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나선계단을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 중 한 사람이다. 누가 계단을 올라올 때, 그가 정수리부터 얼굴, 가슴과 허리 순으로 나타나 마침내 시를 좋아하는 독자의 온전한 모습을 드러낼 때 여전히 나는 세상에 없는 신비를 목도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 기분은 찾아올 때와 반대의 순으로 그가 사라져갈 때에도 마찬가지다.
--- p.27, 「나선계단, 이야기가 쌓여가는 방식」 중에서 중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책과의 말없는 대화에 몰두하는 존재이다. 그들은 책장 앞에서 잠시 사라져버린다. 오직 책의 세계에 자신의 전 존재를 위탁하기 때문에. 현실의 감각은 닫히고 텍스트가 인도하는 책 속의 세계에 깊이깊이 파묻히고 만다. 그런 순간은 아무도 방해해선 안 된다. 나는 그를 내버려두고 나의 책상 위에 전념하며 누군가 서점에 있다는 사실을, 그가 책장 앞에 서서 책을 읽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기도 한다. 그러다 가볍게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에 혹은 책장에 다시 책을 꽂아넣는 소리에 퍼뜩 깨닫곤 하는 것이다. 아 그래, 누가 있었지 하고 생각하면 어딘가 조금 따뜻해지는 것 같다. 시를 읽는 방식으로 잠시 어딘가에 다녀온 사람을 마중하는 것 같아서.
--- p.35~36, 「소리, 서점에 살고 있는」 중에서
한밤의 서점은 장롱 속을 닮았다. 찾아왔던 이들의 온기가 완전히 사그라들고 오직 나만 남았을 때 나는, 서점의 조명을 아예 꺼버리거나 최소한만 남겨둔다. 서점의 고요는 책들이 내는 소리와 같다. 무언가 빨려들어가는 듯한, 아니 빨려들어가다가 멈춘 듯한 조용함. 그러므로 애써 들으려 하면 무언가 들릴 것도 같은데 실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그 ‘소리’를 ‘지켜본다’. 보고 있는 것만 같다. 턱을 괴고 앉아서 우두커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간신히 숨만 쉬면서. 지루한 줄도 모른다. 책들이 내는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정말 편안하게 만든다. 늦은 시간 자꾸 캔맥주를 따게 되는 것은 이 탓일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핑계를 만들어서 조금 더 있고 싶은 것이다.
--- p.39~40, 「조명, 느릿하고 부드러운」 중에서
위트 앤 시니컬에는 자금자금한 것들이 참 많다. 하나같이 내 친구들이 놓아준 것이다. 그나저나 왜 친구들은 이런 작은 것들, 어느 해변에서 주워 온 조개껍데기라든가, 움직이지 않는 양철 로봇이라든가, 얼굴이 그려진 귤 모양 양초, 표류하는 사내가 든 스노볼, 낚시를 하고 있는 두 마리 고양이, 구름 모양의 조명 등등의 것들을 선물하는 것일까. 그런 것들로부터 위트 앤 시니컬을 떠올리는 것일까. 쓸모보다, 아름다운 것. 쓸모와는 다른 쓸모가 있는 것이 시, 라고 알려주는 것처럼 말이지.
--- p.61, 「인형, 어쩌면 서점의 주인」 중에서
겨울에는 귤을 담아 책상 위에 올려놓기도 한다. 주인이 따로 있다 여기는지 먹는 사람은 없다. 그 귤들이 오래되어 말라버리면 그것이 참 서운하다. 서점 일의 많은 부분이 그렇다. 이러저러한 기획을 해보지만, 의도대로 되지는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준비해놓고 마냥 기다릴 뿐이다. 그러다 누가 귤을 까고 있다면, 그 모습을 보게 되기라도 하면 정말 기쁘고 즐겁다. 서점 일이란 게 그렇다. 책상 위에 귤을 올려놓고, 누군가 먹어주기를 기다리는 그런 사소하고 조그만 궁리들.
--- p.65~66, 「책상, 사소하고 조그마한 궁리들」 중에서
한곳에 머물러 맞이하는 입장이 되어서야 떠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세상 모든 장소가 그렇듯 서점에도 떠나는 이들이 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거리가, 마음이 멀어져서. 불가피하게 자연스럽게. 떠나게 된 사람들은 돌아오기도 하고 여태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 여기 남아 있는 나는, 나의 서점은 그저 그들의 안녕을 궁금해하고 바라고 짐작할 뿐이며 어쩔 도리가 없으니 잘 있다가 그들이 돌아오면 환대를 해주어야겠다 다짐한다. 매일매일 다짐을 하면서 어제도 오늘도 아마 내일도 이 자리에 있고 있을 것이다.
--- p.116, 「단골, 떠남과 버팀」 중에서
무언가 가라앉고 있다. 가늘게 눈을 뜨듯 세심해지면 알 수 있다. 공중에 떠도는 희미한 비냄새와 더불어 읽는 마음을 독려하는 얇고 투명한 한 꺼풀. 책 위에. 책을 살펴보는 사람들 위에도 덮여 있다.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이는 서점지기들만의 비밀일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 몇 개 있다. 이를테면, 여름 잎사귀 그림자의 소리 같은 것. 한자리에서 오래 창밖을 보는 직업이 가질 수 있는 특권 같은 것이다.
--- p.164, 「우산, 우리 모두의 것」 중에서
종일 이런 일들을 궁리한다. 내가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이어 발생하는 사건들. 위트 앤 시니컬은 작은 서점. 직접 찾아와야 누릴 수 있는 곳. 작다니. 시집이라니. 서점이고 직접 누려야 한다니. 버튼 서너 번 누르면 내가 있는 곳까지 책이 배송되는 시대에 허점과 약점뿐이다. 그런가. 언제부터 걸어가 서점을 찾는 일이, 책을 골라 계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허점과 약점이 되었지. 서점을 찾아가는 동안 보고 듣는 것들이 주는 즐거움, 서점을 떠날 때 내 책을 얻었다는 기쁨, 이런 일은 계산할 수 없어서 이익을 본 사람도 손해를 본 사람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작은 서점의 일.
--- p.261~262, 「이벤트, 실은 서점의 일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