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 : 날 때부터 타고난 정해진 운명. 또는 피할 수 없는 운명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읽다보면 그가 정통 추리라는 장르에서 시작하여 이후에는 범인의 동기에 초점을 맞추면서 동기에 영향을 준 당시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면서 사회파 미스터리, 나아가서는 SF와 판타지를 소재로 글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장르를 넘나든 그였기에 1985년 [방과후]로 문단에 데뷔한 이래로 지금까지 다작(多作)이 가능했을 것이다. [숙명]은 1990년에 발표한 작품인데, 그때까지 써오던 정통 추리에 변화를 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추리로 즐길 수 있는 범죄에 대한 트릭은 물론 등장인물의 복잡한 관계와 그 관계를 관통하는 운명의 끈, 그리고 전문적인 의학 소재 등이 등장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읽어볼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대기업 UR 전산의 사장이었던 우류 나오아키가 병으로 죽은 이후 취임한 스가이 마사키요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스가이 가문의 무덤이 있는 한 묘지에서 죽은 채 발견되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등에 화살이 꽂혀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그 화살은 사실 우류 나오아키가 수집한 골동품 중 하나인 석궁에서 발사된 것이었기에 우류 가문을 중심으로 수사가 시작된다. 원래 UR 전산은 우류가와 스가이가가 번갈아 가면서 대표이사직을 맡아 왔는데, 스가이 마사키요가 취임 이후에 우류 나오아키의 서재를 뒤졌다는 증언과 마사키요가 나오아키의 아들인 우류 아키히코와 모종의 대화를 나눈 점, 그리고 나중에 마사키요가 나오아키의 서재에서 무언가를 가져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수사망은 점점 좁혀든다. 경찰은 우류가의 장남인 아키히코와 차남인 히로마사를 용의자로 생각하며 그들의 당일 행적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부분은 이전까지 히가시노 게이고가 보여준 정통 추리에 부합하는 흐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이 벌어지기 전의 짧은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우류 아키히코와 경찰인 와쿠라 유사쿠의 관계로 인하여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숙명'이라는 소재가 부각된다. 둘은 사실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 유사쿠는 아키히코에 대하여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 자신은 경찰의 아들로서 항상 친구들에게 모범을 보이면서 학업 성적도 우수하여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아키히코는 정반대로 UR 전산의 사장 아들로서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는데 친구들과는 거의 어울리지 않았다. 다만 그 역시 학업 성적은 물론 수영과 같이 모든 부분에서 또래의 아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심지어 유사쿠도 아키히코에게 밀리기 시작하자 유사쿠는 점점 그에 대하여 승부욕을 갖게 된다. 부잣집 도련님이니 당연히 모든 부분에서 유리하겠지만, 유사쿠는 노력으로 그런 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항상 그를 의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라이벌 관계에 아키히코의 아내인 미사코의 등장 역시 '숙명'에 관한 부분을 더욱 부각시킨다. UR 전산에 입사한 이후 당시 전무였던 우류 나오아키의 소개로 그의 아들이었던 아키히코와 만나 결혼을 한 그녀는 남편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 부유한 집안의 후계자이자 의사의 길을 걸으며 의대에서 근무하는 아키히코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만 미사코에게 전혀 속내를 내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미사코에게 수사를 위하여 아키히코의 집을 방문한 유사쿠와의 만남은 충격이었다. 사실 학창 시절에 미사코는 그녀의 아버지가 입원했던 '우에하라 뇌신경외과'라는 벽돌로 된 병원에서 우연히 유사쿠를 만나게 되었고, 이내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유사쿠가 아버지의 병과 가정 형편으로 인하여 두 번이나 의대 진학에 실패하고 어쩔 수 없이 경찰학교에 가게 되면서 둘은 이별하게 된다. 사실 미사코가 아키히코에게 느낄 수 없었던 사랑의 대상이 바로 예전에 사귀었던 유사쿠였기에 그녀 역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보이지 않는 실이 아닐까. 그 실이 아직 존재하고 있어서 지금도 내 인생을 조종하는 게 아닐까.'
미사코는 우류 아키히코와 결혼하기까지의 과정들이 마치 정해진 운명의 실에 의하여 진행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평범한 집안 출신의 그녀가 문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UR전산에 입사를 하고, 이후 우류 가문의 후계자와 만나서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현실 세계에서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숙명'이라고 받아들이는 미사코는 살인 사건을 매개로 하여 옛 애인인 유사쿠와의 만남 역시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유사쿠 또한 학창 시절의 라이벌인 아키히코를 만나고, 또 그의 옛 애인이 아키히코와 결혼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그도 이러한 것들이 모두 운명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학창 시절부터 또래와는 달리 성숙해 보이던 아키히코는 미사코와 유사쿠와는 다른 행보를 보여준다. 그가 "나 이외의 사람이 내 인생을 정하는 건 딱 질색이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야."라고 말하는 부분을 본다면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원하고자 하는 바(의대 진학, 미사코와의 결혼)를 모두 쟁취하는 그의 모습은 주어진 운명 또는 숙명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의 인생을 개척하는 모습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후반부의 결말은 그 역시 처음부터 운명이나 숙명을 아예 믿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의 진실을 먼저 알았기 때문에 그에 따라 미사코와 유사쿠와는 달리 살아왔음이 밝혀지니 그의 행보 또한 숙명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이들이 다시 살인 사건으로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인물들의 관계와 더불어 수사 과정에서 유사쿠에 의하여 점점 밝혀지는 스가이 마사키요에 대한 살인 동기에 관한 부분은 이 작품이 단순히 범죄의 진상 또는 트릭을 밝히는 데 집중하는 정통 추리물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용의자가 다양하기 때문에 여러 살인 동기가 언급되지만, 우류가의 이전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등장하는 뇌에 관한 의학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작품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유사쿠가 어린 시절에 놀러갔던 병원에서 친하게 지낸 히노 사나에의 죽음을 시작으로 회사의 후계자로서 회사가 아닌 의사로의 길을 선택한 우류 아키히코, 나중에 밝혀진 스가이 마사키요가 훔친 서류가 '뇌'에 관한 것, 미사코의 아버지가 일하다가 다친 이후에 일반 병원에서 '우에하라 뇌신경외과'로 옮겨서 치료를 받은 이력 등은 별개의 흐름처럼 보이지만, 미사코의 표현처럼 운명의 '실'로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전기공학과 출신인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후 그의 여러 작품에서 뇌과학은 물론 인간 복제와 같은 유전공학, 성정체성에 관한 과학과 관련된 소재들을 통하여 글을 쓰는데, [숙명]에서 그러한 소재들을 통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뇌와 관련된 다양한 내용들이 언급되는데,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을 절제하는 '뇌량 절제술'이 흥미로웠다. 이러한 절제술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그리고 왜 좌뇌와 우뇌의 연결 부분을 절제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렇게 절제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지 많은 궁금증이 생겨나서 인터넷에서 직접 찾아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수술이라고 한다.) 이 작품에서 뇌와 관련된 내용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웠지만, 범행 동기는 물론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와 문제 의식과도 잘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그래서, 이런 그의 시도가 갈릴레오 시리즈를 비롯하여 과학을 소재로 한 그의 다양한 작품들의 집필에도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추측된다.
이처럼 [숙명]은 살인 사건의 발생과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만이 아닌 읽을 포인트가 다양하다. 심지어 사건의 범인과 그 트릭을 찾는 것보다 살해 동기를 비롯한 이외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가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에서 살인 사건의 범인과 트릭의 실체는 잊혀져 있다가 순식간에 밝혀진다는 느낌이다. 정통 추리에만 초점을 맞췄다면 사건에 대한 진실이 다소 아쉬울 수 있었지만, 그 이외의 이야기가 더 흥미로워서 그다지 실망스럽지 않았다. 수많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고민이 된다면 종합선물과 같이 한 작품에서 그의 다양한 시도를 즐겨 볼 수 있는 [숙명]을 읽어보면 어떨까라고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E-Book 버전으로 먼저 읽고 종이책으로도 소장하고 싶어서 구매한 숙명입니다. 평소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좋아하는 편이라 일부는 종이책으로도 책장에 소장하고 있는데요. 이 책은 히가시노 작품 중에서도 잘 쓰여진 작품 같습니다. 일단 내용 전개에 군더더기가 없고, 숙명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요. 제목을 참 잘 지은 것 같습니다. 엄청난 반전이 있는 책은 아니지만 흡입력 좋은 책인 것 같습니다. 추천!
좋은 기회로 잘 읽었습니다만, 기대했던 것보다는 그냥 그랬습니다. 이쪽 장르에선 워낙 유명하신 작가님이시고 또 유명할 만큼 다작을 하신 작가님이셔서 신작 소식 들리면 꾸준히 구매해서 보곤 하는데 숙명은 그냥 쏘쏘 무난했어요. 나쁘진 않았는데, 뭐랄까 큰 한방이 부족했다고 해야 할까요 ...? 작중의 반전 요소나 느껴지는 분위기 혹은 긴장감 등이 부족하고 좀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작가님의 출간작들을 나름 다양하게 읽은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지금까지 읽었던 작가님 작품들의 순위 중 하위권에 속할 것 같아요. 제 취향에는 좀 아쉬웠던 작품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님의 숙명 입니다.
100퍼센트 페이백 이벤트의 단골?이라고 칭할 수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님의 작품입니다.
여러 가지 추리소설도 있고 그래서 몇가지 작품을 접하게 됐었어요
유명 대기업 사장이 화살로 살해된 충격적인 사건과 그 사건의 범인은..?
일본에서 영화한 작품을 본 적 있었는데 괜찮긴 했지만 이게 뭐지란 생각이 들었던 한 작품이
있었어요 다 보고나서.. 응?스러웠거든요
그래서 다 이런 작품은 아니겠지 싶어서 더 많은 책을 접하고 싶어지더라구요
히가시노 게이고 저/권남희 역의 숙명 리뷰입니다. 100% 페이백 이벤트 기간에 대여한 소설로 사전정보없이 구입한 소설이기도 합니다. 추리 소설을 좋아해서 기대를 하고 봤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딱 중간입니다. 킬링 타임용으로 읽을 만했으나 주변에 추천을 꼭 해야겠다는 느낌은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책표지부터 소년탐정 김전일 분위기를 느꼈는데 내용도 김전일 분위기였습니다.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님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좋았습니다.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