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블룸이라는 한 여성을 통하여 독일의 황색 언론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던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그의 존재를 나의 가슴 속에 각인시킨 작품이었다. 오랜만에 그의 또 다른 작품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1952년 어느 주말에 벌어진 48시간 동안 벌어진 이야기를 통하여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읽게 되었다. 이 작품의 배경이 1952년이라는 사실과 그 무대가 독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2차 세계대전 이후 힘겨운 독일의 상황을 한껏 느낄 수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더구나 독일은 전쟁을 일으킨 전범 국가이자 패전국의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러한 가혹한 상황에 대하여 항변할 처지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그러한 금기를 깨고 당시의 상황은 물론 사회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성당 교환수로 일을 하면서 번 돈을 자신의 집에 보내달라고 부탁하면서 이내 지인들에게 다시 돈을 꾸려고 방황하는 프레드의 모습은 패전 이후 극도로 궁핍한 삶을 사는 당시 독일인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내 그에 대한 많은 의문이 뒤따르게 된다. 성당 교환수로 일하면서 틈틈이 과외를 통하여 돈을 버는 그의 모습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노력으로 비춰지지만, 아내와 세 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들어가지 않는 그 이유가 궁금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가 돈을 빌리려는 이유가 단지 아내와 함께 집이 아닌 호텔에서 하루를 보내기 위한 것이라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하지만 방 안에 들어섰을 때 다시 두려운 감정이 엄습했다. 끔찍한 가난의 숨결, 나를 알아보는 것 같은 아기의 미소, 반가워하는 아내, 그 무엇도 화난 내 기분을 가라앉히기에 충분치 않았다. 아이들이 춤추고 노래하기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나는 화가 폭발하기 전에 다시 그들 곁을 떠나고 말았다.
- p. 98 中에서 -
극도로 궁핍한 상황에서 비록 일을 하고 있지만, 쉽사리 궁핍한 상황을 벗어날 수 없음에 절망한 가장에 대한 동정심으로 프레드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차된 아내인 캐테의 시선에서 보면 그러한 프레드의 행태는 가정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홀로 자유로워지기 위한 무책임한 행동으로 뒤바뀌게 된다. 세 아이의 엄마로서 비록 가난하지만, 아이들에 대한 희망과 미안함에 어떻게든 버티려는 그녀의 심경은 프레드와는 너무나 달라 보인다. 닦아도 계속 묻어나는 석회 가루는 그녀의 힘겨운 상황이 쉽게 해소되지 않음을 상징하는 가운데 프랑케 부인을 비롯한 주위 환경은 그녀에게 세상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힘겨운 상황에서도 그녀는 남편인 프레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오히려 그의 처지를 더욱 걱정하는 모습마저 보여준다.
프레드와 캐테의 이야기는 당시 상황에서 궁핍한 환경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여주는 개인의 모습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이전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와 같이 단순히 개인의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프레드와 캐테의 당시 상황에 대한 서로 다른 시선과 행동은 곧바로 그 시기의 사회 부조리에 대한 내용으로 확장시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작품이 이슈화된 이유는 전후의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그대로 유지하던 당시 카톨릭에 대한 문제와 분노를 함께 지적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지인들로부터 돈을 빌리지 못하다가 선뜻 프레드에게 돈을 빌려준 인물이 제르게 신부였다는 점과 지벤 슈메르첸 마리에 성당에서 프레드가 만난 시골 농부와 같은 인상을 주는 신부는 카톨릭에 대한 호의를 나타내는 상징적 인물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성당에서 우연히 만난 그 신부에게서는 자신의 모습마저 찾아볼 수 있었으니까.
그들의 검은 제복과 함께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순진한 자신감과 순진한 불안감을 볼 때마다 나는 내 아이들에 대해서도 느끼는 분노와 동정이 섞이 인상한 감정을 느낀다.
- p. 45 中에서 -
그러나, 아내 캐테와 달리 이미 종교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 프레드의 종교에 대한 시선은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부정적인 시선은 단순히 프레드의 개인적인 것만이 아니라 당시 카톨릭을 바라보는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의 상징으로 비춰질 수 밖에 없다.
갑자기 현기증이 났고, 나는 행진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내 시야는 오므라든 것처럼 좁아졌고, 나는 희마한 빛을 발하는 회색에 둘러싸인 채 내 두 아이 클레멘스와 카를라의 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
- p. 73 中에서 -
성 히에로니무스 성체 행렬에서 주교와 그를 따르는 종교인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느낀 이러한 프레드의 시선은 당시 전후의 고통받는 상황 속에서 그저 자신들의 권위에만 집착하고 사람들을 돌아보지 못하는 카톨릭에 대한 비판의 기운이 느껴진다.
어둠 속의 형상은 미동도 하지 않았는데, 지팡이 같은 것을 손에 들고 있었다. 나는 다 타버린 성냥을 집어 던지고 성냥불을 붙였다. 그것이 석상임을 알아차린 뒤에도 심장은 방망이질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한 걸은 더 가까이 다가갔고, 희미한 빛 속에서 그것이 손에 백합꽃을 든, 물결치는 고수머리 천사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p. 105 中에서 -
남편 프레디와는 달리 여전히 독실한 모습을 보여준 캐테가 성당에서 경험한 이 대목 역시 당시 카톨릭에 대한 절망의 시선이 프레디에 한정되는 것이 아님을 잘 드러내고 있다. 편안함과 안정을 주어야 할 성당에서 그녀가 공포를 느낀 어둠 속의 형상이 실제 천사상이었다는 이 표현은 하인리히 뵐이 글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적인 문제와 종교의 무능을 보여주기 위한 절정에 다다른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쯤되니 이 이야기는 그저 무능하면서도 가난한 프레드와 캐테 부부의 48시간의 기록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이야기 초반에 그들의 상황에 언급된 부분은 역시나 사회의 부조리가 그들 부부의 어려움을 더욱 부채질한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당시 도시 변두리에 주택 단지를 짓고 있던 주택 위원회는 우리의 신청을 거부했다. (중략) 그 주택 위원회의 회장이었던 프랑케 부인은 우리의 주택 신청을 거부함으로써 흠잡을 데 없고 사심 없는 여자라는 세간의 평을 더욱 확고히 했다. 우리에게 새 집을 허락해 주었다면 자기네 식당으로 섰으면 하는 우리 방이 비게 될 것인데도 말이다. 그러니까 프랑케 부인은 자신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우리에게 불리한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 p. 29 中에서 -
프레드와 캐테는 원래 그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카톨릭과 깊은 연관이 있던 프랑케 부인의 사회적 위신을 드높이려는 위선으로 인하아 상실하였고, 결국 이에 대하여 프레드는 절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쯤되면 프레드의 기이한 행적이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된다. 아내와 세 아이와 함께 단칸방에 사는 상황에서 프랑케 부인이 사용하지 않는 응접실을 이들 가족에게 양보만 하더라도 그는 결코 집을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캐테 역시 이러한 프랑케 부인을 두려워하면서도 또 한 번의 임신을 함으로써 당시 사회에서 말하는 방향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음으로써 그녀 역시 나름의 저항과 의지를 보여준다. 물론 이 글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임신으로 인하여 프레드를 사랑하지만 결국 프레드와의 이혼을 결심하는 개인의 아픔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그저 사회의 부조리와 카톨릭의 무능함 앞에 마냥 순응하지 않는다는 점은 오히려 높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 애는 말이야." 나는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 드로기스트의 고객이 되는 것과 주교 관할의 착실한 신자가 되는 것에 저항한 거야. 하지만 나는 그 애를 사랑할 생각이야."
- p. 168 中에서 -
프레드의 이 말은 그가 처한 사회 및 카톨릭의 부조리에 대한 반감은 물론 그의 자녀들은 더이상 그러한 시대에 머무르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보여진다. 또한 이들 부부가 당시의 상황으로 인하여 서로 입장차를 보이면서 캐테는 이혼까지 결심하지만 이들 부부가 한 간이 식당을 운영하는 소녀의 바보 동생, 그들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따뜻한 사랑과 가족애가 결국 해법임을 은연중 깨닫게 되는 부분이라든지 이 책의 결말에 직접적으로 명시되지 않았지만, 죽은 자식들이 묻혀 있는 곳을 홀로 방문하는 캐테의 모습을 몰래 지켜보면서 집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하는 프레드의 모습은 희망에 대한 그들의 마지막 의지를 느낄 수 있기에 그 결말은 긍정적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오늘날 독일의 상황을 보면 그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결코 의미없는 것임을 우리는 지금 확인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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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시선으로 쓰여진 이야기들이
남편의 이야기보다 훨씬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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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있는 모든 물건에 먼지가 쌓이고 미세한 석회 가루가 덮쳐 나는 모든 것을 먼지 걸레로 두 번씩 닦지 않을 수 없다. 발밑에서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조그만 방의 댧은 벽을 통해 이 고약한 먼지를 목구멍으로 삼킨 막내 아기가 기침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육체의 아픔처럼 절망감을 느끼고, 목 언저리에 생긴 불안의 응어리를 꿀꺽 삼켜 버리려 한다. 목구멍을 꽉 조르는 듯한 느낌이 들고, 먼지, 눈물, 절망이 섞인 것이 내 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이제 정말 투쟁을 시작한다. 창문을 연 후 얼굴을 씰룩이며 부스러기를 쓸어 모은 다음, 먼지떨이를 들고 모든 것을 꼼꼼하게 털어 내고, 마지막으로 마른걸레를 물에 담근다. 1제곱미터만 깨끗이 닦아도 걸레를 다시 빨지 않을 수 없다. 깨끗한 물은 금방 뿌연 우윳빛으로 변한다. 3제곱미터를 닦고 나면 물은 진득진득해진다. 양동이 물을 쏟으면 보기 싫은 석회 찌꺼기가 남는다. 손으로 그것을 긁어내고 씻어 낸 다음 다시 양동이에 물을 가득 채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