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보고는 어떤 내용일지 유추가 안되었는데 뜯어보니 인문학과 과학을 크로스해서 살펴보는 내용이더라구요. 흔히 알고있던 이야기들을 과학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점이 흥미롭고 재미있었어요. 평소에는 생각해보지 않고 가볍게 지나갔던 부분 속에 과학적 쟁점이 들어있다는 사실이 신기했어요. 지식 책이라고 느껴지지 않고 읽어나갈 수 있어 좋았습니다.
서가명강 시리즈로 출간된 책인데 앞서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지만 강연내용을 엮어낸 책이라 주제만 맞다면 흥미롭게 읽어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크로스 사이언스라는 제목에 걸맞게 다양한 주제의 영화와 접목시켜 과학적으로 접근, 생각해볼 꺼리를 던져주고 있는 교양서라고 보면 될것 같다. 특히 이 교수님은 오래전에 EBS특강때 뵈었던 분이라서 그런지 괜히 더 친근감있게 느껴지더라는. 그러고보면 서로 알고 모르고를 떠나 한번이라도 실제로 본적있는 명사라면 더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것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려나. 옥자, 가타카, 엑스마키나 같은 영화를 아직도 못보고 있었다는걸 새삼 깨달았고 안드로이드와 인간과의 관계를 배경으로한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이라는 게임을 재밌게 했었던 기억, 최근 새로운 시즌이 공개된 넷플릭스의 블랙미러 시리즈를 이번주말에 꼭 살펴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들었다.
다양한 문화를 과학적인 시선으로 분석하는 책입니다. 서가명강 시리즈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배울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홍성욱 저자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철학, 세계, 사고관을 알 수 있고 또 이를 통해 제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견해를 곱씹어 볼 수 있었어요. 도서를 읽고 나서 좋은 문구나 구절을 곱씹고, 인상 깊은 부분을 메모하는 것을 즐겨하는데 그럴 거리가 많은 좋은 책이었습니다.
과학은 현대사회의 종교다. 과학만큼 현 시대정신을 지배하는 것은 없다. 과학적 방법론은 본래의 범위를 벗어나 사회과학, 인문학까지 영향을 미쳤다. 행정, 문화, 교육 등 전반적인 문명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과학이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는 데는 자기 수정 기능이 큰 힘을 발휘했다. 우리가 잊고 살지만, 과학 이론은 진리가 아니다. 이론은 가설에 불과하고 반증을 통해 언제든지 뒤집어 질 수 있다. 흔히 말하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생긴다. 이러한 가변성이야 말로 과학의 큰 장점이다. 이것이 가능 한 이유는 과학의 대상이 객관적인 자연 현상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특정 조건을 반복해서 실험할 수 있다. 반면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인간사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특정 조건을 만들 수 없고, 반복해서 실험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자기 수정 기능에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방법론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도입되었다. 경제학의 경우에는 합리적인 인간을, 역사학에서는 역사 진보의 법칙과 같은 것들을 가정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은 반복되고 자기수정을 할 수 없기에 왜곡을 낳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과학의 대상과 달리 객관적인 현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이론들은 현실과 자주 괴리된다. 과학적 방법론의 무리한 적용이 다양한 폐해를 야기한다. 경제학의 경우에는 대공황과 같은 경제 불황 등이 대표적이다.
<크로스 사이언스>는 다르다. 과학적 방법론을 무리하게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사고방법, 관점을 적용한다.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통해 기존의 학문들을 색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과학자가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통해 대중문화를 바라본 이야기’ 정도면 책의 소개로 아주 적합할 듯하다. <프랑켄슈타인>, <유토피아>, <1984>. <로보캅>, <블레이드러너> 등 우리에게 익숙한 문학과 영화로 과학적 이야기를 풀어 간다. 어렵지 않고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과학에 대해 가진 오해와 주의할 점을 알려준다.
과학이 아무리 객관적 현실을 분석하고, 합리적이라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과학자 역시 인간으로서 다른 일반사람과 같은 한계를 지닌다. “너무나 당연하게, 그래서 과학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결과물이다.(p.90)” 그렇기에 과학자가 누구냐에 따라 파괴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차별을 낳(p.93)”고 “차별을 정당화(p.105)”한다. 그 결과 우생학은 대량 학살의 근거가 되었고,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 해주기도 했다. 이러한 흔적은 아직도 세계 곳곳에 남아 있다. 그리고 “지금도 과학의 이름으로 우등과 열등을 나누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p.129)”
종교는 우리에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말한다. 과학이 새로운 종교가 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종교와 달리 과학은 끝없는 검증과의 싸움이다. 지속적인 자기 수정의 과정이다. 불확실성의 시대 과학은 새로운 종교가 된 이유는, 불확실한 만큼 스스로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수정해가기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검증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한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이론, 세계관을 계속해서 검증하고 잘못되었다면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과학자가 인문학을 통해 우리에게 얘기하고 싶은 마음은 그것이 아닐까.
---------------------------------------------------------------------------
내가 읽는 이 전기의 원형을 만든 작가는 누구인가? 왜 그 작가는 위인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와 내러티브를 만들어냈는가? 왜 이런 내러티브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는가? 이런 이야기에서 왜곡되거나 과장된 부분은 없는가? 여기에서 사실과 달리 작가에 의해 삽입된 부분, 아니면 빠진 부분은 없는가? 등등.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면서 전기를 읽는 작업은 인문학적인 해석의 힘을 이용해서 중층적으로 전기를 읽는 독법이다. p.89
이것 한 가지만은 기억하자. 과학자는 남성이건 여성이건, 머리(영혼, 이성)만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몸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과학자 또한 주변의 여러 사람과 다양한 관계를 맺는데, 이 중에는 자신의 연구를 돕고 촉진하는 것도, 연구를 방해하는 것도 있다. 과학자는 이를 이용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를 헤쳐 나가면서 연구를 수행한다. / 보통 여성들이 결혼, 출산, 육아에 시간을 뺏긴다면,(p.89) 이는 여성 과학자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면서 부딪치는 다양한 욕망들과 잘 협상하고 타협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가는데, 이는 (남성이건 여성이건) 과학자도 마찬가지다. 다만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은 과학자에게는 좋은 연구를 하고 싶은 욕망이 매우 크고, 가끔은 그것이 다른 욕망을 압도할 수 있다는 점 정도이다. p.90
과학자는 이성과 감정, 그리고 욕망을 가진 인간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그래서 과학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결과물이다. p.90
과학은 인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과학은 인간을 분류해서 이해하지만, 동시에 이런 분류는 차별을 낳기도 한다. p.93
그렇지만 근대 이후 우리의 역사는 차이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차이가 차별을 낳지 못하게(p.104) 잘 감시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과학의 이름으로 차이를 위계적으로 고정시키려는 시도들에 대해 경계의 시선을 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차이에 대한 소위 ‘과학적인’ 근거를 이용해서 자신의 차별을 정당화해왔기 때문이다. p.105
드 라 샹베르는 ‘자연적’인 것을 찾는 과정에서 동물을 도덕적 서열 중 높은 곳에 있는 존재로 격상시키고 이들을 동물의 놀라운 덕목을 가진 남성의 반열에 놓았지만, 반면 여성은 동물보다도 못한 존재로 격하시켰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가 벌어지면서 남녀 차이가 줄어들었듯이, 동물과 남성의 차이가 줄어들면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벌어졌던 것이다. p.121
지금도 과학의 이름으로 우등과 열등을 나누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p.129
사이비과학은 이런 마음을 비집고 자란난다. 누군가 과학의 이름으로 내가, 한민족이, 한국 사람이 과학적으로 못났다고 한다면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학이 나를, 한민족을, 한국 사람을 잘났다고 하면 이런 얘기는 우리의 허영심을 살살 간지럽힌다. (p.129)
... 새로운 차별은 항상 더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고, 더 은밀하게 우리의 허영심을 비집고 들어오기에 그렇다. p.130
디스토피아에서 허용되지 않는 것들을 가만히 보면, 우리가 디스토피아적 상황을 극복한다든지 혹은 이런 상황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하고, 지금껏 어떤 길을 밟아서 여기에 왔는지, 즉 우리의 과거 역사를 정확(p.207)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누군지, 내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내가 속한 세상이 미래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p.208
우리에겐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나와 내가 속한 사회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그중 실천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실천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p.208
전기의 도입 초기에 문학작품들은 전차, 전등, 활동사진 같은 전기 문물을 새롭고 신기하고 계몽적인 것으로 그렸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것들은 식민지적 일상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적으로 바뀌어갔다. 예컨대 초기에 전등은 다 밝은 것으로 그려졌지만, 1920~30년대가 되면 희미한 전등, 쓸쓸한 느낌을 주는 전등, 신경증을 유발하는 전등이 등장하게 되며, 일부 작품에서는 전등이 일제 통치의 결과물이거나 빈부격차를 상징하는 전형이 되었다. p.345
인간은 사실만의 세상에서 살아가지 않듯이, 가치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지도 않다. p.367
과학은 예술처럼 새로운 개념, 존재를 만드는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p.381
과학도 예술도 인간이 하는 창의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창의적인 업적은 많은 지식을 습득(p.382)하고 이를 토대로 다른 사람이 하지 못했던 새롭고 혁신적인 것을 만들어냄으로써 얻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이성과 상상력이 합해져야 한다. p.283
우리는 원자핵 속에 들어 있는 엄청난 힘을 이용하고 있지만, 그 힘을 까딱 사용하면 절멸될 수도 있다. 다른 행성에서 비슷한 생물체가 우리와 같은 과정을 겪었고 과학을 발전시켜서 원자 에너지를 사용하다가 핵전쟁이 발발해서 절멸되었다면, 우주에 왜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고등 생명체가 없는지 이해할 수 있다. 왜 인간이 수십 년 동안 메시지를 보내도 왜 답이 없는지 말이다. 우리의 미래는 우주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성찰하는가에 달려 있다. p.394
문화는 우리가 사고하고 소통하며, 그 결과들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매트릭스와 비슷한 것이다. p.396
서가명강 시리즈는 두번째로 읽는데 이번에도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서울대에서 하는 교양강좌를 일반인들도 누릴 수 있도록 책으로 펴낸 시리즈라고 알고 있는데 서울대 학생들이 부러워지는군요 ㅎㅎ 읽다보니 어? 이거 시험에 나올법한데..? 싶은 것도 있고, 아무래도 수업내용이다보니 학생들의 이해를 돕도록 여러 예시를 드는 게 참 좋았습니다. 특히 인간과 과학의 크로스 챕터가 흥미로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