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종에 대하여>는 몽테뉴 수상록에 있는 일부분을 가져온 것이다. 제목 그대로 식인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몽테뉴가 살던 16세기에는 대항해가 시작되면서 인류학적인 연구혹은 보고들이 이제 막 들어오고 시행되기 시작했을 때다. 몽테뉴는 지적 겸손함의 관점이라고나 할까. 타인의 삶을 그저 미개로 판단하는 것을 보류하고, 다각도에서 인간의 삶을 바라보라 말한다. 당대에 굉장히 진보적인 시각이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 교수님께서 콜럼버스 발표를 맡기셔서 잠도 못 자고 조사한 적이 있었다. 핵심(?)만 말하자면 콜럼버스의 항해는 당시 종교적, 정치적, 지적 호기심, 콜럼버스 개인의 출세욕, 물질욕 등의 동력으로 행해진 매우 복잡하고 시대상을 잘 드러낸 현상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는 '타자'와의 이야기, 단순히 동방견문록의 호기심 세계의 오리엔탈리즘적 타자가 아닌, 기술문명이 완전히 차이 나는, 어찌 보면 죄책감이 들 정도로 순진한 ‘이용 가능한 타자'와의 만남이 대두되었다.
그리고 올해 초에 아바타 물의 길을 봤다. 누군가는 이 영화에서 생물학과 따듯한 가족애와 착취-억압구조 같은 사회구조를 봤겠지만 나는 타자의 삶, 원시인류 혹은 인디오로 묘사되는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는 그들만의 문화를 보았다.
고도로 발달된 과학사회에서조차 극복하지 못한 인류의 탐욕, 또 그것과 겹쳐지는 대항해시대의 거대한 살육. 제임스 캐머런은 자연을 신성화하며 인간에게 철퇴를 내린다. 에리히 프롬이 자신에 대한 태도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의 조건이라 말했다면, 우리가 타자를 어떻게 대하느냐 또한 우리를 규정한다.
누구는 타자라는 주제로 욕망이론을 만들고 몽테뉴는 지적 겸손함으로 타자를 대하지만, 결국 타인과 소통해야 한다는, 호모 사피엔스의 필연적 특징의 한계 속에서 더 나은 삶을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나름대로 타자에 대해 사고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새로운 것, 혹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마주쳤을 때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가? 어떤 사고를 하게 되는가?
가끔 생물학이나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면 사고의 전환이 일어난다. 나는 원시인처럼 사고해야 하고, 문어처럼 뇌보단 감각으로 사고해야 한다. 대게 '주체' 혹은 '인간'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결정한다. 그것이 실로 다양한 세계를 이해하는, 다양한 관점을 배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를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하는가, 그럼으로써 타자를 어떻게 대할 수 있는가. 제임스 캐머런이 인디오의 복수라는, 실현 불가능한 꿈을 영화로나마 이뤄낸 걸지도 모르지만, 이런 철학의 빈곤이 아타우알파를 단순 멍청한 인물로 묘사하게 만들고 자연과 타자를 단순히 대상으로만 바라보게 만드는 게 아닐까.
이 책은 몽테뉴의 글이다보니 철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기에 다른 인디오 관련, 인류학 관련 도서와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읽었던 세계사 책에 나온 몽테뉴의 사상이 잠깐 언급된 것을 읽고, 이 책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읽었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Que sais-je(크세주)"
몽테뉴의 좌우명이 였던 저 질문이 이 책의 핵심이다. 제국주의의 시작이였던 시대에 살았던 몽테뉴는 신대륙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로 전해 듣고, 그들이 신대륙의 주민들을 "야만"으로 취급하는 것을 듣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관습에 없는 것을 야만이라 단정하여 부를 뿐이다. 실제로 우리는 자신이 사는 고장의 사고방식이나 관습, 그리고 직접 관찰한 사례를 제외하면 진리나 이성의 척도를 갖고 있지 않다."
몽테뉴는 당시 유럽이 포로들에게 행했던 행위 또한 잔인하기 이를데 없으면서, 타문명에 대해 야만이라 말하는 것에 일침을 가한다. 타문명이 가지는 자연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발전하면서 이룩한 성과는 또한 못지 않는 완전한 종교와 정치라 말한다.
이 책은 몽테뉴의 수상록에 적힌 몇편의 에세이를 번역해 놓은 책이다. 각 챕터가 던지는 메세지는 가장 처음에 나온 "식인종에 대하여"를 필두로 일관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내가 아는 것과 다른 것은 틀린것이 아니고, 다른 것이며, 절대적인 기준이란 것은 없다는 것이다. 각 개인이 절대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모든 것은 자신이 살아온 환경의 방식, 관습, 법, 종교등으로 이루어진 체계일 뿐이지, 모든 것에 대하여 절대적인 것은 없다. 그러기에 맹목적인 생각이나 믿음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타인에게 나의 생각을 강요하는 행위 또한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질문이 아닌가 싶다.
나의 옳음과 너의 틀림. 그로인해 나오는 타인에 대한 혐오. 내가 지금 '맞다'라며 진리라 믿고 있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하는데서, 소통의 시작이 오는 것인데, 우리는 인정하는 것을 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것 같다. 책을 읽는 내내 다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나도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Good! Good!
나에겐 오랫동안 방치된 책이 있다.홍신출판사에서 나온 몽테뉴의 수상록이다. 이 책은 서양의 고전 중에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손이 안 가는 책이기도 하다. 몽테뉴의 에세이 수상록은 16세기 유럽 사회를 이해할 수 있으며, 콜롬버스에 의하여 신대륙이 발견한 직후 100년이 지난 그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 책의 서두에 몽테뉴를 프랑스의 대표적 사상가이며, 모럴리스트라 말하고 있다.그건 16세기,중세시대 그 시대의 편견과 선입견에서 자유로운 몽테뉴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여기서 몽테뉴의 사상의 실체에 접근해 본다면 1533년에 태어나 1592년에 세상을떠난 몽테뉴의 지식과 경험,지혜를 갸늠해 볼 수 있다.
책은 크게 6개의 소주제로 분류하고 있으며, 그 소주제는 식인종, 마차, 소카토, 데모크리토스와 헤리클레이토스, 신앙과 절름발이에 대해서 논하고 있었다.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한 언급을 살펴 본다면, 그리스 철학에 심취하였던 유럽인들의 생각에서 벗어나 몽테뉴 스스로 자유로운 철학적 사유를 향유하고자 하였다., 특히 신대륙 발견 후, 남미 페루 지역 인근에 보여지는 식인 풍습에 대해서, 유럽 사회는 미계한 종족,야만인이라 지칭하였다. 하지만 몽테뉴는 다르게 생각한다. 그들과 유럽인들은 다를 뿐 하나는 옳고 하나는 틀리다는 시점으로 바라본 게 아니라는 말이다.그건 몽테뉴가 그 시대의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며, 하나의 사례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나 아렌트가 생각났다.그는 유럽에서 논란이 많았던 여성 철학자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처리에 있어서, 악의 평범성에 대해서 언급하였다.사람을 선과 악으로 구별하는 것은 상당히 어리석은 행위이며,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한나 아렌트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건 몽테뉴도 마찬가지였다.신대륙 원주민이 설령 미개하고, 야만스럽다 하더라도,그것이 유럽인들이 신대륙 원주민을 향한 공격성에 당위성을 제시할 순 없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중세 시대에도 그러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전후에도 그러하였으며,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를 공격하고, 전쟁을 하는 것에 대해서 꺼리낌 없이 행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철학적 사유 없이 무의식적인 행동, 반지성주의의 민낯에 있었다.
미셸 에켐 드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 수상록 선집 식인종에 대하여 외 (고봉만 역 )를 대여로 읽어보았습니다. 몽테뉴의 책을 읽어보는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에세이의 원조격인 수상록은 교양인 몽테뉴의 사유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식인종에 대하여와 데모크리토스와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하여가 특히 재미있었습니다.
딱히 이 책을 꼭 사야겠다는 생각이 있지는 않았다. 예스24에서 3천원 이상 이북을 구매하고 리뷰를 쓰면 포인트를 2배 준다는 이벤트에 혹해 대상 도서들을 쭉 훑어보던 중에 선택한 책이다. 몽테뉴에 대해서는 이름만 들어보다가 그가 쓴 책은 아마 거의 처음 읽어보는 듯하다. 읽었서도 기억이 안 난다면 그다지 큰 인상을 못 받은 것이겠고. 이 책은 그의 여러 단상을 모은 것으로 여유가 있을 때 한 번 쭉 읽어보면 되는 정도의 책이라 평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