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편
윈스턴 처칠과의 우정이 만들어낸 ‘윈스턴 처칠’ 샴페인
윈스턴 처칠의 퀴브 배합 비율과 양조법은 가문의 비밀이나, 풍부하고 잘 익은 풀 보디의 다소 남성적인 스타일이지만 기포가 섬세하고 말린 과일과 장미꽃 향기, 우아한 바닐라 풍미는 아마도 피노 누아를 주 품종으로 하여 10년 이상 지하 셀러에서 저온으로 장기 숙성한 결과일 것이다. 피와 땀과 눈물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의 원동력은 그가 생전에 마신 500상자 이상의 샴페인 덕분이 아닐까. 91세까지 장수하면서 그는 이 지상의 모든 애주가들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남기고 떠났다.
“나는 알코올을 통해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I have taken more out of alcohol than alcohol has taken out of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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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면서도 섬세하고 복합적인 아로마를 동시에 실현한 와인
아름다운 짙은 적벽돌색을 띤 슈발 블랑 1989년 빈티지가 가장 인상에 남았다. 카베르네 프랑 58퍼센트와 메를로 42퍼센트의 비율로 배합하여 만든 이 와인에서는 과일 컴포트?블랙커런트?자두의 아로마 그리고 이끼 덮인 관목과 스파이시한 후추 향을 느낄 수 있다. 전체적으로 메를로에서 나오는 풍부하면서도 벨벳같이 부드러운 타닌과 섬세한 구조감 그리고 카베르네 프랑에서 발현된 신선하면서도 복합적인 아로마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명불허전의 와인이다. 이것은 슈발 블랑만이 가지는 특별한 테루아 덕분이라고 했다. 슈발 블랑은 생테밀리옹 AOC에 속하지만 포므롤 지역의 경계에 있어 흙, 모래, 자갈이 섞여 있는 토양 이외에도 두 가지 타입이 더 혼재해 있다. 즉 하층토인 점토 위에 모래와 자갈이 각각 표토를 구성하거나 하층토와 표토 모두가 커다란 자갈로 이루어진 세 가지 타입이다. 이러한 토양 구성은 한 포도밭에서 카베르네 프랑과 메를로를 함께 재배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되었으며, 강하면서도 섬세하고 복합적인 아로마를 동시에 구현하는 와인을 탄생시켰다. 샤토 슈발 블랑은 40년 전후 수령의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최고 품질의 포도로 1년에 약 6,000케이스만, 그리고 양질의 포도로 르쁘띠 슈발Le Petit Cheval 세컨드 와인을 2,500케이스만 한정 생산한다. 나머지 포도는 일반 양조장에 판매하여 최고 품질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슈발 블랑 와인은 영화 〈사이드웨이〉에서뿐만 아니라 1983년작 제임스 본드 영화인 〈007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 2007년 〈라따뚜이〉, 2008년 〈와인 미라클〉 등의 영화에서 최고의 와인으로 언급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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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에이지Wine Age와 바인 에이지Vine Age
와인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포도나무의 나이에는 관심이 없고, 와인의 빈티지와 숙성기간만을 강조한다. 포도나무는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그동안 인간의 생존기간과 유사하다. 포도나무의 일생에서 자신의 최고 와인을 만드는 때는 중년기간이다. 즉 수령이 70년이면 35년 전후에서 수확한 포도가 최고의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포도묘목을 심으면 보통 3년 후부터 포도를 수확할 수 있지만, 이 나이의 포도로 와인을 만든다면 ‘구상유취口尙乳臭’, 그러니까 우리가 마실 수 없는 와인이 된다. 반대로 수령이 100년 된 포도로 만든다면 그 와인은 향기가 없어 밋밋하고 개성 또한 없는 와인이 될 것이다. 와인 역시 우리 인간처럼 중년이 되어야만 비로소 깊이 있는 삶이 축적되어 그 결과로 농염한 와인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과거에는 70년 정도 살았던 포도나무가 지금은 100년 이상 생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100세 시대를 구가하는 오늘날의 인간이 의학 발달의 덕을 입고 있다면, 포도나무는 농학 발전의 덕을 입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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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 콩티 대 라타쉬 그리고 리쉬브르 와인
이 와인에 대한 설명을 영국 출신의 부르고뉴 와인 전문가인 클라이브 코테스Clive Coates씨의 설명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이 와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비싸며, 항상 최고 품질이며, 가장 순수하고 귀족적이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피노 누아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본보기다. 그것은 단순한 넥타nectar(과즙)가 아니라 모든 부르고뉴 와인을 평가하는 척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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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 콩티가 비단과 같이 부드럽고 마른 제비꽂과 장미꽃의 매혹적 향기가 켜켜이 피어나는 신비의 와인이라면, 라 타쉬는 보다 힘이 있고 남성적인 느낌이 있었다. 특히 송로버섯과 흙냄새가 좀 더 강하게 느껴졌다. 이에 비해 뤼쉬부르는 좀 더 부드러운 맛이었지만 복합성과 섬세함이 다소 부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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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크 참나무의 일생
포도밭 주위에 프랑스에서는 볼 수 없는 코르크 참나무Quercus suber 군락지가 있는 것을 보니 이곳이 한때 스페인 영토였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코르크 마개의 원료인 코르크 참나무의 원산지는 북서아프리카와 스페인, 포르투갈이다. 이 나무의 수령은 150~250년인데, 심은 지 25년이 되면 첫 번째 채취가 이루어지고, 매 10~12년마다 추가로 채취할 수 있다. 코르크 참나무는 결국 인간에게 최소 열두 번의 코르크 원료를 선물한 후 생을 마감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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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파가 탄생한 작은 항구 콜리우르의 와인
뱅뒤나튀렐 와인의 메카 바니율스에서 북동쪽으로 D114번 해안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지중해를 향해 펼쳐진 깎아지른 듯한 경사지에 포도밭이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곳을 지나면 이윽고 고성과 중세의 건물들이 있는 작은 항구 마을이 나온다. 이 항구가 현대 미술사에 새로운 지평을 연 야수파의 탄생지인 콜리우르이다. 이 작은 어촌은 루시용 지방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름철 관광지 중 하나이며, 레드와인과 로제와인으로 유명한 콜리우르 AOC 와인 산지의 중심지이다. 때마침 도착한 시간이 늦은 오후였는데, 노을에 붉게 물든 지중해와, 핑크색을 띤 고색창연한 성채와 건물들이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야수파가 이곳에서 태동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1905년, 색의 마술사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와 앙드레 드랭Andre Derain이 이 멋진 풍경들을 야성적인 색깔로 표현하면서 야수파가 탄생하였다. 야수파의 그림은 20세기 초 인상주의에 반하여 눈으로 보는 색채보다는 마음으로 느끼는 색채를 추구하며, 밝고 강렬한 원색을 선호한 표현주의의 한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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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편
영화 〈더 라스트 프로세코〉의 배경
샤르마 방식으로 만들었지만 결코 프랑스의 샴페인에 못지않다고 칭찬하였더니, 선조들이 변함없이 추구해왔던 “자연의 법칙에 따라 와인을 만든다”는 철학의 결과물이라서 그렇다고 스테파니 씨가 말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모든 포도밭을 철저하게 유기농으로 가꾸고 있으며, 그 증표로 와인 병 하나하나에 일일이 친필서명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시음이 끝나고 어둠이 깃든 유기농 포도밭을 바라보면서 나는 문득 얼마 전 보았던 영화 〈더 라스트 프로세코The Last Prosecco〉가 바로 이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했다.
“자연이 세운 규칙에 따라, 땅을 속이거나 지나친 욕심으로 착취하지 않으면서 만드는 와인. 농약을 뿌리거나 복잡한 농법을 사용하지 않고, 배양된 효모가 아닌 순수한 자연 효모에 의해 발효된 와인.”
그리고 영화 속에서 프로세코 와인 생산자인 주인공 안칠로토Ancillotto 백작이 자살 직전에 자신의 셀러에서 프로세코 와인을 마시면서 했던 독백을 가슴에 안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인 베네치아로 향했다.
? 사랑하는 친구들과 한 잔! ? 베니스의 여인과 한 잔! ? 그냥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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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와 함께한 와인 문화
와인의 전파 과정이나 특정 와인의 뿌리를 찾다보면 대부분 문명의 이동 경로와 일치하면서 군대도 함께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이 고대에는 ‘갈리아’라 불렸던 프랑스와 현재 독일의 라인강 남부 지역 그리고 ‘신대륙’인 남미의 대표 와인 산지인 칠레와 아르헨티나이다. 갈리아 지역은 이 지역을 정복한 로마군에 의해, 남미 지역은 잉카?아즈텍 문명을 지구상에 사라지게 한 스페인의 정복군Conquistador에 의해 전파되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대표적인 와인 산지들은 천주교의 신부들에 의해 형성되었는데, 이는 산타바바라Santa Barbara나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처럼 전주교의 성인들의 이름을 딴 도시 이름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정복군 병사들에게는 알코올음료로서, 천주교에서는 미사주로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용품이었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정복왕 람세스Ramesses 2세 때 오늘날의 시리아 일대를 놓고 히타이트Hittites왕국(터키에 있던 고대 국가)과의 전쟁 시 전투 여부에 따라 군인들에게 매일 공급했던 와인의 양이 달랐으며,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의약품으로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목적의 와인 수요는 로마군에도 적용되었으며, 그래서 로마군에 의해 현재의 유럽 와인 지도(와인 생산 지도)가 사실상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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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골의 포도나무로 만든 베난티 와인
근대 와인산업에서 재앙에 가까운 필록세라 문제는 필록세라에 강한 미국의 포도 품종의 뿌리에 유럽의 포도나무 줄기를 접목시켜 해결했다. 따라서 오늘날 대부분의 유럽 포도나무는 진골眞骨이고, 이곳 에트나화산 일대나 칠레와 같이 피해를 입지 않은 포도나무Prephylloxera vines를 성골聖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곳 에트나화산 일대의 와인은 원래 포도의 품종의 특질을 나타내는 순수한 혈통의 와인이라 할 수 있겠다. 아직도 이곳에서는 유럽이나 미국과는 달리 다른 품종을 접목하지 않고 땅 위에서 자연적으로 칡넝쿨처럼 뻗은 어미 줄기에서 새로운 새끼 포도나무가 자라게 하고 있다. 포도나무의 나이가 80살이 보통이며, 100살이 넘은 포도나무에서 건강하게 익어가고 있는 포도송이를 보면 새삼 와인산업에서 테루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100년이 넘은 그루터기의 주름살이 마치 우리 인간의 인생 역정이 반영된 것처럼 느껴지고, 와인도 그만큼 다양하고 복합적인 풍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p.266
디캔팅은 반드시 필요한 절차인가?
디캔팅의 장점은 여과주인 와인의 특성상 병 바닥에 침전되어 있는 찌꺼기를 제거하고 순화되지 않은 거친 타닌을 산화시켜 부드럽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와인의 맛을 온전히 음미하려면 순화되지 않은 처음의 와인 맛부터 그 풍미를 다할 때의 맛까지를 비교해야 한다. 나는 이 음미법을 와인 애호가들에게 ‘잠자는 미인The Sleeping Beauty’에 비유하여 설명하곤 한다. 아무리 미인이라도 수십 년 동안 잠자던 미인이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푸석푸석한 피부에 눈꼽이 끼어 있을 것이고, 세수한 후의 맨얼굴은 자연미인의 것이겠지만, 화장한 얼굴은 더 화려하고 매혹적일 것이다. 와인에 비유한다면 화장한 얼굴을 내보인 그 순간이 디캔팅을 통해 최고조의 맛과 부드러운 향기가 우러나오는 시점이다. 만약 매번 디캔팅해 마신다면 우리는 항상 미인의 화장한 얼굴만 보는 셈일 것이다. 또한 한 병의 와인 속에서 피어나는 향기의 변화 과정을 통해 유년기?청년기?장년기 그리고 노년기의 인생 역정을 반추할 수 있다면 우리는 와인을 통해서 더 많은 철학과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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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와인 잔으로 바꾸어야 하는가?
“와인이 바뀔 때마다 반드시 새로운 잔으로 마셔야 한다”는 게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제에 대해 나는 이미 언급한 ‘디켄팅’처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나는 상대방에게 격식을 차려야 할 비즈니스 디너나 외교적인 모임을 제외하고는 샴페인 잔, 화이트와인 잔, 레드와인 잔 각 한 개씩으로만 와인을 마신다. 와인을 마신 후 잔을 잘 세척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다. 보통 전문가들은 베이킹파우더로 세척한 후 고온의 수증기와 함께 마른 수건으로 닦아낸다. 그런데 민감한 사람들은 이렇게 정성들여 닦은 잔에서도 세척제와 물 고유의 냄새를 느낄 수 있다. 와인 잔은 와인으로 세척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마치 어패류를 바닷물로 씻는 게 좋은 것처럼……. 실제로 유럽의 고급 레스토랑들에서는 손님이 주문한 와인을 소믈리에가 와인 잔에 조금 부어 잔의 내벽에 코팅하듯이 흔들고 버린다. 따라서 같은 종류의 와인을 마실 때는 새로운 병을 열어도 굳이 잔을 바꿀 필요가 없다. 사용했던 잔은 와인으로 이미 자연스럽게 세척된 잔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세하게 남은 와인이 새로운 와인의 맛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이를 분별할 수 있는 슈퍼 테이스터Super Taster를 본 적은 없다. 최악의 경우는 마시고 난 잔에 물을 부어 행군 후 그 잔으로 새로운 와인을 마시는 것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와인 잔 바꾸지 않기 운동’을 하고 있는데, 이는 두 가지 면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하나는 레스토랑이나 와인 바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노고를 줄여주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물을 아끼고 폐수를 줄이는 환경 보호를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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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두에는 포르투갈인들의 눈물이 녹아 있다
세투발에서 여러 와이너리 방문을 마치고 오랜만에 나는 바다처럼 넓은 테주Tejo강을 건너 리스본에 입성했다. 기원전 1200년경에 페니키아인들이 영국과의 무역 거점으로 건설했다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의 풍모가 넘쳐났다. 저녁에 테주강가의 식당에서 생선구이와 커다란 솥에서 막 삶아낸 문어를 안주 삼아 상큼한 비뉴 베르드로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리스본에 머무르는 동안 매일 저녁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Nachtzug nach Lissabon〉에 나오는 뒷골목에 있는 포르투갈의 전통 음악인 파두Fado 공연장을 찾았다. 그 어원이 ‘숙명’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단어 ‘파툼fatum’인 파두는 스페인의 플라멩코Flamenco에 대비되는 대항해 시대의포르투갈인의 한恨을 노래하는 국민 음악이다. 인생, 추억, 향수, 사랑의 슬픔을 주제로 한 애절한 음률이 한의문화에 익숙한 나를 유혹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나는 이따금 리스본에서 구입한 대표적인 파두 가수 크리스티나 마데이라Cristina Madeira의 음반을 감상하면서 유럽이면서 유럽이 아닌 듯한 유럽의 변방, 포르투갈의 와인과 문화를 추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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