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회사를 그만두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회사를 그만둔 것이, 드디어 ‘그놈의 문학병’을 버린 것이 아니냐는 물음과 같은 의미처럼 들리기도 한다. 수많은 이유가 있기도 하고 아무 이유가 없기도 한데, 중요한 건 그만둔 이유가 아니고 그만둔 이후에 내가 알게 된 것들이다. 그중 하나는 편집자들이 실로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것. 그 속에 있을 땐 일에 묻혀서 돌아볼 겨를이 없었는데, 떨어져 있으니 보인다. 단순히 월급을 받는 직장인으로서가 아니라 정말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출판하는 마음』 에 아주 잘 담겨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이번에 인터뷰하면서 알게 된 ‘문학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이건 다가가서 보니 보인다. 문학 편집자로 일하면서, 나는 내가 문학하는 사람들과 당연히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 인터뷰를 통해서 비로소 나는 그들 옆에 제대로 선 듯했다. 그들의 이야기가, 그들의 마음이 제대로 들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 옆에 가까이 설수록 나는 문학 편집자가 아닌 문학을 꿈꾸던 지난 시절의 마음으로 자꾸만 되돌아갔다는 것.
---pp.10,11
“대학을 졸업하고 일러스트레이션학교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 많이 걱정하셨죠. ‘교직 이수 수업을 들으면 어때? 선생님을 하는 건?’ 하면서 차라리 대학원을 가라고 하셨어요. 일러스트레이션학교는 수료의 개념이라 졸업한다고 학위가 나오거나 하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학위를 받을 수 있는 대학원을 제안하신 거죠. 근데 제가 ‘열심히 해보겠다’, ‘너무 하고 싶다’ 하니까 결국 허락을 하셨어요. 그래도 쭉 걱정이 되셨대요. 제가 혹시 아무것도 안 되면 어떡하나 싶어서 돈을 모아놓았다고 하시더라고요. 가게라도 차려줘야 하나 싶어서.”
---p.38
“계속 작가로 살아가지 못할 수도 있는 거고, 만약 작가로 살더라도 생계가 어려울 수 있으니까 대학원에 들어가 계속 공부했지요. 그러다가 박사 수료만 하고 논문을 안 쓰기로 결심을 했던 게 서른두 살이었어요. 그때부터는 내가 시간강사를 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겠구나, 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학교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었어요.”
---p.59
“돈을 벌기 위해 시를 쓰는 시인은 아마 없을 거예요. 적어도 제 주변에는 없어요. 시인이라는 존재가 돈이 필요하지 않다거나 재물에 대한 욕망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지요. 시로는 돈을 벌 수도 없고,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목적으로는 좋은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을 시작부터 알고 있으니까.”
---p.83
“저는 지금도, 등단하라고 하면 할 자신이 없어요. 등단이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는 여전히 모르지만, 그땐 아예 진짜 모르는 상황이어서 혼란스러웠어요. 이게 맞는 건가 싶기도 하고,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하고 스스로가 우스꽝스러워지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나이 먹어 가지고 왜 이러고 있지?’, ‘정신 못 차리고 있다’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p.117
“예상하고 계실 테지만 연극만으로 먹고살기는 쉽지 않아요. 요즘 많이 떠올리는 생각은 ‘노릇’과 ‘시늉’ 이라는 말입니다. 알고 보면 창작이란 참 이기적인 행위인데, 그러다 보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시간 앞에서 노릇이라는 말과 만나야 해요. 자식 노릇, 형제 노릇, 배우자 노릇, 부모 노릇…. 나의 시간을 조금만 더 견뎌달라는, 버텨달라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는 거죠. 그래서 오래 이 일을 하려면 누구보다 생활인으로서의 태도를 지녀야 해요.”
---p.157
“과외가 주 수입원이었는데, 제가 참 잘했다 싶은 건, 서른 살에 그 일을 그만둔 거예요. 그땐 정말 돈이 없었는데도 ‘이제 더 이상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르는 일은 그만하자. 그것만은 하지 말자’ 이렇게 되더라고요.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리는 시간, 가족이 아닌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는 그 어색한 순간이 참 아팠어요. 돈이 없더라도 글 쓰는 일에 좀 더 집중하자,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하자, 하고 그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기로 했죠. 가장 안정적인 수입원이었는데 포기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몇 년 동안 진짜 가난했죠.
---p.177
그때만 해도 여자가 글을 쓰면 얼마나 쓰고, 일을 하면 얼마나 하겠다고 굳이 애까지 놔두고 저렇게 나오냐는 말을 면전에서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오히려 그런 말들이 제게는 오기 같은 걸 생기게 했어요. 누가 더 오래가고, 누가 나중에 웃는 사람이 될지 한번 보자, 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썼죠. 제가 13개월 된 아기를 떼어놓고 나왔을 때는 그만큼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아이에게 쏟아야 할 시간을 제 글에 쏟겠다고 결심한 거잖아요. 그래서 더욱 확실한 성과를 내고 싶었어요. 우리 아이도 나도 희생한 부분이 있으니, 거기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죠. 그게 제가 더 열심히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예요.”
---p.214
“일단 생계에 대한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어요. 동료끼리도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제자들의 경우엔 더더군다나 그렇죠. 그런 부분에 대한 주저함은 있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재능이 있으면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하라고 해요. 돈을 많이 못 벌더라도 잘하는 일을 해야 칭찬을 받잖아요. 사람은 칭찬을 받아야 사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재능이 있다고 느껴질 때는 밀어주고 싶어요.”
---p.249
“양말 한 켤레도 안 샀어. 가끔 책만 몇 권씩 샀지. 그때는 살 만했어. 오히려 불안해진 건 글을 써서 돈을 조금씩 벌기 시작했을 때야. 그 돈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잖아. 그땐 이미 회사를 그만두고 2~3년째 접어들 무렵이었으니까. 내가 지금 버는 돈이 많지도 않은데, 그렇다고 이 돈조차 계속 벌 수 있을 거란 보장도 없고, 계속 이렇게 살다가 몇 년 뒤에 일이 끊기면 어떻게 하나, 이런 불안이 생기는 거야.”
---p.275
“문학을 하는 사람이 문학 편집을 한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얼마나 건강하게 끌고 가냐의 문제인 것 같아. 헷갈리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어. 편집 일을 하고 전화도 받아야 하는데, 갑자기 시인의 정체성이 강하게 작동하기 시작하면 모든 게 어그러지고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거든. 나는 돈을 벌어야 하니까. 여긴 나에게 돈을 주는 곳이잖아. 월급 받는 만큼 최선을 다해야지. 난 이게 지고지순한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해. 당연히 월급 받으러 왔으니까, 편집자 이전에 직원이지.”
---p.309
“1990년대에는 한강, 김연수 등이 일을 했던 《출판저널》 같은 곳이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온라인 매체들이 다 가져간 상황이죠. 종이 신문은 점점 더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고요. 그래서 안타깝지만 문학 기자도 점점 자리가 줄어들고 있어요. 과거에는 매 신문마다 두세 명의 문학 기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의 매체에서 한 명 내지는 2분의 1명 정도예요.”
---p.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