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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희 저
[연말 특집] 독자 50인이 말하는 ‘2018 올해의 책’ ②
2018년 12월 11일
처음 인상은 껌정드레스만큼이나 차가웠다. 그런데 말을 해보면 무슨 주제든 줄줄 나오고 (특히 세계사) 재미있다. 유머가 일상이 된 그런 느낌.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삐딱해도 괜찮아', '이 언니를 보라' 를 쓴 박신영 작가가 생각할 수록 마음이 아팠을 자신의 경험을 풀어놓으며 '제가 왜 참아야 하죠?'를 말한다.
평등해야 안전하다는 그녀의 글에 고개를 끄덕이며 한편으론 내가 다니는 회사에 이런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1년에 한번씩 성추행 관련 강의를 듣는다) 아직도 당당하게 터져나오는 일들을 접하며 답답하기도 하다. 여전히 떠들썩한 미투. 여러 분야에서 미투가 터져나왔는데, 영화판에서 일을 하다보니 영화배우와 관련된 미투를 특히 많이 접했는데 그 배우 분량만큼 영화를 새로 찍기도 하고 개봉을 보류한 사례도 봤다.
작가의 말
직장내 성폭력 사건 폭력 사건 피해를 입었을 뿐인데 제게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른 폭력 사건은 가해자가 비난받고 피해자는 보호받건만, 왜 '성'폭력 사건만은 유독 피해자가 비난받고 있을까요? 인간에 대한 성'폭력' 사건인데 '성'폭력 사건으로 여겨 피해 '여성'에게서 원인을 찾기 때문입니다.
같이 싸워서 세상을 바꾸어 볼 생각을 하는 당신을 위해 이 책을 씁니다. 우리는 더 이상 칸막이 속에 고립되어 혼자 우는 유령이 아니니까요.
미투, 나는 고발한다. 위드유, 당신과 함께 세상을 바꾸겠다.
솔직함과 당당함과 유머를 섞은 이야기에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왜 싸움닭이 될 수 밖에 없는지 알게 되면서 이젠 그 마음마저도 당당함으로 느껴진다. 그녀의 잘못은 없으니까. 이익, 누명, 도리, 이용당하기, 고소진행 당시의 문서들을 찾기 위해 검찰청 민원실에 사건기록을 연람하고 등사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자칭 명랑한 연쇄싸움마.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성차별과 강간 문화에 대한 이야기와 "가해자 같이 생긴 가해자는 없다며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저지르는 권력형 성폭력"으로 인한 그녀의 사례를 보며 왜 피해를 당한 자는 천재일 수 밖에 없는지 여자라면 한번쯤은 당해봤을 폭력 증언에 (나도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서 가슴을 움켜잡았던 넘을 기억한다. 그 미x넘이 웃고 그냥 갔기에 망정이지 생각할수록 겁이 덜컥 난다.) 그렇게 많냐며 놀라는 남자들을 이젠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내 남자는 여직원들에게 이상한 눈길도 이상한 말도 하지 말라고 단단히 이른다.
작년 10월29일에 반갑게 데려와서 형광펜으로 줄을 치며 읽고 11월17일 작가의 하트가 담긴 싸인을 받았는데 도저히 머리 속이 정리되지 않아 이제야 올린다. 지금도 이렇게 저렇게 정리하다 2시간이 훌쩍 흘렀다. 말조심 몸조심 하라고 말해주는게 전부일까 혼자 계속 되묻고 있다.
작년 2018년 1월 말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촉발된 미투운동은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서 반인격적인 성폭력이 자행되고 있다는 걸 여실히 드러냈다. 문학계, 영화계, 연극계, 정치계, 종교계, 체육계, 그리고 학교 현장과 수많은 일터에서 여성들이 성폭력과 성추행으로 병들거나 죽어가고 있다는 걸 객관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 후 우리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성차별과 성폭력을 없애자는 여성들의 집회와 시위에 대해 일각에서는 성 갈등을 부추긴다며 페미니즘에 반대하거나 '좋은 게 좋다'는 두루뭉술한 논리로 성폭력을 방관하려 한다. 또 한국의 페미니즘은 급진주의 페미니즘이라며 여성들이 살 만해져서 목소리가 커졌다고 비난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은 성폭력을 지금보다 '온건하게' 하자는 것일까? 아니면 성폭력을 지금보다 절반쯤으로만 줄이면 된다고 하는 걸까? 나는 그들의 주장을 이해할 수 없다. 반인권적 성폭력은 근절해야 하는 것이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성폭력이 계속되는 한 그로 인해 고통받는 피해자가 있고 성 갈등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성 갈등을 조장하고 부추기는 사람들은 성폭력을 계속 방관하며 타협하자고 하는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진심으로 성폭력을 옹호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들은 왜 그렇게 말할까? 혹시 그들은 성폭력이 일부 남성들의 주체할 수 없는 성욕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에 대한 대답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의 원인을 파헤쳐 가부장제 역사 이래로 강간문화가 널리 퍼져 있는 사실과 저자가 10여 년 전 직장내 성폭력으로 직장 상사를 고소해 만 2년 간 싸운 생생한 경험과 증언을 모두 이 책에 담았다.
1) 극소수의 변태, 괴물, 악마들이 참지 못해서 성범죄를 저지른다는 통념은 사실이 아니다.
2) 성범죄의 원인은 일상의 성차별적 구조에 있다. (28p)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성범죄는 인간 이하의 인성을 지닌 특이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것이 아님을 저자는 강조한다. 멀쩡한 남자들도 성폭력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를 비롯해 미투운동으로 드러난 남성들을 통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또 성폭력 가해자의 나이나 결혼 여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통념과도 다르다고 한다. 해마다 집계해 발표하는 검찰청 통계에 따르면 실제 강간 범죄는 다양한 연령대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또 아는 사람이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저지르는 권력형 성폭력이 많기 때문에 폭행이나 협박 없이 이루어지는 성폭력이 많은 점도 통념과 다르다.
그렇다면 다양한 연령대에 있는 멀쩡한 남성들이 왜 자신과 가까운 여성에게 성폭력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사건의 원인은 남성에게 권력과 지위가 쏠린 우리 사회의 성차별적 구조에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성폭력을 하는 남자는 폭력을 쓰는 인면수심의 악마라고 생각하기에 상식적인 수준의 도덕관념을 가진 보통 남자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성폭력인지도 모르고 하게" 된다는 거다. 또 "피해자는 평소 생각했던 성폭력범의 이미지와 달리 선량했던 가해자의 모습 때문에 자신이 당하는 피해를 인지하여 초기에 대처하기 어렵"다고 한다. 성폭력을 하고도 반성하지 않는 뻔뻔한 가해자와 성폭력을 당하고도 재빨리 신고하지 못하는 피해자가 왜 그리 많은지 알 수 있다.
1) 성별이 여성이라면 한국의 검사, 스웨덴의 차기 국왕도 성추행을 당한다.
2) 성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권력은 남성성 자체에 있다. (35p)
성폭력을 저지르는 남성은 자신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여성에게만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검사도 스웨덴의 차기 국왕도 여성이라면 성추행을 당할 수 있다는 점을 현실은 말한다. 그것은 "성 차별 사회에서는 남성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권력"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것이 젠더 권력이다. "젠더 권력은 선천적인 권력입니다. 직업적 성공처럼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얻는 권력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무 권력이 없어 보이는 '루저' 남성도 여성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남성성' 자체에 핵심적인 문제가 있다"고 한다.
그러면 성폭력과 여성혐오를 가능하게 하는 남성성은 어디에서 비롯하는 걸까?
이럴 때는 근대 이전 역사를 살펴보면 쉽게 답이 나옵니다. 고대 문명 발생지 중 중동 쪽으로 가봅시다. 고대로부터 여성은 가축이나 노예처럼 가부장의 재산이었습니다. 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가 기독교의 십계명에도 있습니다. 십계 중 '간음하지 말라'는 부부 사이의 정절 등 도덕률을 지키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성의 인권을 존중해서 성폭력하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성경의 [출애굽기]에 풀이된 부분을 보면,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지 못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간음하지 말라'는 말은 '이웃의 재산인 여자를 탐내어 이웃에게 손해를 끼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강간은 남성이 다른 남성에게 저지르는 재산상의 범죄입니다.
이웃의 재산에 손해를 입혔기에, 강간한 남자는 사형당합니다. 강간당한 기혼 여성도 사건 경위와 무관하게 죄 없어도 사형당합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강에 던져 죽이고, 성경의 무대가 되는 지역에서는 큰 강이 없으니까 돌을 던져 죽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딸을 강간한 아버지는 어떻게 될까요? 강간범은 사형이라지만, 딸 강간범은 사형당하지 않습니다. 함무라비 법에 의하면, 도시 성벽 바깥으로 추방하는 벌을 받습니다. 고대·중세사회에서 '추방형'은 중벌에 속합니다. ... 그래서 성추행범들이 딸 또래 나이 여성들을 상대로 성희롱이나 추행 등 성폭력을 행한 것이 발각나면 변명이라고 하는 말이 '딸처럼 여겨서 그랬다'인 것입니다. 벌을 가볍게 받고자 하는 말입니다. 아마 본인들도 모르고, DNA가 시키는 대로 말했을 겁니다. (99-100p)
한마디로 성폭력을 저지르는 남성들은 "근대 이전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몸만 21세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저자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 변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공감한다.
가정폭력을 생각해보십시오. 자녀 때리는 아버지를 말리면 뭐라고 합니까? '내 새끼 내 맘대로 못 때리냐?'라고 말합니다. 역사서를 보면, 고대 가부장에게는 가족 구성원에 대한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 즉 마음대로 죽이고 살릴 권리가 있었습니다. 아가멤논이 딸 이피게네이아를,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계백 장군이 가족을 죽여 대의를 추구하는 것이 기록에 남아 지금까지도 숭상받는 것을 보십시오. 가족 구성원의 의향은 묻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21세기인 지금도 어떤 남성은 죽도록 처자식을 때리면서도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104p)
1) '딸 같아서 그랬다'라는 변명은 딸을 사유재산으로 여기던 역사 문화적 DNA를 보여주는 말이다.
2) 미투는 권력과 자원을 독점한 남성이 자신보다 어리고 약한 사람을 착취하는 것을 고발하고 저항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108p)
2부에는 저자가 겪은 성폭력 사건을 담았다. 피해자인 네 명의 동료 여성들과 함께 고소해 승소하기까지의 과정이 눈앞에서 펼쳐지듯 생생해 긴장하며 읽었다. 앞에서 말했듯 성폭력을 저지른 직장 상사는 괴물이 아니라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친절한 40대 가장이다. 또 그가 처음엔 순순히 용인하고 사과하다가 자기 부인이 알게 되자 뻔뻔하게 돌변하는 것도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피해자들이 먼저 유혹했다며 꽃뱀으로 몰고가는 것도 똑같아 성범죄자들끼리 말을 맞춘 듯하다. 연쇄성폭력범으로 밝혀진 그는 소송으로 가 악질적으로 변해 피해자들을 몹시 괴롭히기도 했다.
형사소송과 민사소송에 관련된 법조항과 판결 내용이 적힌 공문 서식이 조금 딱딱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참고하기에 유용하리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경찰과 검찰에 나가 조사받고 1,2심 재판으로 가 승소하기까지의 과정 동안 심리적 컨트롤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뒤에 실린 질문과 응답을 보면 알 수 있듯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이나 지인은 처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데 아는 게 힘이라는 말은 페미니즘에도 통한다. 부디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지난해에 한국 사회를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게 만든 미투 운동(Time's Up Movement)은 현재까지도 계속 진행 중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의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부조리한 성범죄와 성차별의 민낯을 목격하게 되었고, 마치 우리 사회 전체가 성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만신창이라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피해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보도를 통해 페미니즘도 더불어 주목받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에게 페미니즘은 대단히 불편한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대학교 재학 시절에 처음 접했던 페미니즘의 과격한 실태가 나에게 불필요한 부정적 선입견을 주입한 것이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 당시 나에게는 사회 전체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선과 태도만을 일관하는 페미니즘(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런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말 그대로 이해할 수 없는 ‘주의’였다. 그리고 이런 과격한 형태의 페미니즘은 지금도 여러 형태로 계속되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미투 운동으로 촉발된 일련의 사건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나의 시각에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는데, 그런 변화에 대단히 결정적인 계기가 된 책이 『제가 왜 참아야 하죠?』이다. 이 책은 내가 블로그 활동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게 된 분이 쓴 작품으로서, 자신이 직장생활에서 직접 겪은 끔찍한 성폭행 사건과 그 사건의 법적 처리 과정을 정리하여 소개하고, 현재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투 운동과 관련된 여러 가지 단상들을 써내려가는 짧은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크게 느낀 점은, 페미니즘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즉,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페미니즘과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페미니즘의 구분이 그것이다. 물론 상아탑에서 학자들이 학문의 영역에서 펼치는 페미니즘이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게 되는 페미니즘의 이론적 토대가 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이론과 실제가 꼭 일치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어서 우리의 주변에서 목격되는 페미니즘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억압받거나 약자의 처지에 있는 여성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자신의 생존을 담보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페미니즘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그들의 마지막 생존 전략인 셈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두 페미니즘들에 대한 구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서 페미니즘(꼭 달리 부를 명칭이 없어서 그렇게 밖에 부를 수 없는 명칭)을 최후의 생존 전략으로 붙들고 있는 많은 여성이 마치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불필요한 반항 세력 정도로 치부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기에는 자신이 지금껏 누려온 기득권을 마치 공기처럼 당연하게 생각하다가 다른 누군가와 공유하게 된다는(또는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기게 된다는) 사실을 문뜩 깨닫고 두려움을 느끼며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일부(또는 대다수) 남성들의 비합리적인 동조도 한몫한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현실을 ‘천재로 길러지는 여자’로 표현한다.
이 표현은 대단히 역설적이다. 최근에 안희정의 재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회(그리고 가해자)는 피해자들을 이중의 잣대로 억압한다. 우선 피해자에게 자신의 보호를 위해서 잊고 싶은 악몽을 뚜렷이 기억하도록 강요함으로써,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자신이 겪은 피해가 사실상 피해가 아닌 자신의 강박증에 불과한 것이라는 최면을 강요한다. 다음으로 피해자가 자신이 겪은 부조리한 사건을 누구보다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경우라면, 그 기억의 진정성 여부에 의혹을 제기하면서 그런 기억의 정확성을 조롱조로 칭찬함으로써 피해자의 진술을 간접적으로 부정하여 현실을 외면하려고 시도한다.
어느 경우든 간에, 여성이 천재가 되어야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여성이 정말 천재가 되면 그 여성이 천재라는 이유로 비난을 가하고 폄하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이 속에서 여성은 앞서 말한 것처럼 페미니즘을 자기 생존의 마지막 보루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다시 부정되고 비판받는다. 악순환의 고리는 끝없이 계속된다. 한국 사회가 성숙한 사회가 되려면,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인정하는 동시에 현실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차별도 인정하고 시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그런 노력을 시작하도록 촉구하는 작은 목소리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