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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찾아올 때 우리를 지나가는 가장 큰 감정은 슬픔이다. <슬픔의 위안>은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후 어느 날 찾아온 슬픔을 가만히 응시하게 되기까지 슬픔에 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낸 에세이로 인상적이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연관된 문학작품이나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슬픔이라는 감정을 내밀하게 전하며 독자의 어깨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이 책은 '1장 슬픔의 무게, 2장 정직한 대면, 3장 아홉 가지 위안, 4장 슬픔의 흔적'이라는 4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슬픔에는 절대적인 것이 없다. 쉽게 견딜 비법도 없고 빠져나갈 구멍도 많지 않다. 사별의 슬픔처럼 개인적인 경험을 이해하고 나면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사람과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슬픔을 이해하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책은 그 길을 가는 동안 동행해줄 뿐이다. 슬픔은 아주 개인적인 경험인 만큼, 책을 읽다 보면 분명 당신의 독특한 상황에 맞는 길을 찾아낼 것이다. 부디 그러길 바란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존재 이유다."
저자는 사랑하는 이가 죽은 뒤 잃게 되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소소하고 평범한 것들이라고 말한다. 가장 익숙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우리 삶이라는 피륙 속에 가장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삶을 사소한 것들이며, 슬픔은 그 사소한 것들을 비틀어서 떼어내 버린다고 이야기한다. 죽음은 사소한 것들을 베어내 버리고 난 뒤 그 자리를 공허감 대신 인식 가능한 고통의 무게로 채운다. 이 책에서 슬픔은 저항할 수 없는 고통의 실체라는 저자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특히, 저자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존 왕>에서 콘스탄스라는 여인이 어린 아들을 잃은 뒤 부재라는 무거운 실재에 대한 생생함 묘사하며 지극한 슬픔을 표현한 글을 소개하여 눈길을 끈다. 이 희곡은 셰익스피어 자신이 어린 외아들 햄릿을 잃은 직후에 쓴 것이다.
"슬픔은 떠나간 아이의 빈방을 채우고,
아이의 침대에 눕고, 나와 함께 서성거리고,
아이의 귀여운 표정을 짓고,
아이가 하던 말을 흉내 내어 말하고,
아이의 사랑스럽던 몸 구석구석을 떠올려주고,
아이의 형상이 되어 주인 잃은 아이의 옷을 걸치네."
저자는 시몬 드 보부아르가 <편안한 죽음>에서 다음과 같이 어머니의 마지막 나날을 회고하며 쓴 글을 이야기한다. "물건의 힘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그 속에 생이 응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의 그 어느 순간보다 바로 이 순간 더욱 분명하게, 탁자 위에 놓인 물건들은 버림받고 무용한 존재가 되어 쓰레기가 되거나 새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저자는 보부라으는 여동생이 얼마 전 고인이 된 어머니의 물건 하나에 아주 강렬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고 나서 이 같은 통찰에 이르었고, 그 물건은 단순한 검은 장식용 리본에 불과했지만 보부아르의 여동생은 그 리본을 보고 감정이 북받혀오른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아무리 위대한 생일지라도 마지막에 가서는 몇 가지 물품으로만 남을지 모른다는 인식만이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한때 사랑하는 사람의 소유였던 물건은 놓아버리기 쉽지 않지만 떠나보내야 할 때가 찾아온다.
"한 사람의 온 생애가 그렇게 쉽게 마분지 상자나 큰 가방에 담긴다는 것에 충격을 받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사랑하는 누군가가 트렁크 하나로, 혹은 트럭 한 대 분량의 잡동사니로 쪼그라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당신은 자문할지 모른다. "이게 다라고? 그 사람의 전부가 고작 이거라고?""
저자는 모루는 대장장이가 쇠를 단련할 때 쓰는 도구로,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항상 그들을 후려치는 모루가 있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지 서너 달이 지나 그럭저럭 지내는 것 같을 때, 예상치 못한 계기로 촉발된 감정에 휘달려 만신창이가 된다. 특히, 저자는 이런 순간은 스스로 아주 잘 견디고 있다고 자만할 때 느닷없이 찾아와서는 당신을 우스꽝스러운 꼴로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무엇 때문에 모루가 떨어질지는 절대 알 수 없으며, 작가 콜레트가 이런 상황을 섬세하게 그린 글을 소개하여 인상적이다. 하늘은 당신이 정확히 언제 슬픔에 빠지는지, 정확히 언제 떨어지는 모루를 피하며 살아가는지는 모른다. 저자는 다른 사람들 역시 똑같은 일을 겪을 것이고, 그래서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위로가 될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결코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참 궁금하다. 슬픔으로 가장 고통스러울 때 어떻게 눈물을 보이지 않고 꿋꿋할 수 있는지.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창문 뒤에서 다정하게 손짓을 하거나, 어제만 해도 봉오리에 지나지 않던 꽃이 어느새 환하게 피어 있는 것을 보거나, 서랍에서 편지 한 통이 떨어진다. ...... 그러면 모든 것이 무어져버린다."
저자는 끔찍한 일을 당하면 처음에는 슬픔에 짓눌릴 수 있지만 슬픔은 이미 일어난 나쁜 일 때문에만 느끼는 감정을 아니라고 말한다. 슬픔은 일어나지 않을 모든 좋은 일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기도 하다. 저자는 당신은 고인이 된 사랑하던 이와 삶의 가장 멋진 순간에 함께하지 못하는 모든 행사를 깨닫기 시작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아이의 탄생이나 졸업이나 결혼식이 모두 그런 경우다.
저자는 슬픔은 아무 예고도 없이, 한 순간에 찾아온다고 말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변한다. 슬픔이 찾아오는 순간 우리는 늘 깜짝 놀란다. 모든 사별의 슬픔은 끔찍한 순간과 함께 시작된다. 저자는 이 순간의 온전한 의미는 참으로 가슴 아프고 남과 나눌 수 없을 만큼 깊고 고독하다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저자는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늘 가벼운 패닉 상태를 느낄 것이라고 말한다. 슬픔은 언제라도 뭔가 나쁜 일이 다시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한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신이 끝마무리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저자는 사랑하는 이를 보내고 슬퍼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감정을 안고 살아간다고 이야기한다.
"끔찍한 순간에는 정직해지기가 어렵다. 정직해진다고 해서 이미 일어난 슬픔과 비극이 완화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 패닉은 줄여준다. 순간의 무섭고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용기를 "강요된 품위"라고 정의한 것은 유명하다. 그러나 슬픔에 관해서라면 아마도 시인 필립 라킨의 정의가 더 적절할 듯하다. 그에게 용기의 의미는 사람들을 두렵게 하지 않는 것이다."
저자는 죽음과 슬픔은 미래와 젊음, 건강과 활력, 즐거움이라는 당당한 미국적 미덕과 완전히 대립된다고 말한다. 죽어가는 사람과 죽은 사람 때문에 슬퍼하는 이는 패배자다. 저자는 상실을 비정상적으로 보는 문화적 특성 때문에 상실을 겪는 사람은 자신을 어딘가 문제 있고 사회적으로 용인받을 수 없는 예외적인 존재로 느낀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저자는 슬픔과 결부된 이상한 수치심, 사랑하는 이를 잃어 모욕을 당한다는 수치심에서 해방되길 바란다고 조언한다.
저자는 고인에 대한 존경의 글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고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솔직하게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수수하지만 글 속의 고인이 선명하게 그려져야 한다. 저자는 시간이 지나도 빛을 잃지 않을 만들은 감상적이지 않고 진실하다고 이야기한다. 고인에 대한 글은 장엄하게 쓰려고 하는 대신 의미를 잘 전달하는 수수한 말 한마디와 정곡을 찌르는 묘사를 찾는데 힘쓰는 게 낫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슬픔은 신처럼, 때로는 신보다 더 강한 존재로 느껴질 만큼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유머는 슬픔이라는 거인을 말뚝 한두 개로 쪼그라뜨린 뒤 그 힘을 빼앗고, 파이로 내리쳐서 음울한 위엄을 악화시키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슬픔의 폭풍우 한가운데에 있을 때 반드시 떠올려야 하는 것은 다시 유머를 즐기게 되리라는 것, 삶은 계속되리라는 것, 시계는 다시 똑딱똑딱 가고 별들이 다시 보고 싶어지리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슬퍼하는 사람이 참 하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지만, 순수한 휴식은 슬픔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비탄에 잠긴 이들은 자기 자신을 가장 혹독하게 감시하는 감독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픔에 잠겨 있다면, 휴식이 주는 치유의 첫 단계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자연은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섭리 속에 숨어 있는 오래된 지혜를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위로하며, 사랑하는 이를 잃고 비통해하는 사람은 자연이 좋은 것이라는 가르침을 다시 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자연은 슬픔이 일으키는 문화의 위협을 겪고 난 후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회복시키는 데 필요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최상의 상태에 있는 자연을 접하면 우리는 자연이 얼마나 선한지, 얼마나 공정하고 아름다우며 신성한 경이로움인지 이해하게 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슬픔이라는 역경에는 좀처럼 달콤한 것이 없지만, 우리는 자연 덕분에 비록 슬픔은 좋지 않더라도 삶은 좋은 것임을 깨닫는다고 이야기한다.
"자연은 당신이나 당신의 슬픔, 당신의 삶에 아무 관심이 없다. 도우려고 하거나 옳은 말을 해주거나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지도 않는다. 자연은 둔감하고 무관심하다. 자연 자체 그리고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온갖 자연현상과 비교하면 당신은 하찮아 보인다. 이런 기분을 느껴보려고 그랜드캐니언에 갈 필요는 없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우를 보고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자연과 접해보면 생명이라는 더 거대한 관성 안에서 우리의 역할이 보잘것없음을 깨닫게 되지만 오히려 그런 깨달음이 진실한 위안과 평온함을 준다. 자연은 우리에게 책임질 일이 없음을, 그리고 그것이 좋은 일임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평범한 삶에서 너무도 많은 진실을 외면한다. 슬픔이 주는 몇 안 되는 선물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슬픔을 겪고 나서 진실을 돌아보게 된다는 점이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더한 진실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이 누구인지, 사람들이 사랑해주는지 아닌지, 미래의 모습은 어떨지 같은 것들은 얼마든지 거짓으로 말할 수 있다. 교묘하게 속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사별의 슬픔은 속일 수 없다. 사랑하는 이는 영원히 가버렸으며, 그것으로 끝이다.
슬픔이 진실의 어두운 면이라면 자연은 진실의 밝은 면이다. 어떤 식으로든 자연과 접촉하면 그 이면에 지혜롭고 상서로운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게 된다."
저자는 슬픔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면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주는 위안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날그날의 소소한 활동과 기분, 상호작용에서 크나큰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이처럼 저자는 흔히 진정한 회복이 시작되는 순간은 평범한 일에 빠져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때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슬픔은 자기 이야기를 바꾸고,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변화시키는데, 흔히 그 변화는 도발적이고 혁신적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슬픔 덕분에 누릴 수 있는 심리적 특전은 슬픔이 애매모호함을 이해하게 해주고 삶의 진실이 절대 하나가 아니라 적어도 둘, 보통은 그 이상임을 일깨운다고 이야기한다. 슬픔은 자기 이야기만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삶 자제에 대한 이야기도 변화시킨다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사별을 겪고 비탄에 젖은 모든 이들은 틀림없이 "당신이 없는 난 누구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을 하면서 자기 이야기는 되살아난다. 슬픔은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자신이 사랑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하며, 자신이 사랑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또 그 사람과 함께한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그 사람 없이 살아야 하는 자기 삶에 대한 이야기다. 슬픔은 자기가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그러나 공저자가 있다. 사랑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해방된 감정들이 계속 제 목소리를 내려고 할 테니 말이다. 이 사실에 익숙해지라."
<슬픔의 위안>은 소중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상실이 남긴 슬픔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따뜻한 위안을 전하는 책으로 깊은 여운을 남긴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슬픔이 지나가는 과정을 경험하는 주변인들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배움을 얻을 수 있어 인상적이다.
슬픔의 위안
론 마라스코, 브라이언 셔프/김설인
현암사/2019.12.5.
sanbaram
사람이 살다보면 누구나 슬픔과 마주하는 때가 있게 된다. 부모형제나 가까운 사람들과 사별하게 되는 때가 반드시 온다. 그럴 때 사람들은 저마다 슬픔을 느끼게 되지만 그 강도나 이겨내는 방법은 제각각 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슬픔의 위안>은 슬픔을 이겨내는 것에 대해 강의한 내용과 많은 사례들을 애통의 과정인 네 개의 기본 궤적을 각 장으로 구성하여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책의 목적이 ‘바로 당신이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슬픔의 위안>은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에서 시작되어 살아 있는 이의 삶으로 돌아오는 슬픔의 궤적을 찬찬히 묘사한다. 저자 론 마라스코는 연출가이자 작가로 활용하며 미국 로스앤젤레스 로욜라 메리마운트 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및 예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영화와 연극, 소설, 역사의 장면들을 ‘슬픔’이란 주제를 연구하는 한 방법으로 사용하여 강의를 해왔다. 저서로 <그곳에 있었던 개>, <배우에게 전하는 편지>가 있다. 공저자 브라이언 셔프는 미국 애리조나주 출신의 작가로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공동저자인 론 마라스코와 함께 영화와 드라마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여 하였다.
<슬픔의 위안>에 담긴 모든 이야기와 정보의 존재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바로 당신이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전체가 네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애통의 기본 궤적이라고 생각한 순서다. 첫째, 슬픔의 무게에서는 슬픔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된다. 둘째, 정직한 대면에서 슬픔은 감정이 격화된 상태다. 셋째, 아홉 가지 위안에서는 슬픔에 빠진 사람이 위안을 찾으려 하는 아홉 가지를 생각해본다. 넷째, 슬픔의 흔적에선 슬픔이란 감정은 그 나름의 의지가 있어서 독자들 내면의 깊이 모를 곳에서 솟아나오는 것에 대해 알아본다. <슬픔의 위안>은 스물아홉 가지 의미의 틀에 두 저자의 통찰을 담아 사별의 슬픔을 입체적으로 형상하화고 인문적 사색과 성찰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저자들은 이를 통해 ‘슬픔에 대한 이해’를 독자와 나누고자 했다. 이렇게 살펴보는 모든 것이 독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중 하나 자기와 비슷한 상황을 찾아내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이 책의 존재 이유라고 한다. “사랑하는 이가 죽은 뒤 잃게 되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떠올릴 수 있는 한, 가장 소소하고 평범한 것들이다. 가장 익숙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우리 삶이라는 피륙 속에 가장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p.34)”라고 말하며 슬픔은 슬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슬픔을 이야기하라.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슬픔을 말하라. 빈 뒤뜰이나 샤워 커튼에 대고 슬픔을 이야기하라. 혼자 있는 차 안에서, 숲 속을 걸으면서 슬픔을 큰 소리로 외쳐라.(p.89)” 이렇게 하는 것이 슬픔의 토로다. 그러다 보면 슬픔에 대해 위안이 된다고 한다. 또한 순수한 휴식은 슬픔의 고통을 치료해 주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 중 하나다. 그러나 슬퍼하는 사람이 참 하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도 휴식이다. 자연은 슬픔이 일으키는 문화의 위협을 겪고 난 후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회복시키는 데 필요한 하나의 수단이다. 살다 보면 불편할 정도로 부자연스러운 여러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난생처음 뼈저린 슬픔을 경험하고 나면 정원에서 손에 흙을 묻히는 것이, 말 그대로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왜 위안이 되는지 깨닫게 된다. 함께 있기 편한 진실한 사람을 묘사할 때 “흙냄새 나는”이라는 말을 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비탄에 빠져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앞둔 사람 역시 섹스를 통해서든 다른 형태의 탐닉을 통해서든 생명의 힘과 재결합하고자 하는 욕망을 느낄 것이다.(p.191)” 죽어가는 사람은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시간에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에 관심을 보이고 병적일 만큼 집착하기도 한다. 오늘날은 남성이 야한 농담을 하면 성범죄로, 목소리를 높이면 공격으로, 여자 친구가 열변을 토하는데 딴 생각을 하면 용서 못할 잘못으로 여기는 시대다. 남자들은 모든 광고주와 대중에게 관계자들에게 너무 자신감을 잃어서 45킬로그램 이하의 체중에 마릴린 먼로의 음색, 수술로 도톰해진 입술에 머리는 텅 빈 돈 많은 여성만이 유일한 이상형이라고 똑똑히 보여주는 것으로 복수를 한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엄청난 충격에 빠진 많은 사람이 슬기롭지 못한 방법으로 정의를 추구한다. 정의란 것은 얼마나 강렬한지,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참혹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의 마음까지 움직일 수 있다.(p.238)” 오로지 정의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강렬한 모든 것은 동시에 위험할 수도 있다. 이것은 잘못된 방향으로 정의에 투신하는 개혁가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슬픔에 빠진 상태에서는 누구든 삐딱한 마음을 품기도 하고, 바보 같은 행동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해서 슬퍼하는 이들이 느끼는 뼈저린 소외감과 두려움을 덜어주고자 했다. 사별의 슬픔은 지극히 사적인 경험이지만, 동시에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자 불가피한 인간 경험이라고 말이다. 마음의 병으로 인한 고립 등 한 사람의 생을 타격하는 모든 고통과 슬픔의 근원은, 사랑의 상실과 결핍과 부재다. 인간은 매우 의존적인 존재라서 타인의 사소한 언행이나 부주의에도 쉽게 마음이 베인다. 한마디로 인간은 잠재적 슬픔에 항시 노출돼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제 당신이 잃어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 영혼 조각을 남기고 떠났는지 헤아려보라. 아마도 많이 남겼을 것이다.(p.309)” 그 사람 없이 살아간다는 의미는 이 조각들이 모여 새로 태어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된다고 말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슬픔을 갖고 있음을 알며, 나름대로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은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감정이지만 동시에 가장 사적이고 폐쇄된 감정이기도 하다. 타인의 슬픔이나 책과 영화를 통해 슬픔의 감정을 수없이 간접 경험하더라도 정작 자신 앞에 닥치는 슬픔은 극심한 고통과 생소함으로 찾아든다. 특히 사랑하는 이를 죽음으로 잃은 후의 슬픔은 당사자나 주변인들을 속수무책으로 만든다. 슬픔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음울하고 무거우며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 감정에 타인을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차라리 침묵을 지키고, 혼자만의 섬에 틀어박힌다. 이 책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와 충격으로 개인을 덮치는데도 혼자 조용히 해결해야 하는 것이 미덕이 되어온 감정, 남들 앞에 드러내거나 함께 나누는 것이 금기시되어 온 감정, 한시바삐 극복해야 하는 감정으로 처리되었던 슬픔을 인간의 근원적인 보편 감정으로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한다.
최근에 슬픈 일들이 많이 있어, 이 슬픔을 어떻게 해결하는 게 좋을지에 대해
한참을 고민하다가 슬픔에관련한 책을 사봐요.
읽고나면 저도 제 슬픔을 잘 정리할 수 있겠죠.
이 책에서 조금 아슬아슬한 부분이 있다면 근래들어 많은 현대인들이 반려견이나 반려묘 혹은 반려새 반려오리 심지어는 반려로봇청소기까지. 하여튼 남다른 유대감을 형성해서 그 반려무엇들과의 이별에서 사람과의 이별 못지 않은 상실감을 느끼는 시대가 도래했기때문에, 저자의 문장 중에서, 그런 반려무엇들과의 이별을
사람과의 이별보다는 조금 축소시킨 발언이 있어서. 근데 저는 반려묘는 길러본적이 있기는 하나 저도 매우 사랑했고 고양이에 환장한 사람이긴한데 제 개인적인 취향으로 동물권운동가나 혹은 동물을 인간비슷하게 취급하는 것을 안좋아하기때문에. 근데 슬픔은 존중해야하니까. 뭐 그렇다고 치고.
뒷 부분에 남성과 여성의 애도과정의 차이에 대한 부분도 조금 아슬아슬하게 느껴지기는 했습니다만, 그럭저럭 납득이 아예 안가지는 않았고. 성별적 경향성에 관한 문제는 저도 답이 내려지지 않아서. 그런데 한쪽으로 지나치게 편중된 느낌은 아니었어서 만족스럽게 읽었습니다.
일단 카테고리가 깔끔하게. 주제의식에 맞게 전개가 산만하지 않아서 좋았구요. cs.루이스가 헤아려본 슬픔 이라는 작품에서 부인과 사별한 경험에 대해 쓴 에세이가 자주 인용되는데, 저도 그책 한 십년전에 봤거든여.
덕분에 간만에 그책도 다시 봤네여.
글을 보는 내내 느낀것이.
우울증을 비롯해서 많은 "슬픔" 의 증상을 가진 기분장애들도 이런 애도의 과정과 매우 닮아있구나.
하는 생각. 참 힘들겠다. 하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