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몽테뉴의 수상록, 정명훈 엮고 안혜린 옮김(메이트북스)
이 책의 소재는 바로 저 자신입니다 !
1580년 3월 1일 몽테뉴
목차
1. 늙음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2.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긴다 carpe diem
3. 진짜 나답게 되는 법을 안다
4. 나 자신을 늘 경계하고 성찰한다
5. 지식을 얻되 나의 것으로 만들라
<나에게로 다가온 글들>
당신의 죽음은 만유질서의 한 조각이자 세계의 생의 한 조각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원리를 어찌 그대를 위해 바꾸겠는가? 그대는 이같이 아름다운 원리를 통해 창조되었으며 죽음은 그대의 일부다. (노무현대통령의 유언장이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득이 되는 것은 다른 이에게 실이 된다.
장사꾼은 청년이 방탕할 때, 농부는 밀 가격이 비쌀 때, 건축가는 집이 무너졌을 때, 사법관은 소송과 분쟁이 있을 때 돈을 잘 번다. 성직자들 역시도 우리가 죽거나 악을 행할 때에야 존경을 받고 제 역할을 한다. 결국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일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싹트고 자라남을 발견할 것이다.
이 생각을 하다 보니 죽음이 자연의 원칙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늙지 않은 것은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에 나는 정신의 노화를 피할 수 있는 한 피하라고, 할 수 있다면 고목에서 피어나는 겨우살이처럼 초록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라고 조언한다.
만일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침대보다는 말 위에서, 집 밖에서, 내 사람들과 먼 곳에서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미련한 사람은 원하는 것을 얻고도 기뻐할 줄 모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절대 자신에 대해 불만을 품지 않는다.
사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이 주어졌으므로 사람은 살 수 있다. 그러나 부와 명예와 영광이 넘쳐나고 자녀들의 명성으로 빛이 나는 사람일지라도 깊은 내면에는 근심하는 마음이 있다. 고통스러운 탄식으로 정신이 괴로울 수도 있다. 그때야 그는 불행의 근원이 바로 자체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릇에 결함이 있기 때문에 밖에서 아무리 좋은 것들을 부어 본들 내부는 부패할 수밖에 없음을 말이다.
우리가 ‘행복’이라 부르는 것은 ‘불행’의 부재일 뿐이다. 이것은 쾌락을 가장 예찬했던 에피쿠로스 학파가 ‘행복을 괴로움의 부재’라고 정의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엔니우스가 “불행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너무나 행복한 일”이라고 말했듯이 인간이 바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불행의 부재다.
위대한 일을 판단하려면 크고 위대한 정신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악함이 그 판단에 영향을 준다. 곧은 노도 물 안에서는 굽어져보인다.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사실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보는냐도 중요하다.
습관은 제 2의 천성이며 천성보다 결코 약하지 않다. 습관이 들기 전까지는 내 성격이 아니라고 간주한다. 오래도록 내가 지내왔던 상태를 잘라내는니 차라리 나에게서 삶을 빼앗는 것이 낫다.
스스로를 충분히 존중하는 사람은 드물다.
어릴 때는 배워야 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숙달해야 하며, 나이가 들었을 때는 어떠한 의무도 없이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고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악이 우리 영혼을 사로잡고 있을 때 영혼은 스스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영혼을 되찾아 자기 안에 가두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고독이다.
우리 영혼은 공격하거나 방어할 능력, 주고받는 능력도 있다. 그러므로 고독할 때 지루한 무위에 빠져버릴까 염려하지 말자.
“고독 한복판에서 스스로 군중이 되어라.”
모든 일의 순서와 과거.미래가 뒤집어지지 않는 한, 그대가 아무리 상상하고 바란다고 한들 세상의 어느 한 조각도 바꿀 수 없다. 우주의 대순환이나 스토아적 사유의 연쇄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그대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보다 그대가 자신에게 무어라 이야기할지를 신경 써야 한다.
자신을 다스릴 줄도 모르면서 스스로에게 모든 일을 일임하는 것은 미친 짓이리라.
자기 자신 앞에서는 감히 발을 헛디딜 생각도 못할 정도로 스스로에게 경외심을 가지며 정신을 고결한 심상으로 가득 메우라.
그대의 영혼이 참된 선은 깨달은 만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대는 생명을 연장하거나 명성을 높이고자 하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도 만족할 수 있다.
“과시하려는 의도 없이 사람들의 이목에서 벗어나 하는 일들이 휠씬 칭송받을 만하다.”
나는 진리를 환대하고 사랑한다. 멀리서부터 진리가 내게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면 나는 기꺼이 그에게 나를 내어주고 패배의 의미로 무기를 건넨다.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던 소클라테스에게 “당신은 무엇을 아느냐?”라고 물었더니, 그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우리가 아는 것 중에 가장 큰 부분이 우리가 모르는 것의 가장 작은 부분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주었다.
나는 내 행동에 대해 어디서나 조심하며 나를 통제하는 법을 배운다. 단순히 우리가 바보짓을 했거나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바보일 뿐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휠씬 위대하고 중요한 가르침이다.
“드러나는 결함은 차라리 덜 심각하다.
정말 위험한 결함은 건강한 기색을 하고 숨어 있다.”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
“인간의 마음은 목성이 지구에 보내는 빛만큼이나 자주 변한다.”
오직 소크라테스만이 “자신을 알라.’라는 신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체화하고, 이 깨달음을 통해 스스로를 업신여기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 대담하게 큰 목소리로 말할 수 있다.
꿀벌들은 꽃밭에서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결국에는 온전히 자신만의 꿀을 만들어낸다. 이 꿀은 더이상 다른 데서 빌려온 백리향의 것도, 꽃박하의 것도 아니다. 이렇게 학생은 다른 데서 얻은 지식들을 혼합하고 변형시켜 완전한 자신의 작품, 즉 자신의 견해를 만들어내야 한다.
소크라테스에게 그의 출신을 물었더니 그는 “아테네요.’라고 하지 않고 “세계요.”라고 답했다.
발밑밖에 보지 못하는 우리와 달리 소크라테스는 휠씬 풍부하고 광대한 상상력을 갖고 있어 모든 인간에 대한 지식과 친분, 감정을 버리고 세계를 자기 집으로 삼았다.
하나하나가 유에 속하는 종으로 증식하는 이 큰 세상은 바로 우리를 바르게 알기 위해 들여다봐야 하는 거울이다.
내 삶의 여정에서 찾은 최고의 필수품은 책이다.
책이 내 곁에 있어 내가 원할 때 즐거움을 줄 것이라는 상상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평온해지는지 또 얼마나 큰 위안을 받는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다.
이것을 양식 있는 사람들에게 말로 전해주려니 안타깝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나답게 되는 법을 아는 것이다.
‘나답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