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일하냐고 묻거든 그저 웃지요]
학교를 졸업하고 밥벌이를 시작할 때만 해도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글 쓰고, 책 파는 삶’을 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만나고, 접해보지 못한 직업인들을 만날 기회가 많아졌다. 그때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경희입니다. 파인애플을 좋아해요. 책 읽는 것도요. 요즈음에는 재테크에 관심이 있어요”라 말하지 않는다. 소개팅 자리가 아니고서야 이런 소개를 할 일은 거의 없다. 사실 소개팅 자리에서도 통성명 다음에는 ‘그럼 무슨 일 하세요?’로 이어지니까. 어쩌면 일을 빼고는 나를 설명할 수 없는 것 같아서 “안녕하세요. 김경희입니다. 서점을 운영하고요, 몇 권의 책을 냈어요”라 말하며 일로 나를 소개한다.
일이 나의 타이틀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일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자아실현? 사회에 이바지? 아니다. 먹고살기 위한 것이다. 지구를 구하는 일도 아니고 생명을 구하는 일도 아니다. 대단한 사명감도 없다. 그저 내 힘으로 나 하나를 책임지기 위한, 생계를 위한 일.
--- pp.11~12
[프리랜서로 살면서 생긴 기준]
‘안녕하세요. ○○의 아무개입니다. 어쩌고저쩌고 저희는 이러한 회사고~ 이번에 엄청난 행사를 준비하고 있으며~ 장소는 어디고~ 시간은 언제며~ 행사 주제는 무엇이며~ 함께 진행하는 출연자는~ 시간은~ 이렇습니다. 참여 가능한지 회신 부탁드립니다.’
장황한 메일과 첨부 파일에 담긴 회사와 행사 소개. 모든 게 꼼꼼하지만 하나가 빠졌다. 바로 돈. 행사를 진행하는 주체도, 행사의 주제도 너무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돈이다. 돈만 쏙 빠진 제안 메일을 받을 때면 한숨부터 나온다. 내 노동에 대한 대가로 상대가 얼마를 지급할 생각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이리 재고 저리 재게 된다.
‘나에게 맞는 행사인가, 내가 잘 준비할 수 있을까, 가능한 일정인가?’ 아…… 부질없다. 노동의 대가가 얼마인지도 모르는데 혼자 종일 고민하고 있으면 뭐 하나. 노트북을 열어 회신을 보낸다. 제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당일 다른 일정이 있어 참여가 힘듭니다. 모쪼록 행사 잘 치르시길 바랍니다.
제안서에 강연료 혹은 원고료를 명시하고, 지급 일자까지 적어서 보내는 곳이 있다. 그런 곳과 일하면 된다. 내가 너무 돈, 돈 하는 거 아니냐 싶을수도 있다. 하지만 일을 제안하면서 돈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나의 시간과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그런 곳과의 일은 거절한다.
(……) 내가 얼마를 받게 될지, 받게 된다면 언제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태로 일을 하던 때가 있었다. 돈 이야기를 꺼내는 게 어려워서. 한참 후에 통장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 이 돈이었구나’ 했다. 일을 받는 처지라 일을 주는 상대에 모두 맞춰서 응대하고, 따랐다. 하지만 점차 깨달은 것은 ‘일의 주체는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 내게 일은 돈을 벌기 위한 활동이고, 나는 내 노동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받아야 하니까.
사회인 8년 차. 회사원에서 자영업자, 자영업자에서 프리랜서, 프리랜서에서 다시 급여노동과 프리랜서 일을 겸하는 사람으로 변신하며 쌓인 데이터를 분석해 본 결과, 일할 때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일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 합리적인 마감 일정, 그리고 돈. 그 중요성을 잘 알기 때문에 종종 내가 일을 제안하는 주체가 될 때는 메일로 업무의 내용과 마감 일정 그리고 돈을 꼭 명시한다. 그게 일의 의미나 재미나 그 모든 것보다 중요하니까.
--- pp.21~25
[연봉 두 배 올린 썰 푼다]
단골손님에서 직원이 되어 분위기를 익히고 적응하며 시간을 보내니 한 달의 시간이 훌쩍 지났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도 사장님 혼자 일해서 한 사람의 인건비를 겨우 가져갈 수 있는 상황인 걸 뻔히 알고 있었으니, 월급을 받을 마음은 없었다. 내 통장에는 회사 다니면서 모아둔 적금이 있었고, 조금 도와주다가 적당한 때가 되면 네 번째 직장을 찾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장님이 월급을 보냈다. 나는 정말 괜찮다고, 돈을 돌려주기 위해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다고, 더 많이 못 줘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내 월급 주겠다고 본인 월급 못 가져갔을 걸 생각하니 짠한 마음이 들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사장님은 버는 돈 없이 어떻게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을까 하는 걱정도 함께.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업데이트할 때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두 사람분 인건비를 만들자.’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출근한 나는 ‘무슨 일이든 시켜주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며 앉아있는데 사장님이 어째 일 시킬 생각을 전혀 안 했다. “제가 송장 출력을 해볼까요? 아니면 홈페이지에 업로드 좀 해볼까요?” 말할 때마다 괜찮다고만 했다. 아니 괜찮으면 안 되는데. 두 명분 인건비를 챙기기 위해서는 두 명이 밤을 새워 일해도 모자랄 판인데 왜 자꾸 괜찮다고만 하는 거지 싶어 가만히 지켜보니, 사장님은 일을 시켜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혼자서 일한 시간이 길다 보니 그에 익숙했고, 솔직하게 말하면 스스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맙소사.
이렇게 앉아만 있다가는 둘 다 굶어 죽는다. 일을 시키지 않는 사장님을 마냥 기다릴 순 없었다. 나한테 일을 시키지 않으면 내가 시켜야지.
“사장님, 송장 프로그램 사용법 좀 알려주세요. 지금 당장요.”
“이거 다 사장님 개인 책이에요? 이제 안 보실 거죠? 그럼 이거 온라인에서 제가 팔 테니까 일러스트로 템플릿 좀 만들어서 저한테 5시까지 보내주세요.”
“출근 중이시죠? 책 사진 찍을 때 배경이 중요하니까 화방 들러서 배경지 사 오시고요. 앞으로는 배경지에 놓고 책 사진 찍어서 홍보해주세요.”
그렇게 하나씩 일을 시켰다.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하면 베스트겠지만 쉽지 않았다. 시킬 수 있는 사람이 시켜야 했다.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역할 따위는 없었다. 나에게 중요한 건 일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 pp.60~62
[나는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텔레비전을 껴안고 살았던 나는 자연스레 삶을 드라마로 배웠다. 학교를 졸업하면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임신·출산·육아로 이어지는 삶. 드라마 속 30대 여성들은 모두 그렇게 살고 있었으니까.
겨우 들어간 대학교를 겨우 졸업해서 일을 시작했을 때, 내가 세운 계획은 이러했다. 1년 부지런히 일하고, 그다음 단계의 경력를 위해 준비하며, 결혼 전까지 5000만 원의 결혼 자금을 만들자. 그렇다. 내 일의 종착지는 결혼 자금이었다. 스물여덟에서 서른 사이에는 이뤄내야 할 나의 과업. 그러면 결혼 이후의 삶은 계획하지 않았냐고? 했다. ‘퇴사.’
아, 이제 와 생각하면 도대체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한 건가 싶다. 일에 욕심이 있었고, 퇴근 후에도 부지런히 학원에 다니고, 자격증 공부하며 자기계발에 힘썼지만 5년 한정짜리였던 셈. 결혼 전까지만 일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다.
더는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본다. 내 영원한 친구 텔레비전은 내가 할머니가 돼서도 함께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세상은 정말 빨리 변하고, 그만큼 나도 따라 변한다. 휴대폰 작은 화면 속에는 낯설면서 반가운 사람들이 보인다.
‘결혼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네?’
‘어? 저 사람이 58년생이라고?’
‘어?? 저 사람은 54년생???’
여성 혼자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1961년생 나의 모친보다 언니인 이들이 말이다. 저 바다 건너 외국에서 일하는 여성이라니. K-국민의 K-정서 콘텐츠를 열렬하게 소비하며 K-삶의 방식을 따르려 했던 나의 세계가 확장되기 시작한다.
--- pp.95~97