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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기회주의적 반공군사독재의 기원을 찾아서

박홍규 | 인물과사상사 | 2019년 8월 8일 한줄평 총점 10.0 (4건)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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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정치 > 정치/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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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유대인과 세계를 학살한 기회주의자
“전쟁이 시작되면 정의보다는 승리가 우선이다”
“대중이 생각을 안 하니 통치자들은 얼마나 운이 좋은가?”

히틀러는 희대의 악당인가, 살인마인가? 히틀러는 유대인들의 축재를 독일 대중이 겪는 가난의 원인이라고 규정하고 유대인과 집시들을 대량 추방하거나 학살했다. 또 제1차 세계대전 패전에 따른 과도한 배상으로 인한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1930년대 전후의 대공황으로 침몰하는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경제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다. 그는 노동조합 해산과 파업 등을 통해 기업인들에게 더 많은 재량을 주고 아우토반, 병원과 학교, 올림픽경기장 건설 등을 통해 일자리를 만들었으며 재무장을 위한 군비 확장 정책을 실시해 군수산업을 팽창시켰다.

히틀러는 대공황 때 긴축으로 일관한 바이마르공화국 정부의 정책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농민, 퇴역군인, 중하류층 등을 향해 정치적 메시지를 던졌다. 그리고 1933년 총리에 오른 뒤 ‘오타키(폐쇄적 자립경제)’ 정책과 일자리 우선의 완전고용 정책을 펼치고 국제연맹 탈퇴, 수입품에 대한 관세 인상 등 수입 통제로 국내 산업 보호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집권 당시 30퍼센트대였던 실업률은 1939년에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로 바뀌는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히틀러는 어떤 정견이나 이념이나 원칙이나 주의 같은 것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기회주의적 반공군사독재자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정치를 시작할 때부터 기회주의자였다.

독일에서는 일찍부터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반유대주의는 더욱 극심해졌고, 그 풍토 속에 히틀러가 등장했다. 히틀러는 탁월한 연설과 천부적인 선전선동에 능했는데, 그는 자신을 ‘영웅을 위한 선동가’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독일을 구할 영웅이라고 믿었다. 라디오 연설에서도 국민 상호간의 대립을 극복하고 마르크스주의의 박멸을 선언했다. 그러면서 유대인의 공민권을 박탈하고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의 성교와 혼인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면서까지 철저하게 유대인들을 탄압했다.

목차

머리말 : 왜 지금 히틀러인가? · 005
히틀러와 『나의 투쟁』 · 021
히틀러를 이해하기 위한 매우 짧은 독일사 입문 · 033
나쁜 혈통이나 성적 불량 탓만은 아니었다 · 041
히틀러는 정치를 시작할 때부터 기회주의자였다 · 053
나치는 25개조 강령으로 시작되었다 · 061
보수적인 법원과 감옥이 히틀러를 살렸다 · 073
독일인들이 히틀러에게 정권을 내주었다 · 083
히틀러의 독재는 수권법에서 나왔다 · 093
히틀러, 완벽한 독재의 총통을 시작하다 · 103
‘대독일’로 나아가다 · 115
히틀러와 올림픽 · 123
홀로코스트를 시작하다 · 127
절멸 전쟁을 시작하다 · 137
맺음말 : 히틀러는 희대의 악당이 아니라 기회주의자다 · 149

저자 소개 (1명)

저 : 박홍규 (朴洪圭)
1952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법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시립대학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학 법대·영국 노팅엄대학 법대·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학·고베대학·리쓰메이칸대학에서 강의했다. 현재 영남대학교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로 전공뿐만 아니라 정보사회에서 절실히 필요한 인문·예술학의 부활을 꿈꾸며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민주주의 법학연구회 회장을 지냈으며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 1952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법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시립대학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학 법대·영국 노팅엄대학 법대·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학·고베대학·리쓰메이칸대학에서 강의했다. 현재 영남대학교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로 전공뿐만 아니라 정보사회에서 절실히 필요한 인문·예술학의 부활을 꿈꾸며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민주주의 법학연구회 회장을 지냈으며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세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글을 쓰는 저술가이자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이며 인문·예술의 부활을 꿈꾸는 르네상스맨이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아내와 함께 작은농사를 지으며 자유·자연·자치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그동안 『존 스튜어트 밀』, 『아돌프 히틀러』, 『누가 헤밍웨이를 죽였나』, 『카프카, 권력과 싸우다』, 『복지국가의 탄생』, 『헤세, 반항을 노래하다』, 『제우스는 죽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조지 오웰』, 『니체는 틀렸다』, 『인문학의 거짓말』, 『왜 다시 마키아벨리인가』, 『내 친구 톨스토이』, 『함석헌과 간디』, 『독학자 반 고흐가 사랑한 책』, 『독서독인』, 『마르틴 부버』, 『이반 일리히』,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다시 보기』, 『반민주적인, 너무나 반민주적인』, 『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 『윌리엄 모리스 평전』,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생각하라』, 『자유인 루쉰』 등을 집필했으며,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 『유한계급론』, 『군주론』, 『산업 민주주의』, 『간디가 말하는 자치의 정신』, 『간디, 비폭력 저항운동』, 『유토피아』, 『이반 일리히의 유언』, 『학교 없는 사회』, 『자유론』, 『간디 자서전』, 『오리엔탈리즘』, 『사상의 자유의 역사』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출판사 리뷰

나치와 25개조 강령

1920년 2월 24일, 2,000여 명의 청중이 모인 맥줏집에서 나치당의 ‘25개조 강령’이 발표되었다. 그것은 히틀러가 아니라 경제학자 고트프리트 페더가 작성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을 집필할 때 전술적 문제에 중점을 두고 그것을 고쳐 책에 수록하기도 했다. 1920년의 강령에는 당시 혁명의 열기가 남아 있었던 탓에 사회주의적인 색채가 가미되어 있었으나, 1927년 이후의 강령에는 그것이 상당히 제거되었다.

25개조 강령의 첫 3개조는 베르사유조약이 새로 정한 독일 국경을 수정하고 국경 밖 독일인을 포함하는 대독일국가를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4~10조에서는 독일 국민의 권리 의무를 규정하면서 독일인의 피를 갖지 않은 유대인의 공민권을 박탈한다고 선언했다. 11~18조는 ‘공익’에 관해 불로소득 금지, 이자 노예제 타파, 전시 이득의 완전 몰수, 트러스트기업의 국유화, 대기업 이익배당에 참여, 양로제도 확충, 건전한 중간층의 창설과 유지, 대백화점의 전시 공유화, 소기업 보호, 공익 목적의 토지 무상 몰수, 지대 폐지, 토지 투기의 방지 등이었다. 19~25조는 유물주의적인 로마법 폐기, 빈곤 아동 교육의 국가 부담, 모자 보호, 소년 노동 금지, 청소년 체육 장려, 국민보건 향상, 국민군 창설, 언론계의 유대인 배제, 반유대적인 적극적 기독교, 강력한 중앙집권제 창설 등이었다.

25개조 강령의 내용은 5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인종주의다. 무엇보다도 강령은 독일 민족의 혈통을 지닌 자에 대해서만 독일 시민으로 인정했다. 둘째, 대외 정책이다. 베르사유조약의 즉각 파기와 민족자결권의 보장에 의한 타국과의 동등 규정, ‘대독일 통일’ 규정이다. 셋째, 경제·사회 정책이다. 무엇보다도 노동을 국민의 의무로 규정했다. 넷째, 법과 교육 등의 개혁이다. 법 개혁은 로마법, 즉 나폴레옹 민법전을 폐지하고 유물론적 색채가 적은 게르만법을 채택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교육에서도 스포츠 교육의 강화와 실생활에 적합한 교육과 공민교육을 포함시켰다. 다섯째, 국가의 형태다. 독일이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가야 한다고 규정했다.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는 본래 영어권에서 화재나 참사를 뜻하는 보통명사였으나, 나치 독일에 의한 유대인 학살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말은 구약성서의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라는 함의가 있어 이스라엘에서는 그 대신 파국이나 파멸을 뜻하는 ‘쇼어’라는 말이 사용된다. 홀로코스트의 저변에는 3개의 사상이 있었다. 인종주의, 우생사상, 반유대주의인데 이것은 서로 관련된다. 인종주의는 인간을 생물학적 특성이나 유전학적 특성에 의해 몇 가지 인종으로 나누고 인종 사이에 생래적인 우열의 차가 있다고 보는 편견에 근거한 사고방식, 관념, 담론, 행동, 정책 등을 뜻한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 정한 최초의 반유대법은 유대인의 공직 추방을 의도한 1933년의 ‘직업관리 재건법’이었다. 유대인이 공직에서 추방되면 반유대적인 법이나 정책을 전개시키기 쉽고, 그 법은 민간 분야에도 파급될 수 있었다. 1935년 ‘뉘른베르크 인종법’이라고 불리는 ‘독일 공민법’과 ‘독일인의 피와 명예를 지키는 법’이 제정되었다. 그 결과 유대인의 법적 지위는 해방 이전으로 돌아갔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저명한 유대인들의 망명으로 이어졌다. 그가 1933년 3월 미국으로 망명한 직후인 5월 10일, 국민계몽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유대인들의 저작과 공산주의·사회주의 서적들을 불살랐다.

1938년, 히틀러의 유대인 억압은 더욱 강해졌다. ‘제국 수정의 밤’을 비롯한 끔찍한 사건이 계속 터져 수백 명의 유대인이 살해되고 3만 명 이상의 유대인 남성이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를 합방한 히틀러의 외교적 성공은 유대인 박해에도 국내외 사람들이 히틀러를 무조건 추앙하게 만들었다. 인구의 1퍼센트도 안 되는 유대인 문제는 대다수 독일인에게는 관심의 대상도 되지 못했다. 1939년에는 유대인을 국외로 추방하는 정책이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되어 그해에만 약 7만 5,000명이 독일을 떠났다.

히틀러는 기회주의자다

1919년 4월, 히틀러는 병사평의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에는 부대마다 병사평의회가 설치되었고, 장병들도 혁명파에서 반혁명파까지 다양했다. 히틀러도 혁명파는 아니었다. 당시 뮌헨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바이마르공화국을 부정하며 소련식 볼셰비즘 정권을 수립했다. 히틀러는 볼셰비즘 정권을 타도하는 데 힘을 쓰기는커녕 그 휘하 대대의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기회주의적이고 시류에 영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어도 혁명 좌파에 반감을 품었다. 히틀러는 정치적 이념에 의해서 볼셰비즘 군사 활동에 참여했다기보다는, 단지 제대하지 않고 가능한 한 군대에 오래 남고 싶다는 이유로 기회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히틀러는 재군비와 징병제 도입을 주장하는 한편 국회 연설에서는 평화를 주장하는 등 전쟁주의자와 평화주의자라는 모순된 두 얼굴의 외교정책을 실시했다.

라파엘 젤리히만은 『집단애국의 탄생: 히틀러』에서 히틀러를 “지난 천년을 통틀어 가장 폭력적이었던 한 정치가”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독재자로서 히틀러는 1,700만 명을 죽여 2,300만 명을 죽인 이오시프 스탈린이나 7,800만 명을 죽인 마오쩌둥보다 못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히틀러가 ‘최근 1,000년의 최대 악당’이라는 소리는 맞는 말인가? 히틀러식의 군사 정복과 독재, 말살과 학살, 계엄령과 특별법정, 노예와 강제노동, 집단수용소와 대양을 넘어가는 이주 등은 영국이나 프랑스 등 모든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수법이기도 한 것이 아닌가? 히틀러는 그것을 흉내낸 것에 불과했고, 굳이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제국주의자들보다는 짧은 시간에 집약적으로 폭력을 행사한 정도의 차이가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

문제는 히틀러 개인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로지 히틀러 개인 탓이라고 몰아가는 것은 결국 독일인이 자기 책임을 벗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독재를 용인한 유럽 정치인들과 유럽인들의 책임을 벗기 위한 수작에 불과하다. 당대의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인들에게도 히틀러가 독재를 하도록 용인한 책임이 있다. 일찍이 해나 아렌트가 지적했듯이 전체주의 대두의 토양은 대중사회 내부에 도사리고 있었다. 즉,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와 민족주의가 발달하면서 새롭게 형성된 의식, 강제와 의도적인 노력을 통해 인간을 개조하고 변형시킬 수 있다는 의식, 국가나 사회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킬 때 비로소 삶의 의미와 의의가 확보된다는 의식이 자리 잡았다.

마찬가지로 허버트 마르쿠제가 주장했듯이 파시즘의 책임 논의에서 더욱 근본적인 책임 소재는 자본주의 자체, 산업문명 자체, 권력구조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전쟁국가, 소비주의, 생태계 위기, 폭력과 냉소주의, 문화와 행정의 대중적 진부함과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는 현대 산업 문명에 그 책임이 있다. 나아가 생명을 파괴하고 오용하고 퇴화시키는 권력구조 자체에 책임이 있다. 나치즘은 독점자본주의의 종양이 돌출한 것으로 한계에 이른 자본주의가 배양한 야만주의다.

종이책 회원 리뷰 (2건)

기회주의자, 세상을 손에 넣다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 스타블로거 : 골드스타 q*****2 | 2019.07.15

침체된 경기가 좀체 회복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른바 고통분담. 월급을 동결하는 수준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정규직의 비정규직화, 더 나아가 퇴직 종용, 해고도 잦은 요즘이다. 각박한 현실의 원인으로 언급되는 것들 중 하나로 외국인 노동자를 꼽을 수 있다. 제3 세계 출신인 그들은 우리 청년들의 취업 가능성을 낮추는 요인이라는 비난을 받고는 한다. 너무도 열악해서 한국인 누구도 가려 들지 않는 직종에 그들이 종사 중이라는 사실은 중요치 않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건 비난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존재일 뿐이다.

제2 차 세계 대전의 원인으로 거론되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경기 침체다. 자못 날카로워진 사람들은 폭력도 마다 않고 행하면서 다소 엉뚱한 방식으로 문제 해결에 나선다. 적절한 방법이 아니므로 당연히 효과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마법에라도 걸린 양 한동안은 이를 추종한다. 희대의 살인마 즈음으로 여겨지곤 하는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도 그랬다. 그는 시대와 사회가 딱 변화를 요하는 그 시점에 등장했으며,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 들었다. 머리가 좋았던 걸까. 한 때 미술학도의 길을 걷고자 했던 그가 유대인 대학살의 선봉에 서게 된 까닭이 무언지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저자가 주목한 건 기회주의였다. 한 때 미술학도의 길을 걷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해 쌓인 좌절감이 오늘날의 히틀러를 만들었다는 식의 설명을 들은 적은 있으나 기회주의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정말 히틀러는 기회주의자였을까.

히틀러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 될지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아니 한 시절, 독일 전역은 혼란 그 자체였다. 바이마르공화국 정부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 나약한 정권에 반하는 움직임 중 하나로 소련식 볼셰비즘 정권의 수립 시도가 행해졌는데, 이후 공산주의자 타도를 부르짖은 히틀러 또한 이 조직의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저자는 그의 이와 같은 행보의 원인으로 ‘가능한 한 군대에 오래 남고 있다는 이유’를 꼽았다. 딱히 직업이란 걸 가지지 못한 히틀러로서는 생계 해결을 할 수 있는 군대에 오래도록 몸 담는 게 생존을 위해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후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군인의 정치 활동은 금지였지만, 히틀러에게 그것은 전혀 중요치 않았다. 언제까지 군인일 수 있을지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어가 됐건 시도해 보는 게 히틀러에겐 필요했다. 이 당은 후에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즉 나치당(NSDAP)이 됐다.

나치당이 내세운 25개조 강령이 어떠한 심오한 철학도 지니지 못했음을 저자는 간파했다. 그럼에도 히틀러와 나치당이 대중의 인기에 영합할 수 있었던 데엔 히틀러의 어마어마하게 짙은 호소력이 한 몫 했다. 혼탁한 사회에서 영웅이라도 된 것 마냥 탁월한 연설 능력을 선보인 히틀러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린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히틀러의 대중적 인기는 감옥에 갇힌 그에게 자유를 선사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히틀러가 가장 기회주의적으로 여겨진 대목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었다. 이미 유대인 박해는 진행 중이었지만 독일 사회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한 유대인 인구에게 닥친 비극을 주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히틀러는 한 편에서는 교묘하게 반유대주의를 자행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올림픽에서의 영광을 위해 유대인 선수들도 독일 선수단에 합류시켰다. 한 얼굴로 서로 다른 두 개의 정책을 선보이는, 히틀러는 올림픽을 자신을 영광되게 만드는 또 하나의 기회 즈음으로 해석했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기회주의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완용은 친러, 친미, 친일 등 상황에 맞추어 옷을 갈아 입는 재주(?)을 선보이며 끝끝내 살아남았다. 여전히 많은 논란을 낳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반공 군사독재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기 이전 행보가 수상쩍다. 어떠한 정치적 비전도 없이 오로지 권력만을 노려온 기회주의자들이 우리 사회의 권력을 독식해 왔다는 사실이 뼈아프다. 과연 그들에게 아돌프 히틀러는 어떠한 존재라는 평을 받을까. 설마 자신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권력의 정점에 선 인물이므로 존경받아 마땅하다고는 하지 않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순간 온몸 가득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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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문화리뷰 기회주의자 히틀러의 재등장을 심히 경계함!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YES마니아 : 골드 스타블로거 : 골드스타 사**기 | 2019.05.09

 

박형규 작가는 왜 아돌프 히틀러에 주목했을까? 그 이유는 미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때문이다. 작가에 의하면 트럼프가 미 대선 후보 시절부터 지금까지 보여온 행태는 히틀러를 연상시킨다. 인간 트럼프와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히틀러를 지금, 다시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트럼프는 20156월 미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하면서 멕시코 이민자를 강간범이라고 묘사하는가 하면 무슬림을 잠재적 테러 분자로 규정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의 축재를 독일 대중이 겪는 가난의 원인이라고 규정했다.

트럼프는 멕시코를 비롯한 이민자들은 미국 백인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무슬림들은 미국 안보를 해치는 세력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또한 트럼프는 이민자를 막는 국경 장벽 구축과 무슬림의 미국 입국 금지와 불법 체류자 추방을 주장해왔다. 히틀러는 유대인과 집시들을 대량 추방하거나 600여만 명을 학살했다.

그보다 중요한 유사점은 두 사람의 기반이 대중의 사회경제적 불만이고, 지지층이 중하류층이라는 점이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 패전에 따른 과도한 배상으로 인한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1930년대 전후의 대공황으로 침몰하는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경제를, 트럼프는 세계화와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해 커져가는 미국의 불평등한 분배 구조를 정치적 기반으로 했다.

히틀러는 대공황 때 긴축으로 일관한 바이마르공화국 정부의 정책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농민, 퇴역군인 중하류층 등을 향해 정치적 메시지를 던졌다. 트럼프는 세계화 등으로 중산층에서 탈락하는 미국 중하류 백인층을 겨냥했다. 게다가 지지층 결집을 위해 히틀러가 바이마르공화국의 폭력 타도를 표방했듯이 트럼프는 각종 집회에서 지지층들의 폭력을 선동했다. 트럼프는 세계경제 이탈, 무역적자의 상대국에 대한 공격, 극단적인 자유우대정책의 강행을 통해 히틀러와 유사하다는 지적을 계속 받아왔다.

트럼프가 취임사에서 미국인을 고용하고, 미국 물건을 사라고 말한 뒤 전개한 미국 내 일자리 우선 정책은 히틀러가 1933년 총리에 오른 뒤 오타키(Autarky, 폐쇄적 자립경제)’ 정책과 일자리 우선의 완전고용 정책을 펼치고 국제연맹 탈퇴, 수입품에 대한 관세 인상 등 수입 통제로 국내 산업 보호 정책을 편 것과 너무나 유사하다.

히틀러가 노동조합 해산과 파업 등을 통해 기업인들에게 더 많은 재량을 주고 고속도로인 아우토반 건설, 올림픽경기장 등 대형 공공건물 건립 등을 통해 일자리를 만들었으며 재무장을 위한 군비 확장 정책을 실시해 군수산업을 팽창시킨 것도 트럼프의 정책들과 유사했다. 그 결과 집권 당시 30%대였던 실업률은 1939년에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로 바뀌는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

저자의 견해는 언뜻 1940년대 후반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을 지낸 버트럼 그로스의 친절한 파시즘을 떠올리게 한다. 그로스는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의 출현을 지켜보면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거대 기업과 거대정부의 연합이 나치의 강압적 파시즘과 달리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대중의 생각을 교묘히 관리하는 방식으로 억압적인 지배 세력을 형성하는 신파시즘이 나타날지 모른다고 경고한 바 있다.

 

 

201611월 트럼프 당선 이후 1984, 멋진 신세계, 있을 수 없는 일이야같은 디스토피아 소설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들 작품은 연극, 공연 등 다양한 콘텐츠로 재생산되거나 패러디되었다.

특히 있을 수 없는 일이야(원제 It Can‘t Happen Here)(우리나라에는 20181월 번역)는 미국 최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가 1935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줄거리는 1936년 대선에서 승리한 버즈 윈드립이 군사법을 제정해 언론과 대학을 장악한 후 의회와 사법부를 무력화시키는 등 민주주의를 질식시킨다는 내용이다. 루이스가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재혼한 아내 도로시 톰슨에게서 받은 영감 덕분이었다. 아내는 1931년 히틀러를 인터뷰했고, 1934년 미국 언론인으로선 처음으로 나치에 의해 추방되기도 했다. 루이스 역시 히틀러의 틍장을 통해 암울한 미래를 엿보았음에 틀림없다.

박형규 작가에 따르면 트럼프와 히틀러 두 사람 사이의 근본적인 공통점은 기회주의자라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어떤 정견이나 이념, 원칙이나 주의 같은 것을 갖고 있지 않으며, 둘다 태어나면서부터 기회주의자다.

저자는 지금처럼 경제가 어렵고 실업률이 높아지면 이런 기회주의자들이 기회를 틈타 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1920~1930년대 유럽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프랑코, 그리고 일본에서 우익들이 권력을 잡고 세계 대전을 일으켰듯이 지금 21세기 초반에도 그런 자들이 정권을 쥐면 제3차 세계대전이 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우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긴장과 좌우 갈등은 자칫 또 다른 화약고가 될지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우리는 히틀러에게서 타산지석의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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