기존의 엘리트는 고통 받을 공산이 크고, 대국들은 작은 독립체로 쪼개지는 만큼 최상층으로 자원이 집중될 잠재성은 줄어든다. 중앙 집권화한 통체 체제의 해체는 공식적 위계와 엄밀한 의미의 엘리트 계급을 약화하며, 그에 상응하는 규모로 경영하기를 기대하는 정적들이 기존의 엘리트를 즉각적으로 대체하는 상황을 차단한다.

소말리아라는 동아프리카 국가는 일반적으로 가까운 과거에 있었던 가장 심각한 국가 붕괴의 사례로 여겨진다(374~379쪽 참조). 이외에 서로마 제국의 붕괴나 당나라 엘리트의 파멸 등의 사례 연구가 소개되어 있다. 국가와 문명의 붕괴는 평준화의 세계사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많은 곳을 피폐시킨 묵시록의 세 번째 기사에 해당한다. 즉 도처에서 생명을 파괴한 것만큼이나 불평등을 짓밟았다.

앞선 세 가지는 인간 대 인간의 폭력과 그것이 불평등에 미친 영향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불평등을 완화하는 마지막 동력인 네 번째 기사는 유행성 질병이다. 이는 다른 생물종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세 기사와 다르지만, 폭력적 관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오히려 인간 사회에 감행한 공격은 인간 스스로 초래한 거의 모든 재난보다도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

역사적으로 가장 파괴적인 결과를 불러온 질병은 중세 말, 근대 초기의 페스트이다. 14세기 중반(1326~1350년)에 중국 동부, 인도 남부, 중동 서부, 지중해 및 유럽의 설치류는 감염된 벼룩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대상 경로가 그 보급 통로 역할을 했다. 페스트는 1347년에 콘스탄티노플을 강타했고, 남부 유럽·서유럽·북아프리카를 거쳐 1349년에는 스칸디나비아까지 번졌다. 그러다 1350년 지중해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졌고, 그 이듬해에는 유럽 전역에서 당분간이긴 했지만 누그러졌다. 물론 정확하지는 않을지라도 얼토당토하지 않은 수치일 리는 없으므로 인용하면, 1351년 교황 클레멘스 6세 때 산출한 페스트로 인한 사망자가 2384만 명이라고 한다. 전체 인명 손실에 관한 현대의 추산은 25~45퍼센트의 범위에 있다. 파올로 말라니마의 연구에 의한 가장 최근의 재구성에 따르면, 유럽의 인구는 1300년 9400만 명에서 1400년 6800만 명으로 떨어졌다. 4분의 1이 넘는 하락이다. 인구 감소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가장 심했는데, 전염병 이전에 600만 명에 육박하던 인구의 거의 절반이 사라졌을 수 있으며, 18세기 초까지 예전 수주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국민의 최소 3분의 1이 사라졌다. 중동에 관해서는 믿을 만한 추정치를 얻기 힘들지만, 이집트와 시리아의 사망자는 특히 15세기 초까지의 손실을 고려하면 통상 비슷한 수준인 것으로 인용된다.

비단 페스트의 습격은 인적 손실만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장기적으로는 그것이 초래한 질병과 전이가 광범위한 사고방식과 제도에 발자취를 남겼다. 즉 교회의 권위는 약해졌고, 쾌락주의와 금욕주의가 나란히 유행했으며, 공포의 상속자를 남기지 않은 죽음 모두가 작용해 자선이 급증했다. 예술 양식마저도 영향을 받았고, 현역 의사들은 오랫동안 간직해온 이론을 재고할 수밖에 없었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경제 영역에서, 특히 노동 영역에서 발생했다. 흑사병은 몇 가지 요인에 의해 약 300년에 걸쳐 인구가 급증한 때 유럽에 번졌다. 약 1000년부터는 기술 혁신, 농업 방식과 수확의 개선 및 정치적 불안의 약화가 정착지, 생산성 및 인구의 팽창을 불러왔다. 도시의 크기도 수도 증가했다. 하지만 13세기 말에 들어서면 이 장기적인 번영이 자연스레 스러졌다. 중세 기후의 최적기가 막을 내려 생산성이 하락하고 수요가 공급을 앞지르면서 지천의 굶주린 입들이 식품 물가를 급속도로 끌어올렸다. 나날이 빈약해지던 식단에서 기초 곡물이 여느 때보다 우세한 주식이던 바로 그 시기에 경작지 발전의 시동이 꺼지고 목초지가 줄어들면서 단백질 공급을 격감시켰다. 인구 압박은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렸고, 그로 인해 실질 임금도 줄어들었다. 아무리 낙관하려 해도 생활 여건이 침체했다. 14세기 초에는 불안정한 날시 조건이 결국 파멸적 기근이로 이어진 수확량 감소를 초래했다. 인구 수준은 그 세기의 1/4분기 중에 하락했으나 최저 생계의 위기는 한 세대 더 지속됐고, 동물 유행병은 가축의 수를 대폭으로 감소시켰다. 이럴 때 흑사병이 찾아왔다. 흑사병은 물리적 인프라는 고스란히 내버려둔 채 인구수의 극적 하락을 불러왔다. 생산성 향상 덕분에 생산량은 인구가 줄어든 것보다는 덜 하락했고, 1인당 평균 생산량과 수입이 증가하는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토지가 노동력에 비해 한층 풍부해졌다. 지대 및 이자율은 절대적으로도, 임금과 비교했을 때도 모두 떨어졌다.

물론 이후에도 전염병은 수없이 인간들을 괴롭혔다. 우리가 관찰한 소득과 부의 불평등 완화 뒤에 숨은 동인은 조금도 특이하지 않다. 부자들의 자산을 몰수하고 남은 생존자들이 눈에 띄리만큼 잘살게 될 정도로 노동 인구가 줄어들기까지는 대규모 폭력과 인류의 고통이 필요했다. 사회 스펙트럼의 상위는 물론 하위에서 일어난 상이한 형태의 인구 감소는 소득과 부의 분배가 압착되는 것으로 수렴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불평등을 급격하게 축소하는 네 기사가 모두 폭력적 재난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거부할 수 없는 2개의 의문을 제시한다. 불평등을 평준화하는 다른 방법은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오늘날에는 그것이 존재하는가?

3.
불평등에 관해 사실 지금까지 우리는 상당히 암울한 상황에 봉착했다. 우리는 몇 번씩 되풀이해서 빈부 격차의 실질적 축소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었음을 살펴보았다. 다시 말해 평준화의 규모는 대부분 폭력의 규모가 좌지우지했다. 무력을 더욱 많이 투입할수록 평준화는 더 많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을까? 폭력은 언제나 평준화의 원천이었을까? 비슷한 성과를 배출한 적이 있는 평화로운 대안이 있었는가? 물론 잠재적인 후보들이 존재했고 또한 인간들의 노력이 있었다. 특히 토지 개혁, 경제 위기, 민주화 및 경제 발전 들 말이다.
토지 개혁은 일반적으로 농경지가 사유 재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마땅히 평준화 노력의 첫 번째 자리에 등극할 만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토지 분배는 폭력과 연관되지 않지만 항상 그러한 노력은 폭력이 개입되었고, 성공했다 하더라도 얼마 지속되지 못했다. 그리고 냉전의 종식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경제 위기도 결론적으로 말하면 평준화의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금융 위기는 역효과를 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 제도의 팽창은 평화적인 수단으로서 그럴싸한 후보일 수 있다. 하지만 고대 아테네식 민주주의의 진화가 대중 동원 전쟁과 얽혀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서구 국가들이 20세기 상반기의 특정 시점에서 선거권을 확대한 것은 중요하게도 양차 대전의 충격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만으로 민주화가 그런 국가에서 물질 자원 분배에 평준화 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비춰질 수 있겠지만, 이것이 어떤 과정이든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전쟁의 압력에 의해 촉발됐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 책 481쪽에 나와 있는 미국의 대법관 루이스 브랜다이스가 “우리는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채택할 수도 있고, 소수의 손에 막대한 부가 집중되게 할 수도 있지만, 둘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이 사실상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는 없음을 명확하게 한다.

이렇게 우리는 불평등에 관해서는 암울하게 모든 것을 끝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결국 20세기 후반 이후 지금까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킨 변화의 배후에 있는 추진 동력은 대압착 이후의 국가 간 관계 및 세계 안보의 진화를 반영한다. 요컨대 폭력적 충격이 글로벌 무역망을 파괴하고 사회적 결속과 정치적 화합을 북돋우고 공격적인 재정 정책을 지속시킨 반면, 폭력적 충격의 완화는 소득 분산과 부의 집중에 대한 견제를 약화시켰고, 다시 불평등은 급격한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종이책 회원 리뷰 (3건)

구매 번역이 별로라서 읽기 어려움
내용 평점1점   편집/디자인 평점1점 | x******x | 2022.08.31
책이 다루는 소재도 어려운데, 번역 때문에 도대체 제대로 내용 파악이 안 되네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흥미로운데, 사람을 집중할 수 없게 하는 문장들이 읽는 내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듭니다.
번역본을 읽은 후에 내용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이 주제에 정통한 사람이라서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는 전문가일 겁니다.
몇 백년 후에 이 책이 발견되어 우리 후손들이 ‘선조들의 한국어를 이렇게 사용했구나’라고 오해할까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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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역사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스타블로거 : 골드스타 S*********r | 2022.03.22

인간의 삶에는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요구들이 있어왔고 그런 요구들을 따라서 인간은 규칙과 질서 그리고 통용되는 가치들을 만들어왔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오늘날에도 마찬가지고) 법이라는 뭉떵거린 존재보다는 주먹이 가까운 존재였고, 이 주먹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들을 중점으로 하여 화폐나 재화, 재산 같은 가치들은 특정 인물, 집단에 의해서 통제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부는 곧 권력과 권력은 곧 부와 밀착되어, 오랜 세월 모습과 환경과는 다르게 고착되어 오랫동안 간절한 필요와 동시에 절대적인 불평등을 함께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반드시 필요하지만, 모두가 동일하게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독점과 지배의 수단이 된 경제적인 모든 수단들은 역사와 문화 인종 등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대를 뛰어넘어 항상 존재했던 불평등이며, 수탈과 약탈 침략의 역사도 곧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얻기 위한 인간의 탐욕의 역사이지자, 평등을 부수고 불평등을 얻기위한 억압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서구의 관점에서 이런 경제적인 불평등의 시작과 현대사회까지 이르는 불평등과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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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 구조, 깨뜨릴 수 있을까?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 나**기 | 2021.11.09

인류 불평등의 역사를 탐구한 ‘불평등의 역사’

 

지난 10월 민주노총은 각 지역 본부들을 중심으로 “불평등 타파”를 구호로 내걸고 집회를 열었다. 코로나19 감염확산 우려에도 불구하고 총파업대회를 진행했던 이유는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에게 불평등이 그만큼 절박한 문제라 생각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총파업대회를 통해 불평등이 문제인 이유와 평등이 왜 중요한지 시민들의 광범위한 공감을 얻어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는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을 받는 소위 ‘능력주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과정이 공정하다면 그 결과로 오는 불평등은 수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학력, 시험 등의 결과로 인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한국식 능력주의가 공고한 사회에서 불평등을 타파하자는 구호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혹은 노력이 부족한 패배자들의 외침으로 들릴 가능성이 높다. 한국 사회에서 불평등을 논할 때 불평등이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 먼저 세심하게 논의함으로써 공감을 얻어낼 필요가 있다.

 

불평등, 왜 문제지?

 

영국의 세계적 석학 리처드 윌킨슨은 <평등이 답이다>에서 한 사회의 신뢰 수준, 범죄율, 사회 계층 이동성 등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사회문제의 근본 원인이 불평등에 있음을 일깨웠다. 이후 <불평등 트라우마>에서 불평등이 인간의 심리와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깊이 탐구했다. 리처드 윌킨슨은 불평등한 경험과 환경이 사회에 속한 인간의 사고, 행동양식, 그리고 정신건강에까지 악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들을 보여주었다.

 

우리 나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서도 연구보고서(자산가격 변화가 경제적 불평등과 대외경제 변수에 미치는 영향 분석, 2019.12.30)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으며 이는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불평등이 인간과 그 구성원들이 속한 사회에 광범위한 문제를 일으키는 유해한 요소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속가능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불평등은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그러면 우리는 불평등을 ‘타파’할 수 있을까? 발터 샤이델이 쓴 <불평등의 역사>를 보면 한국을 포함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평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 같다는 전망을 하게 된다. 발터 샤이델은 원시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를 톺아보며 불평등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고, 불평등을 크게 허물었던 네 가지 요인을 제시했다.

 

불평등의 역사와 평준화의 네 기사

 

책에 따르면 기술(도구) 발전, 농경시대 토지와 가축의 소유, 다음세대로 부를 전달하게 한 제도, 정치적/군사적 권력, 제국의 형성, 현대 사회의 경제발전과 도시 성장 등으로 인해 불평등은 크게 증가해 왔다. 그러나 불평등 수준은 영속적으로 커지기만 하지는 않았다. 인류 역사의 몇몇 지점에서는 불평등이 크게 완화되는 ‘대압착’을 경험했다. 발터 샤이델은 이를 ‘평준화의 네 기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대중 동원 전쟁, 변혁적 혁명, 국가 실패, 치명적 대유행병. 이들 ‘평준화의 네 기사’는 발터 샤이델이 인류 역사에서 뽑아낸 평등화 메커니즘이다. 책을 읽기 전에 막연히 가지고 있었던 진보적 분배/복지정책, 노동 운동, 민주화 등이 인류에게 평등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는 매우 다른 결론이었다. 게다가 저자는 책의 시작부터 불평등 해소에 대해 회의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세계대전은 비교적 짧았고, 그 여파는 시간이 지나면서 잠잠해졌다. 최고 세율과 노조 조직률은 떨어지고, 세계화가 부상하고, 공산주의는 자취를 감추고, 냉전 시대는 끝나고,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은 희미해졌다. 이 모든 게 최근 불평등이 부활한 이유를 더 이해하기 쉽게끔 만든다. 전통적인 격렬한 평준화 동력은 현재 휴면기에 들었고, 가까운 미래에 귀환할 가능성은 낮다.”(28쪽)

 

발터 샤이델은 기술적/경제적 발전과 국가 형성의 상호작용으로 불평등이 증가했고 불평등 수준이 정점에 이르는 시점에서 이를 약화시키는 격렬한 충격이 필요했다는 자신의 핵심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책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가장 최근의 세계 대전에서부터 근대 이전에 있었던 대규모 전쟁, 그리고 혁명 중에서도 공산주의 혁명이 인류에게 일시적으로나마 평등을 가져다 주었다.

 

중국 당나라 귀족의 종말, 서로마 제국의 붕괴와 같은 국가 실패 혹은 체제의 붕괴 역시 불평등을 무너뜨리고 평준화를 가져왔다. 마지막으로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으로 인해 인류의 상당수가 죽음에 이름으로써 비로서 불평등의 정도가 완화되었다. 인류 역사에서 이처럼 잔혹한 네 가지 범주에 속하지 않는 평준화 동력은 없었던 것일까?

 

저자는 전쟁이나 혁명이 없는 상태에서 추진되었던 토지개혁, 채무 면제, 노예 해방 등도 불평등을 줄이는 데 그리 효과적이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심각한 충격을 가져왔던 경제 위기들도 잠시 나마 불평등을 주춤하게는 했지만 이내 회복되는 과정에서 평준화를 유지하지 못하고 불평등을 더욱 가속화했다. 또 한가지 놀라웠던 점은 민주화 조차 그 자체로 소득 불균형을 초래하는 경제 발전을 가져온다는 사실이었다. 

 

“역사는 우리에게 평준화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준다. 하나는 위기 시에 급진적인 정책적 개입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갖가지 공산주의 혁명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 대전과 대공황의 충격은 많은 부분을 이런 특정한 맥락에 빚진, 다른 상황 아래서라면 실현 가능하지 않았을 평준화 정책 방안을 만들어냈다. 두 번째 교훈은 한층 간단하다. 요컨대 정책 입안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거듭해서 국가 내 물질적 불균형의 압착을 이끌어낸 것은 인간의 통제 영역 밖에 있거나 당대에 실행 가능한 모든 정치적 의제의 범위를 한참 벗어나 있는 폭력적 힘이었다. 평준화의 가장 효과적인 메커니즘 중 어느 것도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565쪽)

 

불평등을 깨뜨릴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평등을 이룬다는 것은 유토피아 같은 이상적 환상인걸까? 계속되는 경제 발전, 경쟁 시장, 교육, 기술 발전으로 인한 자동화, 세계화, 노조의 영향력 약화 등 불평등을 증가시키는 요소들로 가득한 현 시대엔 불평등 타파의 희망은 내려놓는 것이 좋을까? 

 

역사에서 경험한 대압착과 같은 불평등 ‘타파’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평등의 해악을 인정하면서도 피흘리는 희생이 따라야 평등이 온다는 겁박 같은 주장에 움츠러들 필요는 없다. 대압착까지는 아니어도 불평등의 ‘수준’을 충분히 좁히는 노력을 해 나가야 한다. 책의 말미에 발터 샤이델은 “더 커다란 경제적 평등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 모두는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그것이 항상 비명과 울음 속에서 탄생했음을 기억하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협박처럼 들리는 이 말 중 ‘극소수의 예외’에서 대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대중 동원 전쟁의 결과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도시국가의 강력한 시민 계급 체제와 폴리스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재산 축적을 방지했던 고대 그리스의 사례가 있었고, 세계 대전 후 누진 세제 및 노조의 활성화로 인해 불평등의 회복 속도가 상당히 늦어졌던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사례들도 저자는 전쟁의 결과라고 해석했지만 만약 전쟁이 없었다면?

 

저자는 세제 개혁, 보편적 의료서비스, 독과점 해소 등 다양한 평화적 불평등 해소 방안들에 대해 정치적 실행 가능성이 매우 낮고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정치적 실행 의지가 강력하고 구성원들이 이 의지를 지지한다면 불평등의 수준이 좁혀지는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 시대는 불평등의 역사를 새로 쓰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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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불평등의 역사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YES마니아 : 골드 b*****c | 2019.01.15

불평등은 등장한 이래로 완벽하게 해소된적이 없다. 그리고 불평등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상황도 폭력이 동반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혁명, 전쟁, 국가 전복 등이 있지 않으면 불평등은 일시적으로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현대의 불평등은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일까? 그래도 유럽이라는 케이스가 조금 안심 시킬 수 있는 것일까? 평등은 정말 요원해 보인다. 그래서 혁명이 필요한데, 혁명도 유혈이 아니면 평등과 관련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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