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전작 양들의 침묵과 한니발을 정말 재밌게 읽었다. 특히 양들의 침묵은 영화로도 유명한데, 그 이야기의 짜임새나 인물의 심리 묘사, 긴장감의 완급 조절 등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그 중점에 서있는 괴물, 한니발의 탄생을 이야기한다.
세계 2차 대전이 낳은 참혹함, 그 중심에 서있었던 한니발의 유년기. 그리고 자신의 여동생의 잔인한 죽음. 이 것들이 모두 모여 한니발에 내면에 잠재하고 있던 괴물을 수면위로 끌어올린다.
한니발이 유년기에 겪었던 참혹함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한니발은 결국 괴물이 되었을까? 나에게 이 책은 단지 잔혹함을 보여주는 책 만은 아니다.
유년기에 겪었던 고통이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가, 아니면 원래 괴물이었던 사람이 괴물이 된 것인가?
한니발 렉터를 희대의 식인 살인마로 만든 건 유전일까 환경일까. 토머스 해리스의 3대 걸작 중 하나이자 <한니발>의 프리퀄 격인 소설 <한니발 라이징>에 그 답이 나온다.
한니발은 리투아니아의 유서 깊은 가문 중 하나인 렉터 가문의 8대손으로 태어났다. 한니발의 부모는 장남이자 유일한 아들인 한니발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해줬다. 어릴 때부터 수학과 과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한니발에게 특별 가정 교사를 붙여줄 정도였다. 그러다 전쟁이 발발했고, 가족들은 물론 가정 교사와 하인들까지 함께 피난을 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한니발의 부모가 죽었고, 가정 교사가 살해되었고, 한니발이 끔찍이 사랑했던 여동생이 참혹한 방식으로 죽었다. 그 충격으로 한니발은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종전 후 상당 기간 동안 고아원에서 지내며 학대와 폭력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한니발의 삼촌 로버트가 나타나 한니발을 고아원에서 빼냈다. 한니발은 유명 화가인 로버트와 로버트의 아내인 레이디 무라사키, 레이디 무라사키의 몸종 치요와 지내며 가까스로 마음이 안정된다. 그러나 또다시 비극이 닥치고, 한니발은 자신을 괴롭히는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직접 발 벗고 나서기로 결심한다. 악은 쉽게 처단되지도 않고 스스로 사멸하지도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토머스 해리스가 <한니발 라이징>을 집필하기 전에 일본 문화에 푹 빠졌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본 문화에 대한 언급 또는 인용이 이렇게 많을 수가 없다. 레이디 무라사키는 <겐지 이야기>를 쓴 일본의 여성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에게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인물이며, 이 밖에도 일본 도(刀), 일본 갑옷, 기모노, 하이쿠 등 일본과 관련된 개념 또는 이미지가 수없이 등장한다. 오리엔탈리즘 내지는 서양인들의 일본 문화에 대한 미화를 좋아하지 않는 독자라면 이 작품이 불편할 수 있겠다.
나는 <한니발>을 읽을 때부터 클라리스 스탈링이 아니라 한니발 렉터의 심리를 중점적으로 서술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꼈다. 피해자 구제는커녕 가해자 처벌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데 굳이 가해자의 심리나 범죄 동기까지 알아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들의 침묵>, <한니발>, <한니발 라이징>으로 이어지는 3부작 시리즈를 다 읽은 건, 이러니저러니 해도 토머스 해리스의 필력이 좋고 이야기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토머스 해리스의 최신작도 읽을까 말까 고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