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의 산문집 「그늘에 대하여」를 읽기 전까지 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에 대해 알지 못했다. <옮긴이의 글>을 통해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은 <옮긴이의 글>에서 퍼온 글이다.
또 다른 일본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도 번역했던 사이덴스티커(가와바타 야스나리와 14년 동안 교유하며 그의 대표작 <설국(雪國)>과 <천우학(千羽鶴)>을 영어로 번역, 서구에 소개한 미국인)는 다니자키가 1968년까지 살아 있었다면 그에게 노벨문학상이 갔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다니자키의 작품을 빼버린다면 일본의 근대문학은 ‘꽃 없는 정원’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다니자키는 1958년 펄 벅에 의해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된 이래 1965년 사망할 때까지 매년 후보에 올랐다. (207p)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소설가로 이름을 날린 작가이지만, 이 책 「그늘에 대하여」는 소설집이 아니라 ‘산문집’이다. ‘수필집’이라고 하지 않고 ‘산문집’이라고 한 것은 수록된 작품들 각각의 분량도 만만치 않고, 분량에 비례하여 글의 내용도 꽤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산문집 「그늘에 대하여」에는 <그늘에 대하여>, <게으름을 말한다>, <연애와 색정>, <손님을 싫어함>, <여행>, <뒷간>, 이렇게 모두 여섯 편의 산문이 실려 있다.
여섯 편의 산문의 분량을 살펴보면, <그늘에 대하여> 62쪽, <게으름을 말한다> 24쪽, <연애와 색정> 50쪽, <손님을 싫어함> 16쪽, <여행> 34쪽, <뒷간> 11쪽으로, <그늘에 대하여>와 <연애와 색정>, <여행> 같은 경우에는 중단편 소설에 해당하는 분량이라 할 수 있다.
여섯 편의 산문 중 앞에 수록된 세 작품 <그늘에 대하여>, <게으름을 말한다>, <연애와 색정>은 소재에 대한 주관적 감상 토로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은 산문이다. 서양 문화와의 대비를 통해 일본 문화와 일본인의 삶과 의식에 대해 말하면서, 당시 세태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보여주고 있다.
표제작 <그늘에 대하여>는 그늘을 예찬하면서 그것을 잃어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산문이다. 작가는 글의 말미에서 이 글을 쓴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내가 이런 글을 쓴 취지는, 몇몇 방면, 예를 들면 문학 예술 등에 그 손실을 보전할 길이 남아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서였다. 나는 우리가 이미 잃어가고 있는 그늘의 세계를 오로지 문학의 영역에서라도 되불러 보고 싶다. (67p)
그러면, 이 글을 통해 작가가 사라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그늘’이란 무엇(혹은 어떤 것)인가
옮긴이는, <그늘에 대하여>의 원제가 ‘음예예찬(陰?禮讚)’이라고 하면서, “‘음예’는 그늘인 듯한데 그늘도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이다. 그러나 글을 옮기면서 일단 ‘그늘’이라 하기로 한다(7p).”라고 말한다.
내가 보기에, ‘음예’는 ‘현대식 조명’이나 ‘밝음’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보인다. 아래 인용문을 보자.
아무래도 요즈음의 우리는 전등에 마비되고, 과잉된 조명에서 빚어지는 불편에 대해서는 의외로 무감각해져 있는 것 같다. 달 구경의 경우는 아무래도 좋지만, 대합실, 음식점, 여관, 호텔 따위가 대체로 전등을 지나치게 낭비하고 있다. (59p)
이 글에서 작자가 다루는 내용은, 건축(장지문, 조명, 난방, 변기 등), 칠기, 요리 등을 망라하는데, ‘그늘’은 언급하는 대상이 ‘어스름한 어둠의 광선에 둘러싸여, 구별을 몽롱하게 한 상태에 놓이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늘’을 다른 단어로 바꾼다면 ‘희읍스름함’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작자는 ‘그늘’에서 보는 것(칠기, 여인 등)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있다.
우리들은 문지도리 뒤나 꽃병 주위나 선반 아래 등을 메우고 있는 어둠을 바라보고,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그늘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의 공기만이 착 가라앉아 있는 듯한, 영겁 불변의 고요함이 그 어둠을 차지하고 있는 듯한 감명을 받는다. 서양인이 말하는 ‘동양의 신비’라는 것은 이처럼 어두움이 갖는 어쩐지 으스스한 고요함을 가리키리라. (36~7p)
<연애와 색정>은 독자의 편견을 깨뜨리고 있는 산문이다. 오늘날 일본은 하면 섹스 관련 상업이 발달한, ‘성(性)진국’이라 불릴 만큼 성적으로 개방된(나쁘게 말하면 문란한) 나라라는 이미지로 떠오른다. 그러나, 이 글에 따르면 옛날에는 오늘날과 완전히 달랐던 것 같다. 작자는 일본에 대해 “연애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비천하게 보고, 게다가 색욕에 담백한 민족”(123p)이라고 말한다.
일본 예술에 대해서도 “전통은 연애의 예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내심은 크게 감동도 하고, 살짝 그런 작품을 향락한 것도 사실이지만,―겉은 되도록 시치미를 뗐던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조심스러움이며, 누구랄 것 없이 사회적 예의가 되었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서양과 대조가 된다고 한 견해는 탁견으로 보인다.
<게으름을 말한다>는 ‘게으름’을 예찬하는 글이다. 작자가 말하는 ‘게으름’은 “‘나른한’ 생활 가운데 나름대로 별천지가 있음을 알아, 거기에 안주하여 그것을 그리워하고 즐기고, 어떤 경우에는 그런 경지를 보거나 얻을 수 있는 경향”을 의미한다. 작자는 이런 경향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서양인과 구별되는 동양인의 경향이라고 본다.
서양인은 단적으로 ‘게으름뱅이’도 아니려니와 ‘게으름 피우기’도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체질, 표정, 피부색, 옷차림, 생활양식 등 모든 조건으로부터 그렇게 되었기에, 가끔 뭔가 사정 때문에 불결이나 규율을 어기는 일을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일은 있을지라도, 동양인이 게으름 가운데 갖는 어떤 편안한 별세계를 타개한 듯한 마음가짐을 꿈에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 (76~7p)
이러한 작자의 견해는 수긍되는 측면도 있지만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도 없지 않았다. 가령 다음과 같은 내용은 동양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고 한다면 적용되는지 몰라도 한국인으로서는 수긍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노인의 이가 새하얗게 가지런한 것은 적어도 동양인의 용모와는 조화가 되지 않는다. 틀니를 하더라도 가급적 자연에 가깝게 해야만 하는데, 나이 들었다는 핑계로 너무 젊고 아름답게 하는 것은, ‘사십 넘어 두꺼운 화자’, 정말로 불쾌한 것이다.” (83p)
이상 세 작품과 달리 <손님을 싫어함>, <여행>, <뒷간>은 개인적 성향이 강한 글이었다.
<여행>의 중간쯤에서 공중도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일본인에 대한 작자의 지적이 나오는데, 공중도덕을 잘 지키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남의 이야기로만 읽히지는 않았다.
이 책에 수록된 산문들은 기본적으로 작자의 개인 성향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밝음보다는 그늘을 좋아하고, 떠들썩함보다는 고요함을 좋아하며, 편리함보다는 불편함 속의 은근함을 좋아하는 등의 성향. 그러나 개인적 성향 고백을 넘어서서 서양과의 비교를 통한 일본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근대 일본의 문화와 일본인의 삶과 사고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정말 훌륭한 산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읽어볼 책 리스트에 올려둘 책이다. 그리고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도 읽어보고 싶게 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최순우 선생이 자꾸 떠올랐다.
최순우 선생의 산문집 '나는 내것이 아름답다'에서 읽었던 달빛 노니는 창살 이야기가 오버랩되었다.
최순우 선생이 길이 잘 들고 은은한 밀장판과 장지문에 비치는 달빛 등 우리 고유의 것을 예찬했듯이 글쓴이는 일본 고유의 그늘에 대하여 예찬하고 있다.
번역자는 '그늘에 대하여'의 원제는 '음예예찬(陰翳禮讚)'으로 글의 서두에 '음예는 그늘인 듯한데 그늘도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이다. 그러나 글을 옮기면서 '그늘'이라 하기로 한다.' 이렇게 제목의 뜻을 설명하고 있다.
18세기 후반에 태어나 20세기 초반부터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며 일본 문단의 최고봉을 걸어간 다니자키는 일본적인 전통미에 경도된 대표적 작가로서 나쓰메 소세키와 동시대인이다.
다다미 방의 어두운 채광과 깊은 그늘, 싸늘한 바깥 변소의 풍취, 세월의 때가 묻어 적당히 녹슨 은그릇, 옻칠한 짙은 칠기 주발 속에 담긴 내용물을 구별할 수 없는 국물의 선미(仙味)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시선은 온통 그늘에 집중되어 있다.
반짝반짝 빛나고 드러내는 걸 좋아하는 서양의 미감과 달리 '사이'를 중시하고 드러나지 않고 가리워진 은근한 아취(雅趣)를 즐기는 동양의 미감은 일본과 한국이 서로 통하는 부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아는 분의 홍천 시골 집에서 겨울 눈이 발목까지 푹푹 쌓이던 날, 마당의 눈을 헤치고 달빛과 싸락눈이 나무의 틈 사이로 새어들어오던 재래식 변소에서 느꼈던 그런 분위기가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말하는 풍취일 터이다.
어둡게 가라앉은 광선의 아름다움과 여자들 사이에서 이를 검게 칠하는 화장법이 유행했던 것도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그런데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가 서양인과 일본인의 피부색을 대비하여 묘사한 부분은 솔직히 좀 꺼림찍했다.
맑고 투명한 서양인의 깨끗한 피부 속에 동양인이 섞여 있을 때를 불순물, 오물, 또는 얼룩이 진것 같다고 표현한 부분이다. 그는 한술 더 떠 백색 인종이 유색인종을 배척한 심리가 이해된다고도 썼다. 서양의 발달한 문물이 일본으로 넘쳐 들어오고, 일본적인 것이 사라져가는 안타까움을 역설하면서도 그 또한 유색인종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던 것일까.
이 글을 다 읽고 나니 나는 그에게 '일본의 최순우'란 별명을 붙여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