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노 저
임솔아 저
애나 렘키 저/김두완 역
로랑스 드빌레르 저/이주영 역
천선란 저
백온유 저
여기 『조선왕조실록』의 행간에 숨겨진 비운의 여인이 있다. 근엄한 남성 중심의 나라 조선에서 지아비의 사랑을 받지 못해 가슴 졸이며 살던, 아이 하나라도 낳으면 천군만마를 얻은 듯 행복하게 여생을 보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여인과의 사랑이 잘못된 선택인 줄 알면서도 뿌리칠 수 없었던…… 문종의 아내 봉빈이 바로 비운의 그녀다.
『미실』의 작가 김별아가 미실에 이은 또 한 명의 문제적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신작 장편소설로 돌아왔다. 남성적이고 거시적인 역사소설과는 달리, 김별아 작가는 역사 기록에서 배제되곤 했던 여성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 기록들 사이사이를 들여다보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 이러한 작가의 관심과 탐구가 『조선왕조실록』에까지 미치면서, 이번 신작 『채홍(彩虹: 무지개)』에서 작가는 시대와 불화한 여성, 세종의 며느리이자 문종의 두 번째 빈이었던 순빈 봉씨의 동성애 스캔들을 정면으로 다룬다. 그리고 그동안 궁중 스캔들의 주인공 정도로만 회자된 순빈 봉씨에게 난(暖)이라는 이름을 주며 그녀의 삶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책은 역사의 행간을 파고들어 상상력을 극대화시킨다. 역사에서 소재를 찾아 역사 속에 기록되지 않은 ‘사랑’ 이야기로 재탄생한 이 작품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마저 거세당한 모든 나약한 것들에 대한 기억이자, 통념을 배반하고 죽음을 무릅쓴 채 자기 삶을 당당히 살아낸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 『어머니』동영상 보러 가기 |
문종의 빈과 관련한 이야기는 종종 티비에서 다루는 소재입니다. 익숙하지만 소설로 접하니 또다른 느낌이네요. 김별아 작가님의 필력은 정말 집중을 안할 수가 없는 힘이 있습니다. 다른 소설들도 대부분 읽었는데 이번 채홍이라는 글도 그 매력이 상당하네요. 대궐이라는 곳에서 혼자 외롭게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여인의 입장에서 이 글은 시작됩니다. 사가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고 오빠에게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 가련하게 느껴지기도 했네요.
소설의 제목이 채홍(彩虹)인 까닭은 무지개가 태양의 반대편에 뜨는 이치에서 비롯되었다. 왕이라는 태양이 빛나는 반대편에는 권력과 욕망과 사랑과 질투 등의 인간적인 감정들로 채색된 여인들의 무지개가 떴다. 또한 중의적으로 다양한 색을 가진 무지개는 성적 소수자(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의 국제적 상징이기도 하다. -작가의 말 중에서.
『채홍』은, 세종의 적장자이자 조선의 다섯 번째 왕인 문종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순빈 봉씨의 시점으로 그려진 이야기다. 알려진 본디 이름이 없고 죽어 얻은 시호도 없기에 한때 지녔던 순빈이라는 품계가 부를 수 있는 호칭의 전부다. 작가는 짧고 서늘했던 그녀의 생애에 온기를 불어넣는 '난(煖)'이라는 아명과 성씨를 따른 '봉빈'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냈다. 붉은 가마를 타고 갔다 검은 가마에 실려 오는 사이 꽃봉오리 같던 열여섯 소녀는 시들고 지친 스물셋의 소박데기가 되어있었다. 회임한 후궁을 투기하고 일상을 술에 취해 있고 여종과 사사로이 동침하는 추잡한 일까지 저지른 탕녀가 되어 사가로 돌아왔다. 공자가 말하고 유학이 정하고 열녀전 속의 귀신들이 증명하는 바대로라면 봉빈은 행실이 바르지 못한 파륜자였다. 훗날 나라의 주인이 될 세자와 함께 만백성의 어머니가 될 세자빈은 사랑받는 한 여인네로서의 사랑을 포기하며 살아가야만 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까지를 막을 수는 없는 법이거늘 유교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 여성들은 수많은 금기에 시달리는 가운데 특히 사랑을 통제받았다. 아무리 지엄한 명령과 법이라도 사랑하고 보니 사내가 아니었을 뿐인데 계집이 계집을 통해 음욕을 채우려 하는 것이 죄가 되는 시대였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서로를 배반하고 믿음을 저버리고 사랑을 부정했다. 상전의 요구를 차마 거절하지 못한 소쌍에게 정인이라도 된 양 봉빈이 집착한 결과가 되어있었다.
"종학에서는 제가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사옵니다. 저는 그저 세자빈이라는 이름을 가진 우인(偶人:인형)에 불과했습니다." -p307
궁궐 내 궁녀들 사이에서 여자들끼리 남녀의 교접을 흉내 내는 대식(對食) 행위가 은밀하게 번져 하나로 풍조로 자리 잡고 있었다. 어미 젖을 떼자마자 궁으로 들어와 오로지 한 남자만 바라봐야만 하는 궁녀들에겐 어쩌면 그것이 그들 나름대로의 욕망을 분출하는 방법이었으리라.
평소 담담한 낯빛과 점잖은 몸가짐으로 주 문왕의 아내 사씨를 빼쏘았다는 칭송을 받아온 세자빈 휘빈 김씨가 사가로 쫓겨났다. 폐빈의 사유는 어리석고 못나고 총명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세자가 빈궁에 오질 않자 남자로부터 사랑받는 비책을 궁녀로부터 알고 싶어했는데 그것은 '남자가 좋아하는 다른 여자의 신을 베어다가 불에 태워서 가루를 만들어 술에 타서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사랑을 받게 되고 신발 주인은 멀어져서 배척을 받는다'는 압승의 술법이었다. 두번째 맞이한 세자빈 순빈 봉씨는 사헌부 감찰을 거쳐 창녕 현감으로 재직한 봉여의 고명딸 '난'이었다. 일찍 어미를 여의고 유모로부터 젖을 물려 성장했으나 가족들과 주변사람들로부터 부족함 없이 양껏 사랑을 받았던 어여쁜 소녀였다. 궐에서 보았던 수백의 궁녀 중에도 그만한 미색을 갖춘 여인은 없었다. 그러나 세자는 덤덤했다. 세자에겐 덕도 소용없고 용모도 소용없었다. 상대의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구면이 아닌 사람을 만나면 낯을 가리는 습성 때문이었다. 사내다운 외양에도 불구하고 여색에는 전혀 관심이나 흥미가 없었으니 특히 낯선 여자를 싫어한 점이다. 심지어 유적을 통해 습득한 선입관까지 있었는데 심하게 아름다운 사람은 반드시 심한 악을 갖고 있다는 잘못된 믿음이었다.
아름다운 것이 그녀의 죄일 리 없으나 아름다움 때문에 외면당하는 것도 그녀의 운명이었다. 의례를 행할 때는 정중하고 극진하기 이를 데 없던 세자였건만 단둘의 자리에서는 아내를 없는 사람처럼 무시했다. 신혼 초야부터 그녀 스스로 옷고름을 풀더니 결국 그녀의 궁생활은 설움과 황망함을 이룬 마당과부와도 같았다. 명랑한 성격의 난은 지아비의 처분에 고분고분 따르지 못하고 시비곡직을 물었던 게 용서 못 할 과오였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자 하는 것 자체가 욕심이었고, 여자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사람으로서 할 일이 아니었다. 좋은 것을 좋다고 하고 싫은 것을 싫다고 하는 일이 부끄러운 죄가 되었다. 사람의 삶이 짐승보다 나을 게 없었다.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도 입맛을 없었으며, 점점 웃음을 잃었고 울보가 되어갔다. 세자 내외의 불화는 부왕의 근심으로 옮겨갔고 효심을 발휘한 세자가 빈궁을 찾았으니 그것은 사랑이 없는 짐승 교배나 진배없었다.
왕실의 고뇌에는 무엇을 희생시키고 어떤 사실을 곡해해서라도 세자에게 오점을 찍어서는 안 되었으니 자손이 널리 퍼질 수 있게 동궁에 잉첩을 세 명 들였다. 세 명의 승휘 중 권씨가 입궐 1년 만에 수태를 했다. 결국 봉빈도 사가로 쫓겨났던 휘빈 김씨처럼 미신적인 풍속에 매달렸고 급기야 상상임신까지 하기에 이른다. 임시변통으로 실혈(유산)했다고 거짓 실토한 것이 탄로났고 궁 안에서 모두의 비난 세례를 받았다. 거짓임신 소동 이후 술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과가 되었고 급기야 금단 후유증까지 나타났다. 권승휘가 조산한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에 자신이 가졌던 분노와 시기를 미안함과 죄악감으로 갚기 위해 술이 늘었다. 동궁의 딸이 낳자마자 죽은 뒤 임금은 세자와 봉빈을 종학에 나가 살도록 명했는데 첫 아이는 정실인 봉빈에게서 낳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궁 안에 있을 때보다도 더 나빠졌다.세자는 바빴고 봉빈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졌다. 꽃다운 나이의 봉빈에게 그토록 간절한 것이 오직 술뿐이었다. 술이 아니라면 살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비집고 바람의 아이, 여인이라기엔 석연찮은 궁녀 소쌍과 비에 젖고 사랑에 취하고 만다. 궐 안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도 세자는 봉빈이 벌인 내막을 끝내 묻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초연하고도 무심한 방관자였고 구경꾼에 불과했던 것이다. 첫째에 이어 둘째 세자빈까지 폐위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당시 절차, 의례, 격식을 챙기느라 몇몇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은 죄악으로 여겨지던 사회에서 이 사람들이 바랐던 건 그냥 사랑이었는데 그마저도 철옹성 같은 벽에 막혀버렸다.
읽으면서 어찌나 답답하던지! 소설 속 외로운 봉빈이 제대로 미쳐버리지 않은 것이 대단하다. 마음 통하는 친구 한명 없고 가족들도 볼 수 없고 남편 마저 외면 하는데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한다니 정말 가혹한 시대였다는 생각이 든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지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목숨도 안중에 없이 사랑하려 한 그들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