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2월 15일
제목은 많이 들어봤다. 그런데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을 이해하고 완독한 사람은 주변에서 거의 볼 수 없었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세기의 명저라고 하는데.... 최근의 한국 사회에서(특정의 통치자가 가장 많이 언급해서인지) '자유'라는 단어만큼 많이 들리는 때는 없었던 것 같다. 같은 '자유'라는 단어가 이렇게도 상황에 따라서 자유스럽게 해석되는 경우도 처음인 것 같다. 인간이 참다운 자유를 갈구하지만 결국 권위에 의존해 가는 면들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내가 이 책에 대해 감히 뭐라 평하나. 다만 그래도 전문가의 번역의 유려한 면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이해해 가면서 읽기란 그다지 쉬운 책은 아니다. 완독에 인내를 요하나 그 여운은 진할 것으로 생각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궁극적으로 자유를 원하기 마련인데,
그런 자유를 견디지 못하고 자유로 부터 도피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적인 본성이라는 비판적 분석내용이 흥미롭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1941년에 태어난 독일계 미국인 ‘에리히 프롬 Erich Seligmann Fromm 이라는
철학자입니다.
역사적으로 개체적 자유가 결여되어지고 종교적인 사회체계 안에서의 역할만 강조되어진
중세시대에 사회적 붕괴를 경험하면서 인간의 ‘불안’ 이라는 심리적인 상태는 흥미롭게도 아직도
현대인들에게도 지속이 되어지고 있습니다.
근대사회와 대비하여 중세를 특징짓는 것은
중세에는 모든 사람들이 사회 체계안에서 자신의 역할에 묶여 있었다.
책의 서문에서 “불안한 인간은 온갖 부류의 독재자들에게 자신의 자유를 넘겨주거나,
스스로 기계의 작은 톱니가 되어 호의호식 하면서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자동인형 같은 인간이 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하는
저자의 이야기처럼 인간은 자유를 얻게 될수록 오히려 어딘가 구속이 되거나 의지를 하면서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경향을 나타낸다는 재미있는 심리적인 상태를 분석한 내용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유를 얻은 인간은 헤엄치지 않으면 가라 앉는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런 불안에서 벗어나는 2가지 길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적극적으로 자유를 즐기는 것’ 중에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기 마련입니다.
결국 자유를 외면하거나 회피하면서 또 다른 절대적인 권력이나 힘에 종속이 되려는 현상들이
발생을 하게 됩니다.
살아오면서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진학, 직장, 결혼, 승진, 노후’ 등 인생 전반에 걸쳐서 모든 단계에서 우리는 항상 원인과 답이 명확하지 않은 끝없는 ‘불안감’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은 모두 이런 불안들을 만들고 부추기는 ‘정치적이나 마케팅 상황 들’ 속에
항상 그대로 노출이 되어 지거나 스스로 노출을 하는 복합적인 사회속에서 살고 있으며
돌아보면 스스로 만들어 가는 ‘안정적이고 평화스러운 마음의 상태’라는 것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던 기억들이 더 많았습니다.
이런 반복적인 불안감에 대한 생각들을 항상 가지고 있을 때, 오랜만에 ‘자유로 부터의 도피’라는
고전 명작을 다시한번 만나보는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답니다.
책의 내용이 다소 어려운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한 3번 이상을
천천히 읽어보면 더 좋을 것 같아서 올해 안에 다시한번 읽어 볼 생각입니다.
모든 내용들이 유익하여 기억하고 싶은 많은 내용들을 옮겨 보았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중대한 어려움은 인간의 지적 능력의 발전이 감정적인 발달을 훨씬 앞지른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두뇌는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대다수 사람들의 심장은 아직도 석기시대에 있다.
자유는 근대인들에게 독립성과 합리성을 가져다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개인을 고립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개인을 불안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우리 자유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은 해외에 있는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태도와 우리 자신의 제도속에 있는 권위와 규율, 획일성, 외국 지도자에 대한
의존성 등 민주주위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인간행동을 결정하는 데는 여러가지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힘이 존재한다.
인간의 본성에서 반드시 충족이 되어야 하는 것은 생리적인 욕구만이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강력한 또 다른 부분도 있는데, 육체적 과정이 아니라 인간의 생활양식과 습관의 본질에
뿌리를 두고 있는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구, 고독을 피하려는 욕구이다.
개인이 외부세계에 자신을 고정시키는 탯줄을 아직 완전히 절단하지 않은 정도에 따라
그가 누리는 자유의 양이 정해진다. 하지만, 와부와 연결하는 이런 끈은 그에게 안도감과 소속감,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복종은 고독과 불안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고, 다른 방법은 인간 및 자연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본능이 행동을 결정하지 않을 정도가 한계점을 넘어설 때,
자연에 대한 적응이 강압적인 성격을 잃을 때,
유전적으로 주어진 메커니즘이 더 이상 행동방식을 결정하지 않을 때, 인간존재가 시작이 된다.
자기 행동이 본능적으로 결정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근대사회와 대비하여 중세를 특징짓는 것은 개체적 자유의 결여다.
중세에는 모든 사람들이 사회 체계안에서 자신의 역할에 묶여 있었다.
사회적 교류가 늘어나면서 계급차이가 무시되기 시작하였으며, 가문과 출신보다는 재산이 더 중요해졌다.
인생의 의미가 의심스러워지고, 타인이나 자신과의 관계가 안전을 제공해주지 않으면,
명성이 의심을 침묵시키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
자본주의는 협동조합 체계의 통제에서 인간을 해방시켰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자주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인간은 자기 운명에 주인이 되었고, 위험도 이익도 모두 그의 것이 되었다.
돈은 혈통이나 계급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이 입증이 되었다.
양심은 인간이 자신의 것이라는 믿는 소망이나 목표에 따라 행동하도록 몰아 세우지만,
사실 그 소망이나 목표는 외부의 사회적 요구다 내면화된 것이다.
인간은 더 자립적이고 독립적이고 비판적이 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 고립되고 고독해지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이다.
탐욕은 바닥이 없는 구멍이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끝없이 노력하지만
끝내 만족에 도달하지 못하고 기진맥진하게 된다.
근대의 행동동기인 자아는 사회적인 자아이다.
남들이 그를 원하면 그는 쓸모는 인간이고, 인기가 없으면 쓸모 없는 인간이 된다.
자아를 뒷받침하는 것은 명성과 권력이다.
부분적으로는 재산 소유의 결과이고, 부분적으로는 경쟁에서 거둔 성공의 결과이다.
추상적인 고객은 중요하지만, 구체적인 고객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근대적인 광고는 대부분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나 감정에 호소를 한다.
사회에 잘 적응하기 위하여 자아를 포기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진정한 개성과 자연스러움은 모두 사라졌다.
권력욕은 사람의 불안전함과 열등함에서 생겨나는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반작용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개인은 자신의 자아를 불들어맬 수 있는 사람이나 사물을 찾는다.
성적 충동과 자기보전 충동이 인간행동의 2가지 기본적인 동기이다.
우리가 내리는 결정의 대부분은 사실 우라 자신의 결정이 아니라 외부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싶을 때도 있고, 어쩔 수 없이 갈 때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아이는 훨씬 행복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무감의 압박이 너무 크기 때문에 아이는 남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바를
그 자신이 원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사상을 표현할 권리는 우리 자신이 사상을 가질 수 있을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외적 권위로부터 부여받은 자유는 우리의 내적 심리가 자신의 개성을 확립할 수 있는 상태인 경우에만
지속적인 성과를 낸다.
감정없이 생각하고 감정없이 생활하는 것이 하나의 이상적인 태도가 되어 버렸다.
감정적인 것이 불안정 하거나 정신적으로 불균형 적인 것으로 인식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만, 그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근대인의 유일한 문제인 듯하다.
사람들은 자기가 추구하는 목표가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어떤 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소망,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어느 정도까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우리에게 주입된 것인지를 알아차리기는 어렵다.
근대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 교회의 권위는 국가의 권위로 교체되었고,
국가의 권위는 다시 양심이 권위로 교체되었고
오늘날에는 양심의 권위가 다시 순응의 도구인 상식과 여론이라는 익명의 권위로 교체되었다.
우리는 자기의지를 가진 개인이라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는 자동인형이 되었다.
자발적으로 행동을 하지 못하거나 진정으로 느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그 결과 타인과 자신에게 가짜자아를 보여줄 수밖에 없거나 하는 것은 열등감이나 무력감의 근원이다.
우리의 민주주의 원칙은 아무도 굶주리면 안 되고, 사회는 모든 구성원에게 책임을 져야 하며,
실업이나 기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고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잃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위태롭게 해서도 안 된다.
인간은 오늘날 가난에 시달리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가 큰 기계에의 톱니
나 자동인형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 삶이 공허해지고 무의미 해졌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활동하고 싶은 강력한 욕구가 고독과 불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에리히 프롬 작가님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리뷰입니다
사랑의 기술이 굉장히 좋았어서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를 구매했었는데 그 책에서 완전히 반해버렷거든요 그래서 에리히 프롬의 책을 도장깨기 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책도 구매햇는데 이건 쉽게 읽히는 느낌은 아니네요 역시나 내용은 너무너무 좋았는데 다른 책들에 비해서 살짝 어려웠어요 그래도 곱씹으면서 천천히 읽어나가니까 역시나 좋네요 ㅠㅠ
정신분석학, 사회학으로 유명한 에리히 프롬의 저서. 1941년에 부랴부랴 준비하여 출간을 서둘렀다고 하는데 부록을 읽으며 거의 1세기를 앞서나간 학자의 판단이 매우 옳았음을 느꼈다. 우리의 뇌와 신체는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는데 지나친 경제적 발전과 식품의 과잉으로 과부하가 걸린다. 기계가 대체한 신체의 자유는 정신적 욕구와 불균형을 이루며 불안과 고독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마인드헌터의 범죄자들이 무더기로 출현하는 것이 결코 근대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에리히 프롬의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저자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키워 자발적인 창의성과 적극적인 참여를 권장한다. 또한 사회경제적 요건, 이데올로기, 사회적 성격이라는 역사의 변화 요소를 균형있게 강조하며 긍정적 순환의 피드백이 이루어져야 자유의 부정적인 요소를 완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교육은 필수적인 것이다.
교육의 사회적 기능은 무엇보다 개인이 사회에서 필요한 위치에서 제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자질을 갖추게 함이라고 설명한다. 현재 한국의 교육제도와 부모의 사회정신 대변자 역할이 망가진 것은 무엇보다 위의 세가지 요소인 사회경제적 발달, 이데올로기, 사회적 성격에 문제가 있음이 명백하다. 생활 전반에 분노를 폭발시키고 독점과 강력한 명령에 사이다라는 반응은 나치당이 힘을 얻게되었던 독일 시대상황의 모습과 닮아 있는 것 같다.
좌절감을 주는 전체 상황과 이것이 반복되면서 쌓이는 무력감, 비상식적인 행동들은 민주주의 사회를 한 부분씩 파괴하여 무너뜨릴 수 있다.
개인의 개체화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고독과 고립감을 피하기 위해 사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취미와 공동체 활동으로 정신적인 욕구 충족으로 안도감과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바람직한 듯 하다.
에리히 프롬의 가장 유명한 책은 사랑의 기술 혹은 소유냐 존재냐가 아닐까 싶긴한데,
'부의 인문학' 책에서 이 책에 대한 짧은 서술을 보고 혹해서 구매해 읽었다.
중반분에는 읽는게 좀 어려웠는데 초반, 후반은 무척이나 재밌게 읽었다.
이 책은 '자유란 근대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근대인은 왜 그리고 어떻게 자유로부터 도피하려하는가'가 주제라고 명확히 알려주고 시작한다.
먼저 자유란 무엇일까?
에리히프롬은 자유를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외적 권위로 부터 독립하는 것. 하지만 동시에 고립되어 인간 스스로를 하찮고 무력한 존재로 느끼는 것이라는 설명이 이 책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근대 이후 인간은 자유라는 정의 justice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왔다. 이 자유는 외부의 속박을 끊어내어 (원초적 유대를 포기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얻게 된 자유는 두려운 것이어서 인간은 자유로 부터 도피하고 싶어진다. (루터는 교회로 부터 자유를 찾았지만 교회보다 더욱 강한 권위, 신에게 인간의 완전한 복종을 주장한다)
인간은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고자하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천박한 행동양식과 관계를 맺더라도 혼자인 것 보다는 훨씬 낫다)
하지만 자유로부터 도피한 새로운 복종은 안정감을 얻기도 하지만 결코 원초적 유대에서 얻던 것과는 다르며, 댓가로 자아의 상실을 지불한다,
현대인은 자동인형처럼 타인이 기대하는 '나'(당신이 나에게 바라는 그대로의 것)이 되고, 결국 개인은 타인의 목적을 위한 도구가 된다.
사람을 상품을 팔 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팔고, 자신이 상품이라고 느낀다. 육체노동자는 자신의 육체적 에너지를 팔고, 상인과 의사와 사무원은 '인격'을 판다. (중략) 이 인격은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어야 하지만, 그 밖에도 그 소유자는 수 많은 요구를 충족시켜야한다. (중략) 어떤 사람이 제공하는 자질들이 아무 쓸모도 없으면 그는 쓸모없는 사람이다. 설령 사용 가치를 지니고 있더라도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상품은 무가치한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자신감이나 자아 의식은 남들이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려주는 표시일 뿐이다. (중략) 남들이 그를 원하면 그는 쓸모 있는 인간이고, 인기가 없으면 쓸모가 없는 인간이다. 자기 평가가 이처럼 '인격'의 성공에 달려 있는 것이야말로 인기가 근대인에게 그토록 엄청난 중요성을 갖는 이유이다.
-책의 약 38% 부분의 구절
때문에 인간은 자발적인 삶을 살아야 자아를 회복하고 진정한 자유를 얻고 행복해진다는 게 이 책의 결론이다.
자발적 활동에서 생겨나는 자질들만이 자아에 힘을주고, 그리하여 자앙의 본래 모습의 토대를 이룬다.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거나, 진정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그 결과 타인과 자신에게 가짜 자아를 보여줄 수 밖에 없거나 하는 것은 열등감이나 무력감의 근원이다.
-책의 약 82%구절
공감가는 구절도 참 많은 책이었지만 결론은 내게 시원한 해답은 되어주지 못했다.
그건 아마 내 자신의 문제일 건데, 내가 무엇을 할 때 진정 행복한지 모르겠다.
이건 누군가가 알려줄 수 없는 문제라 안타까울 뿐
재밌게 읽은 책이어서 에리히 프롬의 다른 책도 추가로 구매했다.
자아, 자발적인 삶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고 그런 삶을 살 기회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