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노 저
임솔아 저
애나 렘키 저/김두완 역
로랑스 드빌레르 저/이주영 역
천선란 저
백온유 저
「베를린에서 3시간 떨어진」
“강이 보이는 풍광은 없었다. 발코니도 없었다. 그러나 호텔 방은 편안하고 아늑했으며, 사람들은 그가 말한 대로 친절했다. 게시물을 확인할 계획은 없었다. 자동으로 그녀의 전화가 호텔 와이파이에 연결되었고, 그가 방금 귀국 파티에서 찍은 몇 장의 사진을 업로드한 것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그의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살펴보았지만, 그들 중 아는 사람을 발견할 수 없었다. 파티 내내 그 옆에는 안경 낀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프로필을 클릭했는데 어떤 정보도 올라와 있지 않았다.” (p.49)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만능의 시대에 대한 우화이다. 자신이 현재 머물고 있는 장소가 곧 자신의 정체성일 수도 있다는 사실, 그래서 바로 그 장소를 속여서 만듦으로써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될 수도 있다는 설정이 재미있다. 그렇게 이스라엘에 있으면서 베를린에 있는 것으로 꾸며놓은 상황에서 갑자기 아버지의 위독한 상황이 전달된다면, 소설 속의 타미라는 갑자기 세 시간 안에 나타나면 거짓이 탄로 나게 되는 아이러니에 휩싸인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드디어 실제의 베를린에 도착한다.
「101.3FM」
어느 날 나는 노인에게서 라디오 수리를 부탁받는다. 그러나 나는 수리를 마치고도 그 라디오를 노인에게 한동안 돌려주지 않는다. 라디오에 일정 주파수를 맞추면 누군가의 속마음이 들려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라디오의 도움을 받으며, 마음에 들어 하던 여인 누리트와의 연애를 이어간다. 하지만 그렇게 속마음을 듣는 것이 이들의 연애에 도움이 될 것인지...
「데비의 드림 하우스」
“... 브루노는 그 종이를 어떻게 ‘세탁기’에 집어넣는지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실제로 꿈을 제조하는 큰 금속 장치였다. 종이는 기계 안에서 두 시간 동안 회전했고 작고 검은 디스크에는 마침내 꿈이 담겼다.” (p.72) 꿈을 만드는 작업이라는 황당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고 애써 디테일한 표현이 이어진다. 그렇게 나는 꿈 중에서도 악몽을 만드는데 탁월한 솜씨를 보이게 되는데, 그렇게 자신이 만들어야 할 악몽의 수취자가 연인인 데비라는 사실 앞에서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삶의 의미 주식회사」
“어쩌면 하나의 거창한 의미를 찾는 것을 그만두고 아이의 웃음소리나 푸른 풀 같은 작고 단순한 것들을 위해 살기 시작해야 할 때가 왔는지도 모르죠. 나도 잘 모르지만, 뭐든 미소짓게 만드는 것들이 소중해요.” (pp.97~98)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고군분투를 그만 둔 그녀는 이렇게 말했고, 나는 그 고군분투를 그만둘 생각은 없지만 이렇게 말하는 그녀와 바닷가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엑시트」
이사를 한 이후 딸 시라에게 특이 반응이 생겼다. 그것은 깨어 있는 것...과 자고 있는 것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이다. 나와 아내는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으며 시라의 상황을 살피지만 나아지지 않는다. 수면 연구를 비롯한 다양한 실험 끝에 시라의 꿈 속에서 그곳의 시간이 따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만 방법은 없다. “... 의학적인 미스터리는 없었다. 사실 모든 이야기는 매우 간단했다. 어느 날 시라는 꿈 속에서 도망치기로 결심했고, 그 다음 날, 그 꿈에 싫증이 나서 우리에게 돌아오기로 결심한 것이리라...” (p.174) 그리고 어느 날 시라는 돌아왔다. 책에 실린 <노인 부대>와 함께 중편 소설 분량 정도의 길이를 가진다.
「예루살렘 해변」
알츠하이머에 걸린 릴리안의 손을 붙잡고 새미는 여행을 하는 중이다. 그녀 릴리언은 모든 기억이 뜯겨나갔다. 이제 그녀가 기억하는 유일한 것은 ‘눈 덮인 예루살렘의 바다’ 뿐이다. 그리고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존재하지 않은 곳을 만들어낸다.
「태양 근처 행성에 사는 여자」
‘토성의 고리에서 열린 엉성한 우주 파티’에서 나는 그녀를 만났다. 그런 어설픈 만남 뒤 나는 그녀가 사는 행성, ‘태양으로부터 4,900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 그러니까 태양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행성에 찾아간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간신히 기억할 따름이고, 그 행성을 떠날 수 있는 우주선은 없고, 다른 행성과의 통화도 여의치 않다. 그녀의 이름은 아얄라, 이다.
「노인 부대」
<노인 부대>는 꽤 긴 분량의 소설이다. 요즘 같으면 중편을 넘어 한 권짜리 경장편으로 만들 수도 있을 정도이다. 이스라엘의 3대 남자들의 이야기인데, 서술자는 손자이고 느지막이 노인이 되어 다시 군대를 간 것은 할아버지이다. 이스라엘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발 나아가 남녀 구분도 없이, 징병제를 시행하고 있어, 다른 나라의 독자들보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스라엘 군대의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지는 않으니 완전히 잘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서로 충분히 엇갈려 있는 3대의 이어지는 듯 이어지지 않는 듯한 대화와 그것과는 무관하게 계속 소설에 침투하는 인도의 이혼한 엄마가 보내는 편지글은 독특하다.
「아니타 샤브타이」
“... 비밀은 돈과 같아서 정말 좋은 비밀을 공유하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빚진 느낌이 든다고 했다. 아버지가 그들에게 엄마에 대해 말하면 그들은 아티초크(엉겅퀴와 비슷한 국화과 식물-역자 주)처럼 입이 열리더니 모두 한 마디씩 했다...” (p.319) 재밌는 말이어서 남긴다. 아버지와 어린 내가 택시를 타고 가는 과정에서 내가 관찰한 결과이다. 그때 나의 엄마는 암에 걸려 있었다. 여하튼 나는 제대로 된 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크지 못했고 어느 순간 시위 현장에서만 크게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이후 나는 나라 안의 각종 시위 현장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되었다.
「중앙버스 역에서 레논은」
‘아마도-토끼’에서 ‘햄스터-토끼’를 거쳐 ‘기니피그’로 이어지는 동물의 이름 맞추기 게임 같은 소설, 이라고 하면 너무 단순하고... 여하튼 어린 엘빈은 그렇게 토끼를 닮은 동물을 발견하고 해코지를 하고 잃어버려 찾아다니고 하면서 커가는 중이다.
「해왕성」
해왕성이라고 불릴 만큼 먼 곳에 위치한 병영에서 벌어진 일종의 하극상 사건, 그 사건의 중심에 서 있던 코르작이라는 인물, 그들을 찾아왔던 아름다운 여군 기자 등 이런저런 복잡한 상황이 맞물려 있다. 여기에 그 여군 기자의 애인이 그 해왕성의 간부였다는 사실까지...
「파리와 고슴도치」
군대에 간 형이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 나에게 ‘시간 덩어리’를 만들어 그것을 병에 담은 다음 내게 건넨다. 나는 군대에 간 이후 혼자 ‘시간 덩어리’를 만드는 연습을 시도한다. 나는 형의 이야기와 함께 시간을 모아서 병을 채워간다. 하지만 그런 형이 죽었다. 나는 그후에도 시간을 잡는 기술을 발전시켰고 하루에 세 병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 주변 사람들은 병과 상자를 모두 형 방에 채우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그들이 힘이 있었다면 나에게 더 많은 잔소리를 했겠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형이 잠깐 내게 들를 수 있다면 바로 이해했을 것이다. 나는 이 집 전체를 시간으로 채우고 싶다. 내 평생 갈 만큼. 그리고 내 혈압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혈압이 그렇게 좋지 않고 어머니는 너무 피곤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가 형과 함께했던 그 모든 시간을 되찾을 수 있다면 마침내 우리는 생기를 되찾을지도 모른다. 한순간의 고요 속에 영원히 갇혀 있는 대신.” (p.387)
「사막을 기억하는 방법」
사랑하는 두 사람이 원하는 기억을 공유하는 기술이 있다. 사람들은 결혼을 앞두고 이 기억 공유 서비스를 이용하곤 한다. 루시 또한 알란과의 결혼을 앞두고 이 서비스를 이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기억 공유 서비스가 모두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은 아니다. 루시 같은 경우가 그렇다.
「고객서비스 지침서」
고객과 고객서비스 담당자의 대화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세상 어디에서나 고객서비스 담당자는 극한 직업이다. 이들의 활동은 세상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들은 어쩌면 보편의 지침서와 함께 자신만의 지침서 또한 갖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도 게펜 Iddo Gefen / 임재희 역 / 예루살렘 해변 (The Jerusalem Beach) / 문학세계사 / 437쪽 / 2021 (2021)
이도 게펜은 한 마디로 이스라엘의 테드 창인데, 그래서 소설이 굉장히 지루하다. 긴박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이야기가 시종일관 만만디다. 둘 다 단편을 쓰는 것도 똑같다. 이 부분은 이해가 되는 게, 아이디어가 워낙 많다 보니 하나의 주제를 오래 전개하기보다는 여기저기 발산하는 것이다. 물론 이야기에 깊이가 없다는 건 아니다. 그건 분량이 좌우하는 게 아니니까. 박학다식한 다학제적 천재들은 신선한 소재를 짧게 구현하는데도 그 안에는 번개 같은 사색이 깃들어있다. 테드 창이나 이도 게펜이나 둘 다 과학과 문학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사람들이다.
<예루살렘 해변>의 단편들을 하나의 주제로 정리하기란 불가능하다. 몇몇 소설들만 소개하면, 일단 <101.3FM>은 타인의 마음이 라디오 주파수에 잡히는 설정이다. 라디오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면 근처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 소리가 들린다. <데비의 드림 하우스>는 꿈을 제조하는 회사의 이야기다. 더 큰돈이 보장되는 악몽 제조에 발을 들였지만 차마 사랑하는 여자에게만큼은 악몽을 건네지 못하는 한 남자의 고뇌가 펼쳐진다. 페이스북에 거짓 포스팅을 하고 그게 얼마나 멀리 퍼져나가는지, 사람들이 그걸 얼마나 믿는지 실험하는 <베를린에서의 3시간 떨어진>. 한 번 꿈을 꾸면 거기서 몇 년을 살아가느라 항상 잠에 취해 있는 딸을 키우는 <엑시트>.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는 시술에 대한 소설 <사막을 기억하는 법> 등이 있다.
이것은 SF인가? 테드 창에게 늘 따라붙던 질문이 이도 게펜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장르가 무슨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도 되는가? 해당 장르의 특성이 고스란히 반영되지 않는다고 그 소설을 폄하할 이유가 되는가? 정작 당사자는 끼워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환상과 과학이 절묘하게 어우러지지만 소설들은 전혀 어렵지 않다. 복잡한 언어학 이론과 프로그래밍 원리가 주요한 줄기를 구성하고, 또 그걸 완벽히 이해해야만 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는 테드 창과는 그런 면에서 확실히 다르다. <예루살렘 해변>은 훨씬 더 캐주얼하다. 그저 소재가 특이할 뿐 이해에 큰 노력이 필요하진 않다. 유일한 단점은 그냥 '지루함'이다.
똑같이 지루한 데다 더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선호를 묻는다면 나는 테드 창 쪽이다. 적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특수성,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의무 군 복무 등 따지고 보면 비슷한 게 상당히 많은 이스라엘이지만 어딘가 낯설다. 푹 빠져들기엔 뭔가에 가로막힌 기분이다. 어쩌면 지루함의 강도가 더 커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형식면에선 더 새로운 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 난감한 소설이다.
<예루살렘 해변>
제목만을 보면 다소 종교적인 책인가 하는 의심을 가져볼 만 하지만 전혀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이 책은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현대인의 삶을 재조명하는 단편 소설집이다. 뇌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저자 ‘이도 게펜’은 스토리텔링이 어떻게 인간 정신에 대한 이해를 증폭시킬 수 있는지를 탐구했고, 실제 파킨슨병의 양상을 진단하는 과정에서 혁신적인 연구 성과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틈틈이 쓴 소설을 묶은 이 책 ‘예루살렘 해변’은 2017년에 출간 된 그의 첫 작품으로 문화부장관상까지 수상했다. 게다가 이미 이 책에 실린 몇몇 작품은 영화와 TV드라마로 제작될 예정이라고 하니 이미 책을 읽기 전부터 충분히 기대를 가질 만 하다.
총 14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크게 기대를 갖지 않고 읽어서인지 생각보다 훨씬 새롭고 반전 있는 작품들에 놀랐다. 현대인과 밀접한 이야기이지만 조금은 미래이고 혹은 멀고 먼 다른 세상일 수도 있다. 상당히 신선하고 흥미로우며 이야기들마다 차별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어 매 작품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그 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우리의 일상에 깊게 자리한 SNS를 활용하여 그것에 비춰지는 삶이 사실은 전부 거짓임을 보여주는 작품 ‘베를린에서 3시간 떨어진’이나 다른 이의 생각을 주파수를 통해 느끼고 읽어간다는 환상을 보여주는 작품 ‘101.3FM’, 결혼을 두고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며 이해와 놀람을 보여주는 ‘사막을 기억하는 방법’, 그 외 청춘이라는 시기가 주는 공감을 가질만한 고민을 담은 ‘삶의 의미 주식회사’, 작품의 제목인 ‘예루살렘 해변’은 이상향을 쫓아가는 다소 철학적인 모습도 보여주어 진정 현대인의 삶이란 어떤 것을 얻고 잃어가며 살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이야기들이 어렵지 않고 환상적이라 상상력을 발휘한 작가의 의도를 재미있게 파악하며 읽는 재미가 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