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예술은 무엇일까.
유고슬라비아 출생 행위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예술가와 마주하다> 퍼포먼스를 보고 처음 떠올린 생각이다. 테이블 건너편의 예술가와 마주 앉아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눈을 응시하는 이 퍼포먼스에서 도대체 무슨 의미를 읽을 수 있는 걸까. 사람들은 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를 행위 예술의 대모라고 부르며, 그 의자에 앉기 위해 MoMA(뉴욕현대미술관)에서 밤을 새우며 줄을 서는 걸까. 또 왜 급기야 눈물까지 흘리는 걸까. 온통 의문 투성이었다. 현대 예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함에 약간의 자괴감마저 들 지경이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이야기를 다룬 오스트레일리아의 소설가 헤더 로즈의 <현대적 사랑의 박물관>이라는 소설을 통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저마다 상실의 아픔을 가진 이 소설 속 주요인물들이 나 대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맞은편 의자에 앉아주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마리나의 눈을 응시하는 동안 의자에 앉아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아무 말도, 아무 행위도 할 수가 없다. 그 순간에는 단지 나 자신과 나를 쳐다보고 있는 마리나의 눈동자만 존재할 뿐이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고독한 그 순간에 내면의 세계로 침잠하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영화 음악가 아키 레빈은 의자에 앉아 그의 내면을 통해 아내를 만난다. 건축가로서 이름을 날리던 아내 리디아는 혈액 암에 걸려 요양 시설에 들어갔고, 심지어 변호사를 통해 남편의 접근마저 금지 시켰다. 레빈의 창작 활동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레빈은 아내의 처사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아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또 그가 과연 창작 활동에 안 좋은 영향을 받으면서까지 아내를 간호할 수 있을지 혼란스러워한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서 예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아내이고, 사랑한다면 옆에 있어주어야 하는 것임을 깨닫고 요양원으로 향한다.
미술 비평가이자 방송 진행자인 힐라야스는 의자에 앉아 스키 사고로 죽은 남편을 본다. 성적 매력을 느끼는 방송 진행 파트너 아널드 키블과 몰래 만나고 있지만, 자신이 정말 사랑했던 남자는 남편 톰뿐임을 깨닫는다. 그녀의 삶은 명성과 섹스가 가득하지만, 정작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상대는 없어 공허하게만 느껴진다. 힐라야스의 오만한 파트너 아널드 키블 또한 의자에 앉는다. 그는 아내 이저벨을 두고 힐라야스에게 심하게 끌리고 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자신도 모를 눈물 한 방울을 흘리는데, 그것은 아마 스스로를 제멋대로인 개새끼라고 위로하며 살았으나, 실은 완전히 나쁜 사람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아서일 테다. 그가 마리나의 눈동자를 통해 마음속 깊은 곳의 후회와 마주하지 않았을지 멋대로 상상해 본다.
암스테르담에서 온 유학생 브리티카는 마리나 건너편에 무려 네 번이나 앉는다. 그녀는 중국인 입양아로서 자신의 뿌리에 대해 항상 의심하며 사랑과 섹스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학업에 열중하며 부모님에게 자신을 증명하려 애쓴다. 하지만 공연에 참여하면서 마침내 자신을 감싸고 있던 불필요한 집착을 벗어던지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후 그녀는 마지막 공연에서 마리나 앞에서 원피스를 벗고 나체를 드러내며 날 것의 자신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정직하고 꾸미지 않은 행동이었다.(p.382) 이제 분홍색 가발도, 컬러렌즈도 벗어버린 그녀는 MoMA(뉴욕현대미술관)에서 만난 뉴욕의 한 푸주한과 제대로 된 사랑을 시작하지 않을지 감히 예상해본다.
이들은 모두 의자에 적어도 한 번 이상 앉았거나, 단 한 번을 앉았어도 오랜 시간 관심 있게 마리나의 공연을 지켜본 사람들이다.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절대 쉽지 않고,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데는 그 정도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의자에 앉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조지아에서 온 미술 선생님 제인은 결국 의자에 앉지 않지만, 뉴욕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매일 마리나의 공연을 보면서 남편의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 공연 날에는 웹캠으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를 시청하면서 에스파냐 순례길을 걷자고 결심하게 된다. 그녀는 걷고 또 걸으면서 남편의 1주기를 애도하고 인생의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너무 시끄럽다. 중요하지 않은 무엇인가에 현혹당해서 정작 중요한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가만히 응시하면서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게 했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녀의 퍼포먼스는 행위자와 참여자의 경계가 없었고, 관객의 참여를 통해 비로소 완성되었다. 그것이 그녀의 예술이었다.
“... 역사적으로 예술가의 역할은 우리를 자극하고 색깔이나 질감이나 내용으로 시선을 끄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유튜브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도시를 내려다보는 곰리의 조각상이나 MoMA의 아브라모비치는 미래의 예술이 어떻게 변화해갈 것인가에 대한 두 가지 방안이다. 어쩌면 예술은 우리에게 사색, 심지어는 정지의 힘을 일깨우는 뭔가로 진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대적 사랑의 박물관> p.201
소설 속 미술비평가 힐라야스 브린이 말했듯, 결국 예술은 ‘생각하게 하는 힘’이 아닐까 싶다. 너무 바빠서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사는 사람들이 소중한 것을 기억하고 찾아내게 하는 것, 나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언어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그 어떤 형태의 것으로든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소중한 것을 생각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