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아웃]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한 사랑 (G. 방송인 우혜림)
2020년 09월 24일
[책이 뭐길래] 나의 고민과 책이 연결될 때 - 이정화 편
2020년 02월 27일
[연말 특집] 독자 50인이 말하는 ‘2018 올해의 책’ ②
2018년 12월 11일
어느 날 후배에게서 책 선물이 도착했다.
'나의 사적인 그림' 짧은 글과 그림으로 글과 그림이 조화롭게 여유있다.
여백이 주는 편안함과 그림이 주는 미학까지 담긴 책이었다.
가을에 도착한 책을 아직도 읽고 있다.
한꺼번에 읽어버리면 몇 시간이면 충분할 책이었지만,
왠지 한두쪽만 가을 낙엽처럼 야금야금 아껴서 갉아먹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루 일과 중 아무 페이지나 열어서 보여지는 글을 읽어내려가고 있다.
어쩌면 그 날의 내 기분을 상황을 알고서
누군가 친한 친구처럼 위로의 말로 칭찬의 웃음으로 다독여준다.
정말 아끼고 아끼고 읽어내려갔지만 이제 정말 얼마남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을 어쩌지 못해서 나또한 2명의 지인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
어쪄다보니 독서 선물 릴레이가 되어 버렸다.
오늘 병치료를 위해 휴직한 동료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
병상에 있는 그 분에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위로와 격려가 되는 책이길 바란다.
나를 내 주변의 지인들을 위해 좋은 책 써준 우지현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읽을 책을 고르다가 이책이 눈에 띄어 책장을 쭉 넘기는데 그림이 많이 실려있는 것이 맘에 들어 얼른 데리고 왔다.
그림속에 담겨있는 나와 당신의 이야기. 마음에 간직하는 한장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무언가가 있을때 작가는 그 사건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펼쳐놓았다. 그러면서 나도 덩달아 그림을 보면 뭔가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이 소환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공적인 성격을 띄어 그 그림은 공동체적 가치를 지향하며 사회적 의미를 갖고 한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무한의 세계로 확장되는것, 거기에 그림의 역할이 있다고 하였다.
작가개인의 가장 사적인 경험을 그림과 함께 고백함으로 가장 사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나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살다보면 힘들고 지치는 날도 있지만 묵묵히 자신의 일상을 꾸려가기를, 본인의 고유한 특성을 잃지 않기를, 스스로를 믿고 보살피고 사랑하고 긍정하기를, 그리하여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응원한다고 하였다. 그응원을 듬뿍 받고 싶다. 그리하여 각자의 사적인 범위를 견지하며 살아가고 서로가 서로의 사적인 영역을 존중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품어본다.
짧은 글과 그림 하나로 작가와 소통되는 느낌이 좋았다. 단 하나 아쉬웠던 점은 짧은 글마다 한두개의 의미를 알듯 말듯한 단어들을 자주 사용함으로 의식의 흐름이 자주 깨지는 것 같아 글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한정된 공간에 최대한의 그림을 보여주고 싶어한 작가에게 감사를 드린다. 화가들의 사적인 역사의 흔적을 통해 내마음도 많이 힐링되었음을 고백한다.
나의 사적인 그림
그림 속에 담겨 있는 나와 당신의 이야기
저: 우지현
출판사: 책이있는풍경 출판일: 2018년8월22일
근래에 그림에 대해서 무척이나 관심이 생긴 것 같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직접 미술관에 가서 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마침 근처에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이 있어 찾아가보았다. 주차를 하고 미술관에 들어가니 미리 예약을 하지 않았다면 관람이 어렵다는 관계자의 안내를 받았다. 신종 폐렴으로 인해서 모두 답답한 일상을 보내고 이전에 없던 생활의 제약을 받고 있다. 내 스스로는 그런 상황에서 비교적 직접적인 영향을 그다지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이 짧았던 것 같다. 아쉬움은 어쩔 수 없이 한동안 책으로 대신해야 될지 모르겠다.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 1권과 2권을 최근에 읽었다. 이전에도 서울시립대 김태진 교수의 책과 관련된 몇 권의 책들을 읽었다. 운 좋게도 모두 좋은 책들이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각기 다르게 접근한 저자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예술을 접하기에 엄격한 학문적 태도를 가질 필요는 업었다. 예술을 어떻게 해석하고, 즐기고, 느끼는 지는 각자의 몫이다. 문득 위대한 문학작품을 읽고 느꼈던 강렬함을 예술작품에서 느낄 수 있을까? 확실히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면, 작품에서 발산되는 강렬한 감정이 내 마음 속 깊숙하게 침잠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화가이고 작가인 우지현이 쓴 ‘나의 사적인 그림’은 그림을 소개하는 글이 아니다. 그림이 좋아서 찾아보고 공감한 한 사람이 있다. 일상의 삶을 살면서 그림을 떠올린다. 성찰의 순간도 후회의 순간도 완벽한 순간도 찾아온다. 그림이 가지는 강렬한 그 감정이 스스로를 더욱 민감하고 감상적으로 만드는 걸까? 아니면 본연에 가지고 있던 감수성이 그림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증폭되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감정을 그림이 말없이 이야기를 한다. 완벽하게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공감할 수 있다. 문득 책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지 못했던 작품을 접하며,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 느끼려고 노력한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 그림 너머에 그의 개인적 삶은 어떻게 작품에 투영되었을까? 가라나티 고진은 근대를 개인의 발견이라고 말했다. 이전의 삶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근대를 맞이한 개인은 이제까지 살았던 삶에서 그 밖의 테두리로 밀려났다. 개인은 어떻게 삶을 살아야 되는가? 문득,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 그러한 고뇌가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우리가 가지는 고민은 근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진보하지 못한 것일까? 여전히 동일한 질문들 속에서 대답을 찾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각자의 몫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돌아갈 곳을 잃었으니 우리 자신도 각자의 길을 찾아 방랑하는 것 같다. 후지타 쓰구하루의 ‘카페에서(1949)’에서 한 여자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책에서 소개된 르누아르의 ‘보트 파티에서의 오찬(1880-1881)’ 라몬 카사스의 ‘야외 인테리어(1892)’ 리카르드 베르그 ‘북유럽의 어느 저녁(1889~1900)’ 막스 리버만 ‘뮌헨의 맥주 정원(1884)’그리고 존 싱어 사전트의 ‘로지나, 카프리(1878)’이 생각난다. 그러나 잠시 어떤 사유의 시간도 필요할 듯.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터제 호수의 섬(1901)’프랭크 코번의 ‘비오는 밤(1917)’제임스 에벗 맥닐 휘슬러의 ‘검정색과 금색의 녹턴:떨어지는 불꽃(1875)’에서 그러한 침잠의 시간을 찾았을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쓴 저자와 같이 나 역시 나만의 사적인 그림을 떠올리고 싶다. 무척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